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흠종 (문단 편집) === 황제로서의 삶 === [[송휘종|휘종]]과 현공황후 왕씨의 사이에서 적장자로 1100년에 태어났다. 원래 휘는 단이었고, 1102년 2월에 훤, 다시 같은 해 12월에 환이라고 고쳤다. 이후 대관(大觀) 2년인 1108년에 정왕(定王)으로 봉해지고, 정화(政和) 5년(1115) 15세의 나이에 황태자가 되었다. 따라서 사실 본인이 일찍 요절하거나 정변이 일어나서 황제가 갈리는 것이 아니라면 무난히 다음 황제 자리가 보장된 상태였다. 그러나 아버지 휘종이 국정을 운영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고 그림을 그리거나 서예를 하는 데에만 몰두하면서[* 물론 그 분야에 능통하긴 하여, 아주 세련된 수금체(瘦金體)라 불리는 새로운 서체도 개발했다. 실제로 훗날 학자들은 그의 한자 서체가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한지 마치 아주 가늘게 뽑은 금사와도 같다고 찬사를 보냈을 정도로 예술적인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내시 동관이나 재상 채경 등에게 정사를 맡기고 황실과 국가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해왔다. 신종, 철종 시기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재정[* 신종의 모후이자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후 고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신법을 반대했지만 본인 스스로가 사치를 피하고 검소한 데다 사사로운 일을 줄이고 국고에서 헛된 지출이 나가지 않도록 아들 신종과 손자 철종을 교육시킨 걸로도 유명하다.]이 안정화되었지만 그의 대에 들어 완전히 파탄나버린 상황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휘종은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 사이에서 저울질하다가 금나라 군대가 개봉으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금군을 소집하여 이 사태의 책임을 진다면서 퇴위 선언을 하고 양위한 다음 채경, 동관 등을 대동한 채 안전한 남쪽으로 몽진해버렸다. 갑자기 즉위하게 된 흠종은 어떻게든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이강을 등용하여 금나라 군대를 막게 하고, 그 사이 뒤에서 협상을 통해서 배상금 지불, 영토 할양 등의 조건[* 당시 금군을 지휘하던 장수 완안종한은 태원, 하간, 중산 3진의 할양과 황금 1천만 정(錠), 은 2천만 정, 비단 1천만 필을 바치라고 강요했다. 흠종은 그 가혹한 조건을 모두 받아들여 24명의 관원들에게 명해 금군을 도와 황실의 내외척 및 관리들의 집, 심지어는 승려들이 있는 사찰과 도관까지 샅샅이 뒤져,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와 진귀한 골동품들을 거둬들이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금나라에 바쳤을 뿐만 아니라 전국 주와 군의 지도들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을 제시하여 간신히 강화를 맺을 수 있었다. 이후 몽진한 아버지를 다시 수도로 모셔왔다.[* 휘종이 강남으로 몽진한 이유는 화북이 함락되고 흠종이 죽으면 다시 강남에서 황제를 하려는 속셈도 있었다고 한다. 이걸 눈치챈 흠종이 휘종을 다시 개봉부로 모신 것이었다.] 또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물어 채경, 채유, 동관, 양사성 등을 유배를 보내거나 처형했다. 하지만 금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주전파 대소신료들이 나서서 강화를 반대하고 나섰고, 경험도 많지 않고 국제 정세 파악 등이 미숙한 젊은 흠종은 그런 의견에 넘어가 버리면서 강화조약을 깨트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