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흥남시 (문단 편집) === 전쟁 당시 === 이후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지휘한 제1극동전선군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도 흥남 때문에 함흥이 한반도 북부의 중심지인 줄 잘못 알고 함흥에 군정 사령부를 설치할 것을 명령했으나 휘하의 25군 사령관이자 이후 [[소련군정]] 장관을 맡은 부하 [[이반 치스차코프]]의 설득으로 계획을 취소했을 정도. 당시의 [[평양시|평양]]은 서비스업과 상업이 발달한 소비도시였다. 그러나 [[1950년]]에 벌어진 [[6.25 전쟁]]으로 인해 미군은 7월부터 8월까지 흥남을 철저하게 공중 폭격했고, 흥남의 공업 시설은 완전하게 파괴가 된다. 1950년 12월에는 유엔군이 실시한 [[흥남 철수작전]]도 특기할 만한데, 이 작전을 통해 10만여 피난민이 남쪽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 중에 그나마 남아있던 흥남 부두 역시 다 폭파되고 만다. [[파일:external/cwbpds.imbc.com/18_4.jpg]] 전쟁 당시 폐허가 된 흥남의 모습. 1952년에 [[함주군]] 운남면 창흥리(昌興里), 룡연리(龍淵里), 룡성리(龍城里), 신성리(新成里), 수동리(水東里), 상수리(上水里)가 편입되었고, [[군면리 대폐합]]으로 수서리·송흥리·완풍리·신덕리를 병합하여 덕풍리(德豊里)를, 풍부리·송호리·동변리·송동리·상부리를 병합하여 풍동리(豊東里)를, 호남리와 축전리를 병합하여 호전리(湖田里)를 각각 신설하였으며, 능경리·동상리·쌍도리·대농리·운동리·릉서리·마전리를 [[락원군|퇴조군(退潮郡, 현 락원군)]]으로 이관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