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흠종 (문단 편집) == 평가 및 이모저모 == >흠종은 동궁에 있을 때 덕망을 잃지 않았다. 그가 제위에 오를 때 자신이 좋아했던 음악에도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 정강(靖康) 초년에는 정치를 펼쳐 능히 왕보(王黼)와 주면(朱勔) 등의 죄를 다스려 유배하고 주살할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금나라는 흠종이 양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장차 전쟁을 멈추고 북쪽으로 돌아갈 뜻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혼란스러운 국면이 이미 형성되어 손을 쓸 수가 없었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관망하며 또한 능히 힘을 합쳐 협력하지 못하여 재난을 헤쳐나가기 어려웠으며, 안절부절못하며 금나라와 강화할 겨를이 없었다. 끝내 부자가 적의 손에 떨어지고 사직에는 잡초가 우거지기에 이르렀다. 흠종은 여기에 이르렀는데도 또한 유순하고 나약하여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하였도다! 재위한 기간은 짧지만 재난이 매우 휘몰아쳐왔으니 흠종이 재난을 당한 유래를 생각한다면 진실로 슬프도다! 진실로 슬프도다! >---- >[[송사]] 흠종은 아버지 휘종과 비교하자면 여색을 비교적 덜 밝히는 편이었고[* 다만 아버지 휘종처럼 후궁만 100명을 두진 않았지만 흠종도 황후 주씨를 포함해서 총 12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금나라 압송 이후에도 자녀를 얻었다.] 사치와 향락을 부리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실책으로 인해 망국의 군주가 되었지, 평화로운 치세에 군주가 되었으면 여느 군주들처럼 평범하게 나라를 다스렸을 것이다. 그러나 가진 재능이 평범해서 혼란에 처한 나라를 구하지 못하고 결국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과가 아주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 금태종의 말처럼 강화조약을 유지했으면 적국으로 끌려가서 모욕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본인 역시 온전히 면책을 받기에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평가에서도 결국은 흠종이 판단 잘못 내린 것을 비판하고 있다.] 휘종이 금나라에서 묻혔던 묘는 북한의 [[고령진역]] 근처에 있고 흠종의 묘는 [[두만강]] 건너에 위치한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에서는 오국성의 위치를 함경도가 아니라 [[헤이룽장성]] 의란현으로 보고 있다. 일본 만화 [[슈토헬]]에서는 금나라 장군 지르구스의 회상 속에서 등장하는데 흔히 알려진 것처럼 빈곤하거나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지는 않았던 것으로 묘사된다.[* 애초에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 자체가 정충악비의 원작인 설악전전에 나온 설정이다.] 흠종은 오국성에 감금되어 있지만 진귀한 송나라 황실 물품들을 가지고 생활하는데다가 여진 귀족 소년이었던 지르구스가 말벗을 해주고 있다. 흠종은 이 소년의 스승 역할을 하며 지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억류된 흠종의 가치는 떨어지게 되고 결국 금 조정의 명령을 받은 지르구스에게 살해당한다. 악비가 주인공인 드라마 [[정충악비]]에서도 나오는데 훗날 송고종이 되는 동생 조구를 이유도 없이 구박하는 형으로 나온다. 같은 멸망군주인 [[위(삼국시대)|위나라]]의 [[조환|원제]]와 이름이 같다. 다만 한자는 다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