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흑역사/목록/농구 (문단 편집) ==== [[안양 KGC인삼공사]] ==== * [[SBS]] 스타즈 시절: 이 시기에는 챔프전에 진출한 적이 없었고 몇몇 시즌을 제외하면 중하위권에 머물렀으며 이런저런 사유로 관중동원도 잘 되지 않았다. 그나마 [[안양실내체육관]]에 자리를 잡은 후에는 꾸준히 중박 이상의 관중몰이는 되었으며 SBS 기업명을 단 마지막 시즌에 [[단테 존스]]의 등장으로 신드롬이 일긴 했지만.[* 이 시기에는 후술한 대로 임시 홈구장 살이를 하면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연고지 이름만 안양일 뿐 실질적으로는 [[집시 롯데|여기]]와 같은 신세였기 때문이다. 관중몰이가 될래야 될 수가 없었던 것.] * 초창기 3시즌: 전술한대로 흥행이 제대로 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 이 시기에는 연고지인 안양에 체육관이 없어서 잠실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과 의정부를 임시 홈구장으로 삼아야 했다. 이 셋방살이는 1999-2000 시즌에 끝나게 된다. * [[안양시|안양]] [[대림대학교]] 체육관: 첫 연고지내 내집 마련이었지만 고작 '''1400명'''의 관중만 수용이 가능했다. ~~구리시 체육관보다는 크다~~ 이로 인해 이 시즌에 기록한 평균 관중수는 '''KBL 역대 최저기록'''이 되었다(...). 이걸 막아보겠다고 플레이오프 기간에는 수용규모를 훨씬 넘기는 무리한 관중동원으로 통로까지 꽉꽉 들어차게 만들어 안전 문제로 언론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 KBL 초유의 몰수경기: 2003년 12월 20일 전주 KCC 이지스와의 홈경기에서 4쿼터 5분여를 남겨놓고 SBS의 외국인 선수 앤서니 글로버에게 테크니컬 파울이 선언된 것에 항의, [[정덕화]] 감독이 선수들을 코트에 내보내지 않아 몰수패를 선언당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정덕화]] 감독이 선언을 했지만 실질적으로 선수단 철수를 주도한 것은 당시 코치였던 [[이상범(농구)|이상범]]. 시즌 종료 후 징계가 완화가 되었지만 이상범이 당시 정덕화보다 징계를 더 무겁게 먹었던 것이 이 때문이었다.] * 2001-02 시즌부터 2004년 3월까지 대구 (동양) 오리온스(현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에게 17연패를 당하였다. 그리고 대구 원정으로 한정할 경우 연패는 2005년 1월 27일까지 이어갔다. * KBL 역대 한 경기 최소득점 기록: 2012년 1월 11일 원주 동부 프로미와의 원정 경기에서 '''41''':52로 패배하며 한경기 양팀 합산 최소득점 신기록까지 깨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챔피언결정전에서는 동부를 상대로 복수에 성공하며 창단 첫 우승을 거뒀다. * [[김일두(농구)|김일두]]의 귀화혼혈 선수 및 비주류 대학 출신 선수([[김시래]]) 비하 발언: 다른 때도 아니고 2012-13 시즌 도중에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한 이 발언 때문에 김일두는 좋았던 이미지가 한 순간에 추락해 버렸다. * 원하준: 2009-10 시즌을 앞두고 실시한 귀화 혼혈 선수 드래프트에서 뽑힌 선수로 미국 이름은 케빈 미첼.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그가 한국에 온 계기였던 어머니가 이미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의욕이 꺾여 있기까지 했었다. 결국 한 시즌만에 미국으로 돌아갔고 박태양과 마찬가지로 5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 KGC는 이로써 10개 구단 중 귀화 혼혈 선수 효과를 가장 못 본 팀이 되었다. 사실 원하준은 대학 졸업 이후로 한 시즌 정도 프로에서 뛰고 농구를 그만두었던 선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