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폐제(유송) (문단 편집) == 평가 == >사신은 말한다. 나라를 잃은 군주는 비록 마지막에 같은 길을 걷더라도 출발은 어떠면 달랐을 것이다. [[전폐제(유송)|전폐제(前廢帝)]]는 천박하게 노늴었고 호사스러웠으며, 전령을 내려서 길을 열었다. 창오왕(蒼梧王)은 옥새를 숨겼고 노닐고 돌아가는 것을 잊었으며,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했고 홀로 말을 타고 먼 곳으로 떠났다. 목숨을 잃고 제위가 엎어지는 것에 대해서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희하(姬夏)의 융성과 비교하면 자질과 문덕이 오히려 달랐으니 망국의 도리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 >― 《[[송서]]》의 <후폐제 본기> 사론 사실 악행의 양과 규모로만 따지면 유욱을 능가하는 폭군들과 독재자들은 많지만, 대부분은 폭정 속에서도 명분이나 목적 의식을 가졌거나 조금의 업적이라도 남겼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다못해 자국 인구를 절반으로 줄인 [[라나발로나 1세]]조차 명분을 전혀 대지 않고 묻지마 학살을 한 것은 아니며,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 [[백두혈통|김씨 3대]], [[마오쩌둥]], [[폴 포트]]조차 그 명분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이었을 뿐 어쨌든 학살의 명분을 대긴 했다.] 이에 반해, 후폐제는 재위 기간 내내 무고한 백성들을 '''[[쾌락살인]]'''하기만 했을 뿐 그 외에는 어떠한 치적도 남기지 않았고, 그 악행의 질 역시 몹시 잔혹하였으며, 당연히 인류 역사상 이렇게 아무런 명분 없이 쾌락살인 자체만이 목적이었던 국가지도자는 후폐제가 유일무이하다. 창작물에서도 [[천룡인|디스토피아물의 최종 보스 집단의 지배자]]들 정도가 저지를 만한 악행을 저지른 셈인데, 심지어 이런 악행도 중학생 정도밖에 안 되는 나이에 한 일이니 이 황제가 성인이 되어 오래 집권했다면 그 살인의 질과 규모가 훨씬 커졌을 것이다. 후폐제가 어린 나이에 살해당했음에도 동정여론은 커녕 큰 비난만 받는 이유도 이러한 질적인 악행의 심각성에 있다. 가히 같은 유송의 [[유자업]]과 [[제(남조)|남제]]의 [[소보권]], 머나먼 후대 사람인 [[아이티]]의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적도 기니]]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우간다]]의 [[이디 아민]]과 함께 정신이상자가 국가원수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산 증인인 셈이다. 가뜩이나 건국 당시부터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았던 유송에 더더욱 피냄새를 짙게 만든 원흉인데, 유욱 이전의 황제들이 실로 여러 가지 방향성에서 그 악랄함과 미친 짓으로 후세인과 당대 정상인들의 치를 떨게 만들었지만 유욱처럼 살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고 유욱만큼의 잔혹성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상술한 유자업과 소보권, 응게마 같은 유욱과 비견되는 자들조차 누군가를 사랑할 최소한의 정신은 있었다. 물론 그 사랑도 제정신은 아니긴 했으나, 유자업은 고모인 신채공주를, 소보권은 반숙비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으로 여겨지며, 응게마도 3번 결혼하는 와중에도 2명의 내연녀를 사귀는 등 불륜을 일삼았으나, 이를 역으로 보면 응게마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최소한의 애정은 있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유욱은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애정 따위는 일절 없었고 최소한의 명분조차 없이 단지 불특정 다수를 죽이고자 하는 욕망만이 남은 희대의 [[사이코패스]]였을 뿐이다. 후세에 살던 사람들은 당연히 유욱의 행동에 치를 떨었으며, 심지어 어느 사관은 소도성이 제위를 찬탈하고 황족이었던 유씨를 멸족한 것에 대하여 "'''유욱 때문에 유씨가 황제 행세할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며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리고 유송을 멸망시킨 남제에서조차 건평왕 유경소, 중서령(尚書令) 원찬(袁粲), 상서 유병, 형주자사(荊州刺史) 심유지(沈攸之)를 신원하고 예로서 그들을 다시 안장했다.[* 그 가운데 유경소는 심지어 '''남제 건국자 소도성이 직접 죽인 사람이다.''' 원찬, 유병도 유욱이 죽인 게 아니라, 소도성이 황제가 되려는 것을 막다가 소도성에게 죽었다. 이 신원 회복은 정치적 목적에서의 민심 수습책이기도 했지만, 유송이 망해야 할 나라이기는 했어도 황제들이 문제였지 유경소는 잘못 없고 정당한 황제였다고 유송을 멸망시킨 장본인이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네티즌들은 유경소에게 효난황제(孝[[난왕|赧]]皇帝)라는 사시를 올렸다. 참고로 제왕의 시호란 효O황제라고 붙이는게 기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