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야오방 (문단 편집) == 개요 == [[중국]]의 [[정치가]]. 81년 [[화궈펑]]의 사임 후 잠깐 주석을 맡았다가, 87년까지 명목상 당 서열 1위인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1982년 12차 당대회에서 당 주석직이 폐지되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서열 1위를 맡는 것으로 개편된 뒤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는 후야오방이 명목상 서열 1위로서 당을 이끌게 하면서도, 마오쩌둥을 연상시키는 주석직을 맡기지는 않아 배후의 [[덩샤오핑]], [[천윈]] 등 원로들이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이는 덩샤오핑을 위한 꼼수였는데, 56년부터 69년까지 마오쩌둥 주석 밑에서 총서기를 지낸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경력이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후야오방은 마오와 화궈펑의 후계자가 아니라 전임 총서기 덩샤오핑의 후계자로서 당 서열 1위 총서기를 맡게 된 것. 덩샤오핑이 맡았던 총서기는 지금의 중앙서기처 제1서기처럼 당의 일상 실무를 관장하는 보직이었고, 당 서열 1위였다지만 80년대 후야오방이 총서기로서 수행한 실제 역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을 지낸 인물. [[자오쯔양]] 등과 함께 20세기 '''좌절된 [[중국 민주화 운동|중국 민주화]]'''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후야오방은 국가 체제 재정비와 국력 중흥에서 덩샤오핑과 뜻을 함께 하고 개방개혁을 추진했지만 그 와중에서 학생 소요사태 등이 계속 발생하면서 내부의 혼란이 잇다르자 보수파의 반발로 총서기에서 사임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 공산당의 파벌]]중 [[공청단]]파의 시조이다. 그가 발탁한 인물이 바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원자바오는 후야오방이 실각하여 죽고도, 유능함으로 인해 [[자오쯔양]]한테도 금방 심복으로 뽑혔고 계속 승승장구했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