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야오방 (문단 편집) === [[대장정]] , [[중일전쟁]], [[국공내전]] === [[중화소비에트공화국|장시 소비에트]] 시절 마오쩌둥파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28인의 볼셰비키가 자신들이 지휘한 [[제4차 초공작전]]의 패배 책임을 마오쩌둥파에 뒤집어 씌울 때, 패전의 책임을 덮어쓰고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처형 직전 [[대장정]]을 떠나는 공산군 본류에 떨어져 루이진에 남은 잔류 부대를 지휘하는 탄위바오(谭余保)가 개입하여 처형을 면하고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의 일원으로 대장정에 따라가게 되었다. 대장정 와중에서도 심각한 부상을 당해서 낙오될 수도 있었으나, 어릴 때 친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처음부터 산시성 해방구로 향한 [[마오쩌둥]]과는 달리 장궈타오는 [[쓰촨성]]에서 해방구를 건설하자고 주장하였고, 둘은 결별하였다. 하지만 쓰촨성에 잔류한 장궈타오의 부대는 곧 추격해온 장제스의 국민당군에게 개박살이 났고, 부랴부랴 마오쩌둥의 뒤를 쫓아가다가 산시성 근방에서 회교 군벌 [[마부팡]]의 부대에 참패했다. 장궈타오는 간신히 최측근들만 거느리고 옌안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후야오방은 포로가 되어서 한동안 마부팡의 영지에서 강제 노역에 종사했다. 하지만 결국 탈출해서 옌안의 해방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시안 사변]] 이후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자 후야오방은 옌안의 항일군정학교에서 사상교육을 받았고, [[덩샤오핑]]과 친교를 쌓게 되었다. 이때 덩샤오핑과의 인연은 나중에 그가 출세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항일전쟁 내내 후야오방은 옌안에 머무르면서 사상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때 리샤오와 결혼을 하고 1942년 득남했다. 항일 전쟁이 끝난 이후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펑더화이]] 휘하 18병단 정치장교로 [[후쭝난]], [[옌시산]] 등이 지휘하는 국민당군을 교란하면서 활약을 했다. 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후야오방의 부대는 후쭝난군을 계속 추격하여 [[청두]]까지 점령했다. 이후 다시 남진하여 [[구이저우]] 방면으로 진격하여 운남성까지 장악했다. 이 당시 후야오방은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심리전과 정치공작에 능해서 여러 국민당군 장성들을 설득하여 투항시켰으며, 점령지의 관리에도 능해서 별 잡음없이 공산당이 행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후 군부와 당에서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