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흥선대원군/생애 (문단 편집) == 생애 초 · 중반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f0043889_4f9e9681869af.jpg|width=100%]]}}} || || {{{#ffd800 '''와룡관과 학창의를 착용한 대원군'''}}}[*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1114990100&pageNo=1_1_1_1|다른 여러 복장으로 그려진 그림목록.]]] || 1821년([[순조]] 21) 1월[* 음력 경진년(순조 20년) 12월.]에 [[한성부]]에서 [[정조(조선)|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가족)|양자]] [[남연군]]의 4남으로 태어났다. 소년기 흥선군은 이름난 수재였다. 흥선군의 재주를 알아본 아버지 남연군이 족보 상 이종사촌인[* 양할아버지 [[은신군]]의 부인이 [[남양 홍씨]]로 홍대현의 딸이다. 참고로 홍대현은 홍대용의 사촌. 그의 제부(여동생의 남편)가 김노경으로, 김노경의 동생 김노영의 아들 김정희를 양자로 삼으면서 남연군과 이종사촌이 된다. 그리고 김정희와 흥선군이 5촌인 것은 [[남양 홍씨]] 집안 기준이며 김정희의 양증조모가 [[영조]]의 딸 [[화순옹주]]이기 때문에, 전주 이씨 집안 기준으로는 족보 상 [[영조]]의 고손자인 흥선군과 8촌 형제이다.] [[김정희]]에게 아들의 교육을 맡겼고, 흥선군은 그에게서 [[난초]] 치는 법과 [[서예]], 그림, 글씨 등을 두루 배웠다. 그러나 어머니와 맏형, 아버지가 잇따라 사망하면서 고아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유일하게 산 형 [[흥인군|흥인군 이최응]]은 머리가 나빴기에 무시하고 경멸했다. 1834년(순조 34) 흥선정(정3품 당하관)의 작위를 받고 흥선도정(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에, 흥선군[* 군호는 [[여주시]]의 옛 지명인 흥양부(興陽府)에서 유래한 것. 왕자군이 아닌 종친군은 보통 생모의 관향을 군호로 삼는다. 흥선군의 모친은 [[여흥 민씨]]였다.]으로 승진한다. 그밖에 종친부 유사당상, 비변사 당상, 오위도총부 도총관, 천장도감 대존관, 도총관 등을 지냈다. 3품 이상의 고위직으로 붉은 관복을 입는 엄연한 재상직이지만, 실제로는 왕실 종친들의 명단을 정리하거나 왕실의 장례 과정을 관리하는 정도의 한직이었다. 하지만 [[세조(조선)|세조]] 때의 영의정인 [[구성군]] 이준 이후로 조선의 종친들은 힘있는 관직에 제수된 적이 없으니 딱히 푸대접 받았다고 취급할 일은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