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쿠이현 (문단 편집) == 역사 == 1만 5천년 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사카이시(후쿠이)|사카이시]] [[미쿠니초]](三国町)나 [[에이헤지초]](永平寺町)에서 구석기가 발견됐다.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의 유적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직선 거리로 가까운 [[기후현]] 북부나 서남쪽 교토 등과 같이 수혈식주거(竪穴式住居, 움집) 유적이 있다. 일본이 [[천황|천황제]]와 [[율령제]]를 정비하는 등 고대 국가로 발돋움할 때 [[와카사]](若狭)로 명명됐다가 얼마 후인 7세기 말 [[에치젠]](越前)[* 와카사노구니는 남쪽에 위치해 있어 레이난, 에치젠노구니는 레이호쿠 지방이라 불렸다.]으로 개칭됐다. 제염 산업을 일궈 수도인 [[교토]]에 [[소금]]을 댔다고 한다. 풍부한 어획량의 동해를 두고 우리와 마주보고 있으며, 후쿠이 평야가 넓고 비옥해 당시부터 [[일본 황실]]의 각종 물품을 대는 공납 기지였다고. 8~9세기에 [[발해]] 사신이 오가는 등 한반도와 교류가 깊었다고 한다. [[남북조 시대]]나 [[전국시대(일본)|전국 시대]] 등 몇 백년에 걸쳐 [[일본 황실]]이 권위를 잃으면서 후쿠이현도 쇠퇴를 겪었다. 예를 들어 역모에 실패하고 낙향한 전 에미다이진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숨어 지내는 등 주로 이런 저런 이유로 [[교토]]에서 쫓겨난 자들이 유배를 오거나 숨어 사는 지역이 됐다. 후일 [[무로마치 막부]] 마지막 [[쇼군]]에 오르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혼노사의 그 사람, [[아케치 미츠히데]]가 [[미요시 3인중|미요시 집안]]에 쫓겨 에치젠에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 전국 시대 너머 [[에도 막부]] 전반기까지도 일본 주류 역사에서는 비켜나 있는 지역이었다. 13세기인 [[가마쿠라 시대]]에는 시마즈 씨, 고토 씨 등이 후쿠이현 서부인 에치젠의 수호직(도지사)을 맡았고 [[오다 노부나가]]의 조상들도 저 시대까진 후쿠이 현에 있었다고. 14세기에는 [[무로마치 막부]]가 후쿠이현 동부인 와카사에 다케다 씨[* [[다케다 신겐]]으로 유명한 가이 다케다 가문과는 친척인 아키 다케다 가문이다.]를 수호직으로 앉히면서, 물론 우연이겠지만 훗날 [[센고쿠 시대]] 내로라하는 가문들의 조상이 모두 여기를 거쳐간다. [[일본 황실]]은 전국에서 조운(바닷길)을 통해 공납을 받으면서 후쿠이현의 사카이 항구를 기지로 삼는다. 이후 각지 공물들이 거쳐가는 중간 기지로서 조선 산업이 발달하는 등 산업적으로 번성했다. 15세기 [[오닌의 난]]으로 일본이 생지옥이 될 즈음, [[무로마치 막부]]가 보낸 지방관인 [[시바(아시카가)|시바]] 가문과 시바 가문의 대리로서 에치젠을 통치한 가이 가문과 아사쿠라 가문이 서로 극한의 국지전을 벌이며 에치젠의 패권을 다투었고, 결국 아사쿠라 다카카게가 [[오닌의 난]] 도중 주군의 적과 손잡고 하극상을 하면서 시바, 가이 가문을 모두 쳐내고 에치젠의 패자가 된다. [[잇코잇키]] 등 신앙심을 빙자해 민란이 끊이지 않았긴 했지만, 아사쿠라 집안은 중부 일본을 집어삼킬 기세였던 [[오다 노부나가]]를 상당 시간 발목잡을 정도로 그 세력을 자랑하던 집안이었다.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는 오다 가문의 필두 가로 [[시바타 가츠이에]]가 기타노쇼에 새 성을 짓고 북일본을 노렸다가 시바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떨려난 이후에는 에치젠이 [[니와 나가히데]]에게 넘어갔다. 이후 히데요시의 사촌인 아오키 가즈노리에게 넘어가기도 하는 등 당시에도 후쿠이 지방은 최측근에게만 내려주는 땅으로서 그 생산력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었다. 1598년 도요토미의 토지 정리에 따르면 와카사 에치젠 모두 합해 무려 77만 석 크기의 대형 번이었다. 이후 도쿠가와 마쓰다이라 집안의 [[에도 막부]]가 개창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초대 쇼군]]의 서장자인 [[유키 히데야스]]가 들어온다. 장남은 노부나가 손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서자였던 유키 히데야스가 사실상 장남이었다. 이에야스의 장손주이자 히데야스의 큰아들 마쓰다이라 다다나오가 상속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세키가하라]]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하려다 규슈로 유배되고 동생 다다마사가 다시 대를 잇는다. 에도 막부는 이후 에치젠을 후쿠이 번, 오바마 번, 오노 번, 마루오카 번, 스루가 번, 사바에 번 등 작은 번으로 쪼개 정치적 역량을 축소시키려고 했다. 그 중 그나마 가장 세력이 컸던 번이 기타노쇼가 있던 후쿠이 번으로, 현재 현의 이름은 이것을 딴 것이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세 일본의 물류 거점으로, 특히 기타마에부네(北前船)란 이름의 해운 조직이 활동했다고. [[홋카이도]]와 [[규슈]]를 잇는 해운 물류 회사로서 동해뿐만 아니라 내륙 호수인 [[비와호]]의 수운까지 담당하는 조직이었다고 한다. [[메이지 유신]] 즈음 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슌가쿠]] 대에 이르러 후쿠이 번은 그 세력을 떨쳤다. 근대 산업을 일으키고 서양식 포대를 해안에 설치하는 등 번정 개혁에 성공했다. 슌가쿠는 당시 일본 4대 명 정치가[* 막부말기 4현후(四賢侯): 에치젠의 슌가쿠, 사츠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나리아키라]], 우와지마의 무네나리, 토사의 요도를 말한다.]로서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고. 1863년에는 후쿠이번의 사무라이 군대를 이끌고 상경할 계획까지도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슌가쿠는 [[보신전쟁]] 당시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세력과 신정부군 사이의 중재역을 자청했으며, 메이지 신정부에서도 직책을 맡았으나 곧 삿쵸 번벌에 대한 항의로 사임했다. 1871년 [[폐번치현]] 당시 7개 현으로 쪼개졌던 것이 곧 쓰루가현으로 통합됐고 [[1876년]] 동부는 [[이시카와현]]으로 서부는 [[시가현]]으로 분할편입됐다가 1881년 다시 후쿠이현으로 독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