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폐제(유송) (문단 편집) === 소도성에 대한 위협 === 이 일로 계양왕(桂陽王) [[유휴범]]이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유휴범은 폭군 유욱의 정통성을 명분으로 삼은 게 아니었다. 유휴범은 무능한 주제에 자신이 유일하게 남은 숙부라면서 재상으로 임명해달라고 유욱을 꼬셨으나 말을 듣지 않자 앙심을 품고 난을 일으킨 것이었다. 물론 송서가 남제 때 편찬되었기에 이 일화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우위 장군 [[소도성]]은 거짓 투항으로 유휴범을 안심시킨 뒤 그를 살해함으로써 난을 평정했다. 이어 원휘 4년에 유욱의 폭정을 보다 못한 24세 건평 난왕(建平赧王) [[유경소]]의 난도 소도성이 평정했다. 유경소가 옹립된 이유는 단 2가지였는데, 장성했으며 정신도 멀쩡했기 때문으로 '''더 이상의 조건은 필요 없었다'''. 이렇게 소도성은 잇따른 반란들을 진압하면서 점점 명성을 높이고 친위군의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렇듯 소도성이 유휴범, 유경소의 반란을 평정한 것이 되려 소도성이 찬위의 뜻이 있었다고 보는 강력한 증거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유송 왕조에 충성심이 남아있던 신하들은 대부분 유경소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대(소도성)에게는 아무리 황제라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게 정상이지만 [[싸이코패스|유욱은 그 정도의 개념조차 갖추지 못했다]]. 그는 소도성을 질투하여 나무로 소도성을 조각하고 조각상을 과녁 삼아 시종들과 함께 활을 쏘았으며, 심지어는 한여름 더운 낮에 낮잠을 자고 있는 소도성의 막사에 몰래 들어가 윗통을 벗은 뚱뚱한 소도성의 배에 그가 자는 동안 과녁을 그려놓고는 활로 쏘아 즉사시키려고 한 적도 있었다. 놀란 주변 내관들이 "이렇게 좋은 과녁을 한번만 쓰고 버리시렵니까?"라고 간언한 덕에 진짜 화살로 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화살촉이 없는 화살로 소도성의 배를 쏘면서 자신의 활 솜씨를 자랑했다. [[잠자는 사자|그러나 이것은 유욱의 파멸을 초래한 최악의 선택이었다]]. 자기가 황제이고 소도성은 그저 장군이라는 사실 때문에 유욱은 소도성을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소도성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유욱을 죽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유욱의 밑에 이대로 있다가는 본인도 언젠가 죽게 될거라는 생각에 소도성은 월기교위 왕경칙(王敬則)과 힘을 합쳐 양옥부(楊玉夫), 양만년 등 유욱의 심복 10여 명과 비밀리에 손을 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