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야오방 (문단 편집) === 1980년대: 공산당 [[총서기]] === [[파일:external/history.people.com.cn/F201112080926002856300124.jpg]] 공산당 [[총서기]]로 취임한 후 정치·사회 개혁을 적극 추진했고, 문화대혁명 시기 억울하게 박해를 받은 인사들에 대한 사면 복권을 단행했다. 류사오치의 공식적인 복권과 국장도 그의 중앙위원회 주석 재임기인 1981년에 이루어졌다. 인사 능력도 뛰어나 [[공청단]] 출신 중 [[후진타오]], [[원자바오]] 그리고 [[상하이방]]의 [[주룽지]]를 발탁해 그들이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성품이 온후하고 검소하였으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일관되게 지지하였다. 공산당의 1인자인 총서기로 부임한 뒤에도 다른 공산당 고위 관료들과 달리 권력의 상징인 [[중난하이]]에 들어가는 대신 바로 옆에 있는 허름한 집에 머물렀고, 다만 출퇴근의 편의를 위해 담장을 허물어 문을 내기만 했다. 그는 보통 시민이라고 해도 언제나 성심 성의껏 대했고, 스쳐갔던 사람이라도 절대 잊지 않고 근황을 물어보며 하나하나 관심을 보이고 마음을 썼다. 때문에 그의 인간적 매력과 선량함은 정적들까지 인정할 정도였다. 1982년 9월, 12차 당대회에서 지나치게 권위적이었던 당중앙위원회 주석 직함을 폐지하고 이를 총서기 직함으로 대체하면서 당내 민주주의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물론 이건 후야오방의 결단이라기보단 덩샤오핑의 결단이었다.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에 관해서도 온건한 면모를 보였다. [[마오쩌둥]] 시절 금지됐던 티베트 불교 사원에서의 종교활동을 허용했고, 티베트인들을 공무원에 대거 임명했다. 또 달라이 라마가 [[하나의 중국]]을 지키고 독립 노선을 포기하면 티베트의 자치를 허용하고 티베트인을 [[중국 공산당]]의 당직에 임명하겠다는 제안을 하면서 달라이 라마를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하는 등 유화적인 면모도 보였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후야오방의 해임 후 중국 공산당은 티베트에 대해 강경책으로 돌아섰으며, 이에 분노한 티베트인들이 라싸에서 시위를 펼치자 중국은 군과 [[무경]]을 동원해서 이를 유혈 진압하였다. 1989년 시위 이후 중국은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에 대해서 지금까지 불타협, 불관용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로 이때 직접 방탄모를 쓰고 라싸 시내에서 유혈 진압을 진두지휘한 게 바로 후야오방의 정치적 제자인 후진타오였다. 이 공로로 후진타오는 덩샤오핑과 보수파 양쪽의 눈에 들었고, 중앙당으로 진출해서 차세대 지도자 후보군에 들게 된다.] 1983년 11월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일본이 적당하게 자위력을 증강시키는 것에 대해 중국이 반대하지 않는다"고 언급하기도 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1/13/0200000000AKR20170113088400073.HTML?input=1195m|#]] 하지만 1986년 10월,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였던 [[예젠잉]]이 사망하면서 후야오방의 입지는 축소되었고, 1986년 말 상하이교통대학에서 개최한 강연에서 중국과학기술대학 부총장인 물리학자 팡리즈가 권력분립, 다당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나서면서 중국공산당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시작으로 1986년 12월 5일, [[허페이]]의 중국과학기술대학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순식간에 17개시 150여개 대학의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12월 하순에 이르러 상하이교통대학, 푸단대학, 퉁지대학, 푸저우대학, 선전대학, 윈난대학, 광둥 중산대학, 난징대학, 톈진 난카이대학, 베이징사범대학에서도 모두 시위가 벌어졌다. 이를 빌미로 펑전, 리셴녠, 덩리췬, 리펑, 야오이린 등 보수파는 후야오방에게 맹공을 퍼부었고, 칭화대학과 베이징대학에서도 시위가 발생하자 덩샤오핑까지도 격노하였다. 후야오방은 학생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시위는 더욱 거세졌고, 12월 말에 이르러 정부는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학생운동은 생각 없는 인간들이 당의 지도를 부정하려는 난동이라면서 더 까불면 재미 없을 것이라는 으름장을 놓았고, 주요 대도시에서의 시위를 금지하였다. 12월 30일, 덩샤오핑은 후야오방, 완리, 후치리, 리펑, 허둥창을 불러 학생시위를 다루지 못한 것을 꾸짖고 학생운동은 부르주아 자유화 사상을 막지 못해서 일어났다고 질책했다. 여러 지식인들이 출당, 제명당하고 1987년 1월 15일부터 1월 16일까지 소집된 정치국 확대회의는 후야오방이 학생운동을 엄격히 처리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조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후야오방과 같은 공청단 출신의 왕자오궈 서기와 주허우쩌 중앙선전부장 두 사람만 침묵했고 [[시중쉰]]은 문화대혁명식 인신공격을 해선 안된다고 동료들을 말렸지만 이를 제외한 모든 정치국원과 서기들이 후야오방을 물어뜯었고 후야오방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자아비판한 후 총서기 사임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1986년 5월 중공 13대 인사를 정하기 위해 덩샤오핑이 후야오방을 예방하였다. 