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후한민 (문단 편집) === [[장호합작]]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en.cafa.com.cn/Zhang-Huan-Chiang-Kai-shek-and-Hu-Hanmin-2010-Ash-on-linen-200X250cm.jpg|width=100%]]}}}|| || [[장호합작]] 시절의 [[장제스]]와 후한민 || 1926년 7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의 대권을 잡은 장제스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시작했고 국공갈등이 차차 심화되었다. 1927년 4월, 중산함 사건 이후 프랑스 외유를 떠났다가 돌아온 왕징웨이와 4월 3일 만나 대결정국을 해결하기 위해 논의했으나 1927년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과 결별하고 제2기 중앙집행위원회 제4차 중앙집행위원전체회의 예비회의에서 후한민을 주석으로 추대하면서 손잡을 것을 제의하자 장제스와 손을 잡고 4월 18일 난징 국민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난징정부 출범 이후 중앙정치회의 주석 겸 중국정부위원회 주석로 추대되었다. 이후 보로딘, 천두슈 등 190여명의 공산당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며 청당을 실시했고 청당운동의 통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청당이론을 정립하였다. 후한민은 <청당의 의의>라는 글을 발표하여 청당의 필요성, 당략, 당면과제를 밝히고 선전부장 겸 조직부장 대리 [[우징헝]]과 함께 <청당의 원칙>을 정하여 등택여를 주석으로 하는 중앙청당위원회를 성립시켰다. 이후 공산당 숙청과 선전작업에 주력했다. [[영한합작]]으로 우한과 난징이 통합된 이후,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에서 [[왕징웨이]], [[탄옌카이]], [[차이위안페이]], [[리례쥔]]과 함께 국민정부 상임위원에 선출되었고 1928년 4차 전국대표대회 결과로 입법원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927년 9월 왕징웨이가 후한민에게 합작을 제의했지만 후한민은 아예 왕징웨이를 만나주지 않는 것으로 불신을 표했으며 [[영한합작]] 과정에서도 장제스가 왕징웨이와의 합작을 추구하자 분노하여 항의의 표시로 외유를 떠나기도 했다.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완수되고 중국이 통일되자 장제스는 [[편견회의]]를 통해 군축을 실시하고 정치분회 폐지를 통해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한 후 교육과 경제개발에 투자하려 했는데 불만을 품은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반장전쟁]]이 일어났다. 반장전쟁의 최종국면인 [[중원대전]]에 이르러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바이충시]] 등 주요 군벌들과 [[왕징웨이]]의 [[개조파]], [[쩌우루]], [[셰츠]], [[쥐정]], [[쉬충즈]]의 [[서산회의]]파가 모두 연합하여 베이핑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태원약법을 제정하여 국민정부의 훈정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