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삼국시대 (문단 편집) === 초기(9세기 후반 ~ 918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나말여초(900).png|width=100%]]}}} || || '''{{{#fbe673 900년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성립 당시 판도 }}}''' || 지방세력의 반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890년대는 신라 왕실이 그전 통일신라 영역에 대한 직접 지배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시기로서, 전국에 작은 군벌 세력이 난립해 치안이 매우 나빴다. 아직 궁예나 견훤도 세력을 크게 일구기 전이라 공식적으로 고려왕 및 백제왕을 자칭하진 못하고 있었다. 특히 둘 중 견훤은 거병 이후로도 10년 동안은 명목상으로는 아직 신라의 신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612호]]인 [[http://221.145.178.199:9296/streamdocs/view/sd;streamdocsId=OaWnbqSH9DFbOPCiqPnRNM0GH9akagKJpJOKdcVwB_Q;code=371;type=1|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에 따르면 이 때까지는 여전히 전국 곳곳에 신라 정부의 영이 전해지고 있었다. <[[해인사]]묘길상탑기>에 의하면 해인사도 도적이 침입해 56명의 승군이 전사한 기록이 남아있어 당시 신라 전역의 어수선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900년이 되면 [[견훤]]과 [[궁예]]가 작은 세력들을 흡수해 왕을 칭하면서 본격적으로 후삼국시대가 시작된다. 후삼국시대는 주로 태봉~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주도권 싸움 같은 양상을 띄었다. 지도 상 영토는 작았지만 전라도 곡창 지대의 생산력과 경제력이 엄청났기 때문에 주도권은 늘상 거의 후백제에게 있었고, 군사력도 태생부터 [[양길]]과 [[궁예]]의 어중이떠중이 군대에서 시작한 태봉~고려에 비해, 힘을 잃기 전 통일신라 정규군의 유산을 보다 충실히 계승한 후백제가 더 강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견훤은 14살에 신라 수도인 서라벌로 상경해 군졸부터 시작하여 부정부패가 만연한 신라 말기에 어떤 뒷배경도 없이 자기 힘으로 승진해 명을 받아 직접 중앙 정규군을 이끌고 서남해의 해적 토벌을 맡았다가 현지에 눌러앉은 케이스였다. 훗날 공산 전투에서 크게 이기게 된 배경도 그가 신라 정규군 출신이었던 게 크게 작용했다.] 어쨌든, 궁예의 후고구려는 초기에는 기세가 꽤 좋아서 견훤이 손을 뻗히기 전에 [[충청도]] 상당 부분을 장악하였고[* 옛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부여 일대는 오히려 후백제의 변방 국경 지역이 되어버렸다.] 신라를 멸도라 부르며 경북 지역까지 진출한 것은 물론 북쪽으로는 [[대동강]] 유역까지 나아가 평양 일대를 수복하기에 이른다. 또한 통일신라 군주들이 혹시 모를 반발을 의식하여 미처 군현을 편성하지 않은 재령강 이서 일대[* 오늘날 황해도 서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직접 지배령으로 편입해 원성왕계 왕실이 오랫동안 고민하다 끝내 못했던 패서 일대에 대한 조치를 너무나도 쉽게 끝내버렸다. 다만 특기할 만한 점이 하나 있다면 경기도 북부 일대는 수월하게 장악했지만, 우리가 왕건 집안의 근거지로 알고 있던 황해도로 진출하는 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는 것. 거리로 보나 지형으로 보나, 옛 한성백제처럼 거기서 바로 황해도 방면으로 진출하는 게 더 쉬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서 잠깐 북진을 멈춘 다음 경기 남부-충청 북부 일대를 장악하는 모습이 보인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다른 신라 치하 지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큰 자율을 누리던 패서 지역이 약간 더 비협조적이었거나, 아니면 경기 남부가 보다 저항이 적었던지 등의 이유로 추측되고 있다.] 여하튼 궁예는 [[패서]] 지역을 직접 지배 지역으로 아우르면서 고려란 국호가 부끄럽지 않은 체제를 구축했고, [[나주 공방전]] 끝에 나주를 탈취하고 견훤을 수전에서 박살내어 조선 시대 기준이긴 하지만 조선 팔도 일대에 모두에 영토를 걸쳐 적어도 영역만으로 보면 후삼국들 중 최대 판도를 이룬다. 당시 나주는 백제 이전에 마한 시대부터 내려오는 전남 일대의 큰 세력이었고, 후백제 입장에서 보면 수도 전주에서도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런 지역을 통째로 내줬으니 후고구려가 후백제의 뒤통수에 총구를 겨눈 셈이었다. 게다가 904년에는 신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경북 서부 일대 전역까지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계속 이 판도로 유지했다면 후백제도 오래 가진 못했겠지만, 이상하게도 904~907년의 과정을 거쳐 기껏 장악한 [[삼년산성]]을 비롯한 추풍령 지역을 별다른 큰 전투 없이 후백제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 시점부터 궁예가 3년만에 고려란 국호를 버리고 마진 국호를 택하면서, 백제계 호족들을 끌어들여 패서 호족들을 탄압하려고 하던 때인데 그런 영향일지 모른다.] 후백제는 그 과정에서 옛 백제가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후론 한 번도 되찾지 못했던 충북 남부 지역과, 옛 백제가 아예 발도 들여놓지 못했던 신라의 강력한 서부 방어막인 경북 서남부 일대를 장악하게 되는데, 후고구려가 후백제의 뒤통수에 총구를 겨눴다면 후백제는 여전히 정통성 면에서 아직은 중요했던 신라 왕실의 얼굴에 총구를 겨누게 되어 나중에 고려와 신라를 여러모로 괴롭히게 된다. 하지만 궁예 자체는 고구려계가 아니었던지라 그닥 패서 호족들에게 얽매이고 싶지 않아 했던지,[* 패서계 호족은 후고구려 건국에 기여했지만 그들은 이해관계가 맞아 궁예에 협력했을 뿐, 궁예의 친위 세력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궁예의 친위세력은 청주 호족이었다. 철원으로 천도할 때도 친위세력을 키우기 위해 청주의 주민들을 사민했었다.] 고려란 국호를 버리고 더 넓은 의미의 [[마진]], [[태봉]]으로 바꾸고, 자신을 [[미륵]][* [[미륵신앙]]은 6세기경 [[백제]] [[웅진성]] 일대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해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데 혼란기인 후삼국시대에 대히트를 치게 된다.]이라고 자칭하는 등의 지나친 중앙집권화를 진행하는데 이러면서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던 [[패서]] 호족들[* 현재의 황해도와 평안도의 옛 고구려 지역 출신.]의 인심을 잃었다. 결국 궁예는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쫓겨나고, 패서호족 그 자체인 [[왕건]]이 즉위하면서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91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