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이족 (문단 편집) ==== 마화룡의 회민 반란 ==== 태평 천국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 토호들이 한족 농민들을 무장시키는 과정에서 갼쑤, 섬서 지방에서 후이족 농민들과 한족 농민들간의 유혈 충돌이 점점 심해지다가 결국 1862년 후이족 반란[* 영어권에서는 간쑤, 섬서의 후이족 반란과 신장의 야쿱 벡 정권 성립을 묶어서 Dungan Revolt라고 칭한다.]이 일어났다. 그에 앞서 [[윈난성]]에서는 판사이[* 원나라 때 윈난성으로 이주하여 윈난성과 미얀마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무슬림들.]들이 농민 출신 생원 두문수의 지휘 하에 이미 1856년 봉기하여 대리를 비롯한 50여개의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이른바 [[평남국]]을 건국한 상황. 섬서성의 회민 반란은 마명심의 후계자 중 한 명이었던 마화룡을 정신적 지도자로 삼았으며 신장의 팔기군 기지들로 향하는 보급로를 차단, 파괴했다. 2년 후인 1864년에는 신장의 후이족들이 1850년대 윈난성의 회족들처럼 수천명 단위로 각지에서 집단 학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후이족들이 대거 봉기하고 신장의 [[팔기군]] 요새들을 포위하였다. 후이족들이 몽둥이와 식칼을 들고 팔기군 요새를 기어오르자 보급이 끊어진 상태에서 희망을 잃은 만주족 팔기군들은 대개 요새와 함께 자폭하는 방법을 택했다 한다. 흥미롭게도 1862년 일어난 간쑤성과 섬서성의 회족 봉기는 오늘날 서구권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과 패턴이 유사하다. 박탈감을 느끼던 무슬림 소수자들이 극단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종교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 비무슬림 국가 정권을 대상으로 지하드 무장저항을 준비하는 지하조직을 운영하고, 사상적으로 극단화하며 자금을 모아 무기를 구입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내몽골과 베이징을 중심으로 무역하던 부유한 상인이었던 마화룡은 무슬림은 비무슬림들과 융화[* 다른 지역 무슬림들이 원칙적으로는 정교일치를 추구한 것과 다르게, 후이족 사회에서는 아예 기독교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마따나 세속 정권에 충성하면서 정교를 철저히 분리하는 문화가 있다. 중국어를 사용하면서 한문으로 된 책을 읽고 살았으니 종교가 이슬람이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사고방식이 한족과 유사할 수 밖에 없었다.]를 추구하던 전통적인 회족 문화를 이단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비밀리에 구입한 화기를 이용하여 병력을 운용하였다. 마화룡은 부유한 상인이었으나 회족 봉기에 참여한 지역인 감숙성, 섬서성은 청나라에서 가장 빈곤하고 낙후된 지역 중 한 곳이었다. 후이족 자흐리야 교파 반란은 빈곤하고 박탈감을 느끼던 소수자들이 지하조직을 운영하며 현대 무기를 구입하여 사병을 운영하는 형태의 극단주의 운동의 전형적인 사례 중 하나였으나, 후술하는 이유로 후대 이슬람 근본주의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일단 회민 반란은 이른바 청나라 최후의 명장 [[좌종당]]에 의해 진압되었다. 좌종당은 자신이 훈련시킨 한족 사병들을 데리고 먼저 간쑤, 섬서성의 후이족 반란군들을 차례로 진압했다. 섬서성 내 회족 인구 중 한족 민병대의 후이족 살로 사망한 경우는 70~80만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후이족들을 마구 학살하던 섬서성 내 한족 향병들과 다르게 보다 이성적인 입장이었던 좌종당은 후이족 반란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마화룡과 그의 친지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하였으나, 그 외에의 후이족 지도자들은 사면하고 받아주었다. 당시 [[베이징]]에 살던 후이족들은 교리 문제로 마화룡의 자흐리야파와 서로 대치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회민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고, 청나라 조정에서는 후이족들이 교파에 따라 반란 참여 정도가 다른 것을 보고, 태평천국 운동 지지자들을 박멸할 때와 따르게 투항하는 사람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조건을 내걸었다. 좌종당의 경우 마화룡이 속한 자흐리야 파에 속한 후이족들은 항복한 경우에도 처형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자흐리야파 외에는 비교적 관대한 조건으로 사면해주는 경우가 많았으며, 오히려 이들 중 군사적으로 능력이 있는 자들을 적극 육성하여 이들이 [[칭하이성]]을 지배하는 군벌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후이족 반란 진압 이후 1876년부터 1878년까지 섬서성을 중심으로 가뭄과 이에 따른 기근으로 중국인 2천만여 명이 사망하였다. 400만여 명에 달했던 섬서성 내 후이족 인구는 반란과 뒤이은 기근으로 2만여 명 수준으로 격감하였다. 후이족 상당수는 반란 진압과 뒤이은 대기근을 피해 간쑤성, 섬서성을 떠나 칭하이성 같은 인구 밀도가 낮은 변경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인구가 낮은 지역으로 이주한 후이족들이 새로 땅을 개간하면서 빈곤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