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스 (문단 편집) === 국공내전 이후 === >"당연하지만 우리는 [[중국|그곳]]에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침묵할 자유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공산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믿음과 충성심에 관련하여 긍정적인 진술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 >1950년 10월 2일, 타임지와의 인터뷰. 주유엔 중화민국 대사로 부임하여 미국에 머물렀다. [[타임지]], [[뉴욕 타임즈]] 등에 중국의 정통 정부와 지도자로서 중화민국과 장제스를 옹호하는 인터뷰를 하고, 대만의 지식인들과 [[중국국민당]] 간의 갈등을 중재했다. 이후 장제스에게 내전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 후 다당제 정치체제로 개혁하고 나서 [[국민대회]] 개최를 통해 정식으로 [[대만 총통|총통]]과 부총통을 선출함으로 법적 정통성을 회복하라고 권고했다. 장제스가 이를 일부 수용하면서, 1954년 2월 19일 타이베이 중산당에서 개최된 [[제2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중화민국 국민대회 제1계 2차 회의]]에서 의장으로 추대되어 단절된 국통이 다시 이어졌음을 축하하는 축사를 발표했다. 그리고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6.25 전쟁|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귀순한 [[반공포로 석방 사건|14,000명 반공포로]] 중 대표 50명의 귀환 의식을 직접 주재했다. >"그대들의 자유의사에 따른 귀환은 자리에 참석한 국민대회 위원뿐 아니라, 모든 대만인, 나아가 모든 세계인들을 흥분시키고, 대륙의 수많은 동포들에게 지대한 희망을 줄 것이다." 1958년 [[대만]]으로 영구귀국하여 중앙연구원 원장을 지냈고 대만에서도 자신의 강경한 개혁 사상을 주장하며 민주주의와 과학을 위해 중국을 서양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중체서용론자들을 비판했다. 1962년 11월의 강연에서 후스는 동양문화는 정신문화, 서양문화는 물질문화로 이분하는 태도에 대해 비판하며 동양에는 정신문화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고 까버리고 과학과 근대문명이야말로 고도의 정신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의 반발과 후스에 대한 옹호가 이어지는 등 학술 논쟁이 이어졌다.[* 철학적 논쟁 이외에도, 개인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충효인의예지신과 예의염치 등을 강조했던 장제스와 전면으로 충돌했던 주장이었다.] 유교 이데올로기는 역대 전제 정권의 정치적, 권력적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라 하여 신문화운동 전후로 크게 비판받았다. 논쟁은 격렬했지만 뿌리깊은 '중체'에 대한 관념이 늘 중화인의 기저에 논재했고, 각자 평행선을 달렸던 전반서화론과 중체서용론은 1960년대 [[타이완 섬]]에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파일:胡適與蔣介石.jpg|width=300]]|| || 1958년 4월, 장제스와 후스 || 이후로도 후스는 장제스에게 개인적인 관계를 이용하여 3당 훈정을 종식하고 민주 개혁을 시행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장제스의 3선을 반대하고 중화민국 내부의 장제스 비판 세력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는 등 [[민주주의]]에 여전히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반공역량 결집을 위해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3당 훈정 외의 정당을 창당하는 일을 비판하는 등의 한계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자유중국 사건|레이쩐 등의 신당 창당 운동]]에 대해서 원론적으로 지지한다고 표명했으나, 본인이 참여하는 것은 끝까지 거부했다. 하지만 반역 혐의로 체포된 레이쩐이 사실 동상을 세워 마땅한 인물이라 칭송하며 그를 체포한 것은 세계의 비웃음 거리가 될 것이라고 혹독하게 까는 등 국민당 일당독재에도 날을 세웠다. 다른 사람들같으면 진작에 숙청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후스의 국제적 명망은 이미 국민당 정권에서 건드리기 껄끄러울 정도의 만렙이었는데다가 어찌되었든 간에 국민당 정권의 정통성을 뒷받침해주는 거물 인사이다보니 불이익은 없었다. 북양정부, 국민정부 시절부터 사회개혁 운동에 참가해온 국내적 명망 만렙에 듀이의 제자와 외교관 경력으로 국제적 명망조차 만렙인 후스가 대만의 국민당 정부를 따라왔다는 것 자체가 국민당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상황이었는데 자기네 정통성 깎아먹으면서 동시에 국제적 반발까지 일으킬 수 있는 후스 타도는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외국에도 뻔질나게 드나드는 후스가 [[리쭝런]]처럼 미친 척하고 중공에라도 가버린다면 국민당의 위신은 이만저만 박살나는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중국의 수많은 세력들과 싸워오면서 성격도 꼬장꼬장했던 후스 역시 자신의 지위를 십분 활용하여 중화문명의 우수성으로 대륙광복을 할 것이라는 장제스에게 "그 중화민족의 보편성이란거 죄다 전 세계 어느 문명 가도 있는건데 헛소리 ㄴㄴ. 총통의 애국심이 너무 지나치신 모양이다"라고 장제스가 발언을 끝내자마자 그의 면전에서 빈정댈 정도의 인물이었다. 당시 [[장징궈]]가 장악한 대만경비총사령부가 위대한 [[중화민족]]의 문명을 업수이 여기는 반동들은 죄다 [[남중국해]]의 고깃밥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서릿발같이 호령하는 가운데 이는 엄청난 발언이었지만 레이쩐 등을 반역죄로 체포해서 조질 수 있었던 국민당도 후스만큼은 직접 공격할 수 없어서 간접적으로 언론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후스는 이러한 공격에 대해서 웃기는 짬뽕이라고 노골적으로 경멸을 표하며 무시했고, 후스의 존재의미를 알고 있었던 대만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후스 옹호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오의 문성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친정부 어용 지식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62년 2월 4일, 회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망 시점에서 국민당에 대해서 온건한 비판이라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후스가 사망한 후 대만의 반정부 세력들은 모두 무력화되어 국민당 일당독재는 더욱 강화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