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진타오 (문단 편집) === 경제 성장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인권 문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ne_bry.jpg|width=100%]]}}} || ||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의 후진타오''' || 재임 10년(2002-2012)간 중국의 경제규모가 네 배 이상 성장했다. (2002년 1.4조달러, 2012 8.5조 달러) [[대침체]]에도 끄떡 없었지만 그만큼 [[거품경제]]의 정도가 심해 [[부동산]]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았고 보다 심각해진 [[양극화]]와 계층 갈등도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구체적인 중국 경제의 문제점은 [[중국/경제/부정적 전망]]을 참조. 인구 성장은 10년간 1억(12억 → 13억)으로 성장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그만큼 눈앞에 다가온 [[고령화사회]]도 중국의 가장 큰 문제로 떠올랐다. 중국의 [[계획생육정책]]은 군사정권 시대 한국보다도 더한 수준으로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소득은 겨우 중진국 수준에 불과한 반면, 빠르게 [[동아시아]]의 선진국인 한국, 일본, 대만 수준의 초저출산, 초고령화 사회가 닥쳐온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후진타오의 시대에 중국인 평균 수명은 73세까지 올라갔다. 특히 [[상하이]]나 [[선전(도시)|선전]] 같은 경우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중국 내에서는 이런 빠른 경제 성장에 정신없이 달려가는 신세대들이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 세대보다 더 약한 정치 의식을 가지게 됐다. 이른바 '80后(빠링허우)' 세대. 중국판 [[88만원 세대]]로 그만큼 현실지상주의의 성향도 강해졌다고 한다. 약간 한국과 10년, 미국과 20년 간격을 띄고 [[X세대]]같은 느낌도 난다. 또한 이 시기부터 [[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으며 [[쓰촨성 대지진]] 같은 악재도 있었다. 물론 [[원자바오]] 같은 인물이 수습을 했다. 후진타오 시대 경제의 성장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경제 자유화의 혜택을 누렸지만, 당시 '''1억 5,000만명'''이 최저 임금제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하루에 1,000원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다만 마오쩌둥 시대 [[문화대혁명]] 직후에는 중국의 1인당 소득이 인도보다도 더 낮았지만 후진타오 시대에 이르러 1인당 소득이 인도보다 4배 이상으로 뛰어올랐다. 여러모로 빈부격차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성장과 분배를 모두 잡기는 힘들다는 것을 감안하고 본다면 비판을 받더라도 경제적으로 무능하지는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후진타오 시기,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25만에서 30만명에 이르는 중국인이 판결도 받지 못하고 노동 재활 캠프에 감금되었고 범죄 판결 중 목격자를 확보한 경우가 5% 미만이며, 유죄 판결 비율이 '''99.7%'''에 육박했다. 정부는 우편물을 검열할 수 있으며, 전화, 팩스, e메일과 텍스트 메시지를 검사할 수 있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이면도 빼놓을 수 없다. 대규모의 올림픽 경기장을 건설하고 못사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공안까지 동원하여 베이징 내 빈곤층을 주거지에서 끌어내리는 강제 이주 조치가 있었다.[* 다만 이것은 중국보다 규모가 작기는 했지만 [[1988 서울 올림픽]] 당시에 대한민국에서도 벌어졌던 사회 모습이기도 하다. 강제 이주가 가장 많았던 올림픽 1순위가 2008 베이징 올림픽이며 그 뒤가 1988 서울 올림픽으로 기록된다.] 후임 시진핑과 비교를 한다면 인권문제에 있어서 후진타오는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는 편이나 이것은 시진핑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며 후진타오의 행태 역시도 서방의 기준에선 정상적인 국가 지도자의 모습으로 보기 어렵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