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휴경 (문단 편집) === 서유럽 === [[중세시대]] 초기까지 [[유럽]]에서는 농지 전부에 쟁이질을 한 뒤 그 중 1/2에만 농사를 짓고 나머지 땅에는 휴경을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또 농지 전부를 갈아엎은 뒤 전해에 휴경하였던 1/2의 땅에 농사를 지었다. 휴경지가 절반이나 되었지만, 어차피 중세 초기만 해도 유럽에서는 땅의 면적에 비해 농사지을 인구가 부족하고 농지가 남아돌았기 때문에 상당히 쓸만한 방식이었다.[* 땅에 비해 인구가 부족했던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한 귀족의 영지와 다른 귀족의 영지 사이에 숲이나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가 제법 넓게 펼쳐져 있고 각 영지는 고립되어 자급자족을 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샤를마뉴]] 시대인 8세기 후반에 농지를 1/3씩으로 나눠서 한쪽에는 봄에 농사를 짓고(춘경지) 한쪽에는 가을에 농사를 지어서(추경지), 휴경지는 남은 1/3로 줄이는 방식이 개발되었는데, 이를 삼포제(三圃制, three-field system), 혹은 삼포식 농업이라고 한다. 하나의 1/3 경지만 본다면, 첫해 봄농사, 두 번째 해에 가을농사,[* 한 땅에서 같은 해에 봄, 가을 2번의 농사를 짓는 [[2모작]]과는 다르다. 삼포제에서는 첫해 봄농사가 끝나고 다음 해 가을 농사를 시작하기 전까지 1년 가량의 시간 동안 땅이 놀게 된다.] 세 번째 해에는 휴경, 그리고 네 번째 해에는 다시 윤작의 싸이클이 도는 방식이다. 삼포제에서 봄농사 때는 [[귀리]], [[보리]]를 심어 가을에 수확하고, 가을 농사 때는 [[밀]]이나 [[호밀]]을 심어 다음해 여름에 수확하였다. 삼포제는 외세의 침략이 없고 치안이 안정되어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던 지역 중심으로 수 세기에 걸쳐 천천히 도입되었는데,[* 1200년 전후가 되어서야 삼포제가 유럽의 대세 농법이 되었다.] 같은 면적의 땅에서 산출이 기존보다 50%가량 증가했다고 한다.[* 1년에 휴경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짓는 땅이 1/2에서 2/3이 되면 실제 경지 면적은 33%가 증가하는 것이지만, 봄농사에서 콩과 같이 지력 회복에 도움이 되는 작물을 재배했고, 한 작물만 보면 휴경을 2년 한 것과 같기에 총 산출량은 더 많이 증가했다.] 또한 삼포제는 봄과 가을로 농사 시기가 나누어졌기 때문에 한정된 노동력을 1년 내내 효과적으로 분배하여 사용할 수 있었고, 어쩌다가 한 계절의 농사가 잘 안되어도 다음 수확까지 1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반년만 기다리면 되어서 기근에 대한 해결책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봄농사에서 귀리를 재배함에 따라, 유럽에서 땅을 갈기 위해 키우는 가축이 [[소]]에서 [[말(동물)|말]]로 차츰 변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귀리같은 곡물을 재배하는 환경에서는 밭 가는 데 있어서 말이 소보다 더 효율적이다. 같은 면적의 밭을 갈 때 필요한 에너지 양은 말이 소보다 압도적으로 효율적이지만, 풀'''만''' 먹어도 되는 소와는 달리 말에게는 일정량의 곡물도 같이 지급해야 한다 (양질의 건초가 있는 환경이라면 말도 건초만 먹고 힘든 일을 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런데 봄농사에서 재배하는 귀리는 현재도 말의 주요 사료로 쓰일 정도로 말에게 적합한 곡물이어서, 말을 키우기가 좋았다. 뿐만 아니라 삼포제는 이미 황무지 개간을 활발하게 한 뒤에 농지의 산출량을 더 증가시키려는 의도로 도입되었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는 오히려 소에게 줄 막대한 양의 풀을 구할 수 있는 개활지가 부족하였다. 그래서 삼포제를 할 경우에 소보다는 말을 키우는 것이 더 경제적이었다.] 이후 16세기에 초에 [[플랑드르]] 지방에서 개발된 4윤작법(four-field crop rotation)은 4년을 주기로 보리, [[클로버]]와 호밀풀,[*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클로버만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호밀풀(English ryegrass)을 클로버와 섞어서 씨를 뿌려 함께 재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호밀풀은 키가 90cm까지 자랄 수 있는 [[잔디]] 계열의 풀로, 가축의 먹이로 쓰기에 탁월하다.] 밀, [[순무]]를 순서대로 돌려지어 휴경지를 없애는 데 성공하였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77377&cid=40942&categoryId=31870|#]] 4윤작법에서 재배하는 작물 중에서 클로버, 호밀풀과 순무는 양이나 소의 먹이로 사용했다. 비록 4윤작법을 처음 개발한 곳이 현재 벨기에 지역이기는 하지만, 이를 체계화시키고 유럽 전체로 전파한 것은 18세기 영국이었다.[* 영국 노퍽(Norfolk) 지방의 영주였던 찰스 타운센드(Charles Townshend) 경이 처음 영국에 들여와 개량하였기에, 4윤작법을 노퍽 농법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타운센드 경은 영국에서 처음으로 순무를 체계적으로 재배하였기에, '순무 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4윤작법 덕분에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는데, 이는 콩과 식물이라서 지력을 회복시켜주는 클로버를 재배했을 뿐만 아니라, 방목된 가축이 풀을 뜯어먹고 배설물을 남겨서 지력이 크게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농업 생산성의 비약적 향상은 인구 증가를 이끌어서, 영국의 경우 1750년에 550만 명이었던 인구가 1800년에 900만, 1850년에는 1,600만 명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4년 주기에서 절반인 2년 동안 가축의 먹이를 재배했기에 가축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고, 덕분에 유럽의 식탁에서 육류의 비율이 크게 개선되었다. 특히 순무를 저장하였다가 겨울 동안 가축의 사료로 사용하였기에, 예전처럼 가축 먹이를 구할 수 없는 겨울이 오면 대부분의 가축을 도축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일년 내내 가축을 사육하고 고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한편 더 이상 가축을 방목할 공유지가 필요없어지고 키우는 양의 수가 증가하자 [[인클로저 운동]]이 활기를 띄게 되었다. 결국 4윤작법은 18세기 영국의 [[산업 혁명]]을 이끈 동력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후 썩은 식물이나 발효된 배설물로 만든 거름과 녹색식물의 잎과 줄기를 그대로 땅에 묻는 녹비가 등장하였고, [[산업혁명]] 시대에 화학 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는 아예 땅에 이로운 성분을 모아 만든 화학[[비료]]를 땅에 주는 방식이 대중화되어 근현대에 들면서 식량생산량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