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흥부전 (문단 편집) == 흥보만보록의 내용 == 전체적인 줄거리는 비슷하며, 기존의 통설을 뒤엎은 내용 및 추가된 내용을 주로 정리했다. * 흥부와 놀부는 [[별명]]이 아닌 [[본명]]이고, 성은 덕수 장씨다. 출생은 평양 서촌이며, 그들의 아버지의 성명은 장천이다.[* 기존의 흥부전에서는 형제의 성이 [[연씨]] 혹은 [[박씨]]로 알려져 있다.] *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흥부와 놀부는 비교적 잘 사는 부잣집의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 흥부는 친부모 봉양을 위해 고향집으로 돌아가려 하며 형인 놀부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놀부는 자신은 처갓집 덕분에 잘먹고 잘살게 되었는데 왜 친부모의 봉양을 해야하느냐며 처갓집에 계속 거주하면서 처와 장인 장모에 대한 봉양만 정성들여 했고, 이 때부터 둘 사이의 빈부격차가 커졌다. * 이후 제비 다리 사건은 기존 내용과 같다. * 흥부는 훗날 무과에 급제해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덕수 장씨의 시조는 [[고려]] 말 [[충렬왕]] 시대에 살았던 위구르 출신인 장순룡으로 알려져 있어, 흥보만보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다만 같은 성씨라도 계파가 나뉘어 각 계파마다 시조가 있는 경우도 있다.[* 흔히 파시조라고 한다.] 흥부전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왕조때보다는 오히려 고려 왕조 시기일 가능성도 있다. 평민 집안의 남자가 부잣집 딸의 사위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보아 신분을 넘어 남녀간의 연애가 비교적 자유로웠던 고려 시대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점, 장남인 놀부가 흥부에게 부모에 대한 모든 것을 떠넘기고 장남으로서 지녀야 할 [[패륜|부모에 대한 효를 놓아버리는]] 다소 유연한 사고를 지닌 모습이 엄격한 조선 유교 사회의 사상과는 차이가 있는 점, 자식을 여럿 낳을 동안 계속 처갓집에 붙어 내내 거주하는 점으로 보아, 사위가 1년 ~ 3년의 짧은 데릴 사위 생활을 하던 조선 시대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 더욱 설득력이 생긴다. 흥부는 고려 시대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 비로소 시행된 무과 시험에 급제 했다고 하면 말이 된다. 농촌 사회는 노동력을 중시하나, 두 아들인 흥부와 놀부가 고향집을 두고도 모두 처갓집에 들어와 살아도 되었다면 그들의 집안은 농사를 짓지않는 가내 수공업이나 상업으로 살아갔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도 고려 후기엔 민간 수공업이나 상업이 번창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담겨있으나, 스토리 중간에 여전히 제비 다리 사건과 같은 판타지가 섞여있다는 것에서 단순히 권선징악의 내용을 담은 민담이라기보단 덕수 장씨의 후손이 자신들의 시조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기 위해 실제 이야기에서 과장 조금 보태서 퍼뜨린듯한 신화적 성격이 강하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선조를 드높이는 신화는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의 이야기와 같은 탄생 설화 등이 있다. 흥보만보록의 내용을 알고 육각수의 노래인 [[흥보가 기가 막혀]]를 들어보면 흥부가 부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집에 가지않고 방황하는 [[패륜]]의 모습을 보여준다 [[카더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