여기서 덩샤오핑에게 총서기직을 70세 이상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사임 의사를 밝히는데 덩샤오핑은 자신과 다른 원로들이 은퇴할 것이며 후야오방은 완전 은퇴하지 말고 총서기직 대신 13대에서 국가주석이나 종군위 주석 직으로 옮기라고 제시한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은 후야오방은 덩샤오핑 81세 생일 축하연에서 이를 다른 원로들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덩샤오핑은 실제로 은퇴할 생각이 잔혀 없었고 원로들에게 이때 부터 모진 비판을 받으며 13대 인사귄은 중앙고문위원회 소속 8대 원로이자 위원회 상무부 주임인 보이보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학생운동 사건도 겹치면서 원로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기 시작하여 총서기 사퇴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정치국 확대회의가 이를 수용하면서 후야오방은 총서기에서 사임, 그의 정치국 상무위원과 중앙위원회 위원 자리는 빼앗지는 않았으나 직무정지 처분을 내렸다. 총서기는 자오쯔양이 대행했다. 펑전은 후야오방은 당의 집단지도체제 원칙을 위반하고, 정치 원칙상의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는 죄목을 발표했다. 후야오방이 실각하면서 그동안 그가 추진해 오던 개혁 작업도 결국 좌초된다. 중국 공산당은 그가 "자산계급 자유화를 용인하는 '치명적 실수'를 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이후 열린 제13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는 탈락했으나 정치국원으로는 재선되는 등 정치적 경력을 유지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이때 후의 전임 당 주석이었던 [[화궈펑]]도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좌파 왕(王)으로 불리던 덩리췬(등력군)은 1차 투표에서 최저 득표라는 굴욕을 받고 스스로 사임했다. 여기에 자그마한 스캔들이 있었는데, 1930년대 옌안 [[정풍운동]] 때 덩리췬은 반당분자로 몰려 투옥된 동지 리루이 (1917-2019) 의 아내와 간통을 했고, 리루이는 이 때문에 아내와 이혼했는데, 50여년이 지난후 당대회에서 이 문제를 폭로했다. 이 때문에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덩리췬은 도덕적으로 문제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서 표를 거의 얻을 수 없었다. 사실 20~30년대 중국공산당의 해방구는 엄청난 남초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런 불륜 사건은 상당히 흔한 사건이었고 조강지처만 본 저우언라이 정도나 좀 특이한 경우다.] 하지만 자신의 후계자로 그를 무척이나 아꼈던 덩샤오핑은 아주 냉정하게 그와의 관계를 단절하였고 가끔 게임을 하러 그를 부를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후야오방이 그의 초대를 거절하자 곧 중단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후야오방이 덩샤오핑에게 배신감을 느껴 그와 어울리기 거부했다는 말도 있고 반대로 덩샤오핑이 후야오방에게 실망했기 때문에 싸늘하게 벽을 친 것이라는 말도 있다. 후야오방은 형식적 비판을 받고 끝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예상 외로 절친했던 친구들에게까지 조리돌림을 당하게되자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회의가 끝난 이후 그는 집에 가지 않고 회인당 앞에서 대성통곡하였으며 정치국 공보에서 자신의 과오로 지적한 여러 문제에 대해서 음해라고 반박하는 한편, 총서기에게 그 정도 권력도 없느냐고 항변하고 이럴 줄 알았다면 총서기에서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사실상) 지시에 따라 후야오방은 비판 회의(민주생활회) 전 이미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고, 회의에서 집요하게 공격을 받자 사직원을 제출한 것을 후회한 것. 이렇게 후야오방 공격에 참여했던 다른 정치국원들은 미안함을 느꼈는지 완리는 후야오방이 좋아하는 개고기 요리를 후야오방의 집에 보내주었으며 자오쯔양은 자신은 후야오방을 크게 공격하지 않았다고 훗날 변명했지만 회의록에는 자오쯔양도 상당히 쎄게 후야오방을 공격했다. 강경파 [[리펑]]도 천안문 사태 관련 회고록인 '6.4일기'에서 후야오방에 대해서 정치적 견해는 달랐으나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후야오방과 함께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끌었지만 한편으로는 경쟁했던[* 일각에서는 후야오방의 실각에 자오쯔양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자오쯔양 본인은 이를 부정했다. 자오쯔양과 함께 실각한 또 다른 온건파인 후치리는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을 지나치게 비판했다고 그를 비판했다.] 자오쯔양 역시 자신의 구술 회고록에서 후야오방에 대해 비록 경제 분야에서는 의견이 갈리기도 했지만 청렴하고 정직하고 민주적인 지도자였다면서 그가 더 집권했다면 중국은 더 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며 높이 평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