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폐제(유송) (문단 편집) === 최후 === 7월 7일 [[칠석]]날 밤, 유욱은 변복을 하고 절간에 가서 [[개]]를 훔쳐 삶아 [[술]]과 함께 먹고, 궁궐에 돌아온 뒤 양옥부에게 "너는 오늘 밤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는 것을 보면 당장 보고하라. 하지만 보고하지 못하면 내일 죽으리라"는 으름장을 놓고 잠들었다. 하지만 양옥부는 사전에 소도성에게서 지시를 받은터라 유욱이 깊이 잠들자 유욱이 아끼던 수제 살인 도구를 꺼내들고는 그의 목을 베었다. 살해당할 때의 나이는 오늘날로 치면 '''중학교 2학년'''밖에 안되는 고작 '''만 14세'''였다. 유욱을 [[암살]]하고 양옥부는 그 머리를 왕경칙에게 바쳤다. 왕경칙은 유욱의 머리를 가지고 소도성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소도성은 유욱이 이렇게 죽을 거라는 것을 예상 못한 터라 처음에는 놀란 나머지 믿지 않았으나, 후폐제의 머리를 연못에 씻고 확인하니 과연 맞았다. 이에 소도성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황궁을 점령한 다음 정권을 장악했다. 왕경칙은 유욱의 죽음에 기뻐하며 소도성에게 바로 황제에 즉위하라고 했다. 그러나 무관이라도 유학자 뇌차종(雷次宗)에게서 학문을 어느 정도 배운 소도성은 [[선양]]이라는 미덕을 알고 있어서 일단 선양의 선배들[* [[왕망]], [[조비]], [[사마염]], [[환현]], [[유유]].]처럼 바로 황제가 되지 않았다. 소도성은 진태후를 [[협박]]해 폐제 유욱을 창오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정변을 정의를 위한 정당한 반란으로 인정하게 했다. 유욱은 죽은 뒤 단양 말릉현 남교단 서쪽에 안장되었다. 당연히 그가 죽자 슬퍼해주는 백성들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많은 백성들이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유욱 외에 후대에 [[고려]]에 있었던 폭군 [[충혜왕]]의 죽음 때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