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한민 (문단 편집) === [[국민혁명]] 시기 === 1925년 쑨원이 [[돤치루이]]의 초청을 받고 북상하자 대원수 대리로써 광저우 정부의 정무를 보았으나 쑨원 사후 1925년 7월 대원수부가 해체되고 국민정부가 수립되면서 왕징웨이에게 정부 주석 자리를 주었다. 1920년대 초반에 맑시즘을 연구하여 이를 일부 차용했으나 계급투쟁에는 반대하여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1923년부터 [[국공합작]]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자 일단 동의하여 [[1차 국공합작]]과 국민당 개조에 참여했다. 1925년 쑨원의 북상 이후 천중밍이 다시 광저우를 침범하려 하자 [[국민당의 1차 동정]]의 총책임자를 맡았다. 이후 [[전계군벌]] [[양시민]], [[계계군벌]] 유전환 등이 중앙에 대해 반기를 들자 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발표하여 복종을 요구했으나 이들이 도리어 [[1925년 객군 반란|반란]]을 일으키자 [[장제스]], [[쉬충즈]]로 하여금 이들을 토벌하게 했다. 1925년 3월, 북상했던 쑨원의 건강 상태가 돌이킬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국민정부를 과두정으로 개편할 것을 검토했으나 공산당에게 국민정부가 장악될 것을 염려하여 일단 유보했다. 3월 20일 쑨원이 죽은 후, 쑨원의 후계자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되었고 [[랴오중카이]], [[왕징웨이]]와 함께 국민당을 영도했다. 국민당 당권파이자 보수파의 우두머리로서 [[국공합작]]에 불만을 품고 지나치게 국민당을 잠식하는 공산당에 대한 조치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하지만 이를 경계한 좌파의 견제로 인하여 자신의 우려대로 한직인 외교부장에 좌천되었다.[* 국민정부를 정식정부로 승인한 국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외교부장은 권한이 거의 없었다. 후한민이 이를 받아들인 것은 이 자리마저 공산당이 차지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25년 8월 20일 국민당 좌파의 거두이자 재정부장인 랴오중카이가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괴한의 총격으로 암살되자]] 국민당을 장악하려는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의 정치적 공세에 밀려 광저우 국민정부에서 숙청당해 소련으로 강제 외유를 떠나기도 했다. 소련 방문 중에 소련의 지도자들을 만나 소련혁명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소련혁명이 중국혁명에 도움이 된다고 발언했으며 중국의 부르주아가 반혁명적이고 국민당 역시 무산계급정당이라는 발언을 하는 등 소련이 국민혁명에게 준 도움과 공산주의 이론의 일부 유용성을 인정했으나 국민당 당헌을 공산주의적으로 개정하라는 공산당원들의 요구를 반박하며 공산당이 혼란을 가중한다고 비판했다. 소련 방문 중 [[중국 국민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통해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연계를 종식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서산회의]]가 소집되어 [[서산회의파|국민당 우파]]들의 반공행동이 표면화되자 [[리다자오]] 등 광저우 중앙으로부터 서산회의에 참여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반공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분파주의 역시 배척했던 후한민은 서산회의에 반대를 표명했다. 1926년 1월, 국민당 2차 전국대표대회 이후 중앙집행위원 겸 공인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중산함 사건]] 소식을 듣고 귀국하려 했으나 보로딘의 연락을 받은 소련이 이를 방해하려 하자 큰 불쾌감을 가지고 4월 19일 광저우를 통해 귀국했다. 귀국 후 소련은 코민테른을 이용하여 중국혁명을 도리어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광저우에 잔류한 국민당 우파들은 후한민을 영수로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이며 장제스에게 국공합작 종식과 보로딘 감시를 요구했으나 국공합작 노선을 지지하고 있던 장제스가 응하지 않으면서 보로딘의 견제를 받게 된 후한민은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