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작 (문단 편집) ==== [[변경백]] ==== 상술하였듯 라틴어에서 Marchio로 쓰이는 작위는 원래 프랑크 왕국에서 유래한 관직이었다. 프랑크 왕국 시절에는 관직을 겸임하거나 복수의 관할구역을 담당하는 것이 불가능 했는데, 변경주에는 폭넓은 군사권과 사법권이 인정되었고 국경 밖으로 군대를 보내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지고 있었기에, Markgraf는 중세 초기에 유력한 영역제후로 성장할 수 있었다. Markgraf 외에도 프랑크 왕국에는 Mark와 유사한 수준의 사법권이 부여된 Land를 담당하는 [[방백#s-3|방백(Landgraf)]]이나 [[팔츠|궁정(Pfalz)과 그 주변지역]]을 담당하는 [[궁정백|궁정백(Pfalzgraf)]]처럼 일반적인 Graf보다는 서열이 높게 취급되는 지위가 있었다.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Land나 Pfalz는 당시 독일 지역에만 남았으나, Mark는 그 특성상 지금의 프랑스·카탈루냐·이탈리아 같은 다른 유럽 지역에도 설치되었다. 프랑크 왕국이 붕괴됨에 따라 관직 겸임 제한 원칙도 흐지부지 되면서, 여러 작위를 겸임하거나 복수의 구역을 차지한 영역제후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독일 지역의 경우엔 주변 지역들이 모두 기독교로 개종해버려 변경주 본래의 가치가 점차 퇴색되었고,[* 때문에 프랑스와 군사적 충돌이 잦아진 뒤에는 프랑스 방면에 변경주가 설치되기도 했다.] 이미 상당한 세력을 갖춘 변경백들은 [[부족 공국]]을 견제하려는 황제의 의중에 따라 [[공작]]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신성 로마 제국에 [[선제후]] 제도가 도입되고, 공작이 선제후에 다음 가는 지위로 공인되었을 무렵엔, 선제후나 공작으로 승격하지 못한 변경주는 대체로 다른 유력 제후령에 흡수당한 상태였으며, 이는 기존의 방백이나 궁정백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신성 로마 제국에서 변경백은 단순히 백작(Graf)의 특수한 칭호 중 하나로 취급되었다. 반면 서유럽 지역에선 10~12세기엔 [[성주#s-1.1|성주]]에서 기원한 자생적인 토착 유력자들이 할거하면서 변경백(후작)을 자칭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동안 사칭 작위로 취급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왕이 공식적으로 지정하는 변경주와 변경백의 역할은 꾸준히 중시되어 결국 공작보다는 낮지만 일반적인 백작보다는 격이 다른 별개의 지위로 여겨졌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제가 정착되면서 후작은 공식적으로 공작보다는 낮고 백작보다는 높은 작위가 되었다. 자연히 자신들의 Marchio(후작)를 신성 로마 제국이나 일부 동유럽 지역의 Markgraf와 구별하기 시작했고, 아예 이들에 한정지어 독일어 Markgraf를 옮긴 다른 별개의 어휘를 사용했다. 스페인에서는 작위 중에 후작이 대세다. 스페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11년 기준 2,874개의 작위가 있었고(중복보유자까지 고려하면 실제 귀족 총원은 2,205명) 그 중 후작위는 2009년 기준 1,370개로 거의 절반에 가깝다. 이건 현대에도 마찬가지인데 [[후안 카를로스 1세]] 치세에 서임된 50개 작위 중에 35개 작위가 후작이었다. 이는 스페인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데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새로 편입된 지역들은 보통 변경주로 지정되다보니 후작이 이렇게 많아진 것. 근대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프랑스 제1제국|제정]]을 시행한 뒤로 귀족 작위 제도를 재도입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후작과 자작은 도입하지 않았다.''' 때문에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뤄지면서, 프랑스로 복귀한 왕당파 귀족들 사이에선 후작이 "'''코르시카 촌뜨기가 멋대로 임명했을리 없는''' 순수한 프랑스 왕국의 귀족"임이 분명한 작위로 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