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진타오 (문단 편집) == 고통과 수난의 10년 권좌 == [youtube(pQ2rgB4olck)] 권좌를 차지한 10년 동안 전임자 장쩌민의 상왕 행세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002년 당 총서기를 이양받았지만 장쩌민은 핵심 요직인 중앙 군사위 주석직을 장악한 상태에서 기존의 7인 체제였던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의 정원을 9명으로 확대하고 해당 상무 위원에 무소불위의 권좌가 되어버린 정법위 서기[* 당시 정법위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우리나라로 치면 검찰, 법원, 국정원을 전부 산하에 둘 뿐만 아니라 무장 경찰권의 지휘권마저도 정법위 서기에 귀속되어있다. 이 정도면 그냥 또 다른 권좌라고 해도 무방하다.](당시 정법위 서기는 장쩌민의 측근인 [[뤄간]]이 역임하고 있었고 그 [[저우융캉]]은 공안 부장에 재직할 시절이다)까지 편입시키면서, 상무위 9명 중 6명 가량을 상하이방으로 채워넣다시피했다. 결정적으로 장쩌민은 궈보슝과 쉬처이허우를 중앙 군사위 부주석으로 삼아, 군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게끔 만들었다. 일련의 과정들은 훗날 후진타오가 중앙 군사위 주석을 인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허수아비로 맴돌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궈보슝와 쉬처이허우가 매관 매직을 통하여 군부 내에 세력을 키우고 후진타오를 철저하게 배제시킨 까닭에, 후진타오 집권시절에 생긴 말이 정령불출 중남해(政令不出中南海, 정책이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 밖으로는 전해지지 않는다.)이었다. 당시 후진타오의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일화로 2004년, 상하이 당 서기였던 천량위가 당 중앙의 거시적 조절 통제가 상하이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면서 원자바오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일개 직할시 당 서기가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 위원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하극상이었지만, 정작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원자바오는 총리급인 상무위원인데 부총리급인 정치국원 천량위에 갈굼에 당할 정도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광역시장겸 시도당위원장이 국무총리에게 대드는 꼴이다. 이렇듯 사방이 장쩌민에게 포위당해, 후진타오가 본인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하던 기류는 2006년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 당시 장쩌민이 후진타오의 후임 주석으로 만들려는 목적하에 후계자로 키우고 있었다. 천량위가 후진타오의 후임 주석이 되면 사실상 장쩌민이 도로 정권을 가져오는 것이나 다름없다.]가 부패 혐의로 인해 낙마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후계자 [[리커창]]을 지원하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장쩌민과의 권력암투 끝에 두 사람은 상하이방도 공청단도 아닌 태자당의 [[시진핑]]을 차기 최고지도자로 합의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 모두 속내가 달랐던터라, 후진타오는 리커창, 장쩌민은 자신의 절친 보이보의 아들 [[보시라이]]를 후계자로 앉힐 생각이었는데, 보시라이가 언론통제로도 덮지 못한 초대형 스캔들로 몰락하면서 후진타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리커창이 최고지도자가 되고 후진타오계가 상무위원회를 장악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던 장쩌민은 후진타오의 심복 링지화 중앙판공청 주임(쉽게 말해 [[대통령비서실장]]) 아들이 페라리를 몰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을 이용, 링지화의 대규모 부정축재를 공론화시켜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회 다수를 장악하려던 후진타오의 계획을 무산시킨 결과, 상무 위원회 7명 중 후진타오계인 공청단은 2명 만이 진출하였고 최고지도자도 리커창이 아닌 [[시진핑]]으로 확정되었다.[* 대신 공청단을 군의 요직에 많이 진출시켰다. 대외적인 군사 경쟁과 충돌이 심화되어 군의 위상이 올라갈 것임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이에 후진타오는 시진핑에게 국가 주석과 중앙 군사위 주석을 한 번에 넘겨주어 상왕정치를 하지 않는 대신, 장쩌민도 함께 은퇴시킬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 소위 동귀어진 작전. 그리고 이 판단은 결과적으로는 늑대를 쫓아내자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 되었다. 시진핑은 장쩌민의 영향력이 쉽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취임하자마자 당과 군의 장쩌민 측근들은 물론 아들까지 부정부패 혐의로 처벌하며 장쩌민을 순식간에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청단도 숙청과 좌천을 당했고 후진타오 본인조차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갑자기 자리에서 퇴장당하는 치욕을 받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