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흥선대원군/생애 (문단 편집) === 종교 탄압과 양요 === 1864년 흥선대원군은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를 물어 잡아 죽였다. 이 문제는 이후 1890년대 교조 신원 운동으로 동학 세력이 뭉쳐,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반면 '''[[천주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이미 그의 가족 중 아내(부대부인 민씨), 큰딸, 고종의 유모까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훗날 흥선대원군의 손자 [[의친왕]]과 [[영친왕]], 그리고 그 부인들인 [[의친왕비|김덕수]] 여사와 [[이방자]] 여사도 [[세례성사|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일으켰던 [[병인박해]]의 무시무시함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오묘해진다. 집권 이후 한동안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폈고,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 세례명은 요한 세례자. [[병인박해]] 때 [[순교]],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기독교)|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과 직접 만나 향후 대책을 물어보기도 했다. 흥선대원군 본인도 그 당시 국내에 유입되어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사제들을 통하여 꾸준히 서구 세력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서구 열강은 좋은 먹잇감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박해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에 영향을 받은 유림 세력에서 천주교를 탄압하라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다음부터 얘기가 갈린다. 일설에 의하면 대원군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를 끌어들이려고 했고 그 계획에 [[프랑스인]] 선교 사제들을 이용하려 했는데,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흥선대원군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될 생각 없다"고 답하자 유림의 요청을 받아들여 천주교를 쓸어버렸다는 것이다. [[황사영 백서 사건]]에 대한 [[천주교]]의 입장과 비슷하다. 그리고 내용에서는 좀 멀어질 수 있으나, 국제 정세를 이야기하자면 프랑스는 러시아와 가까운 상태였다. 좋아서라기보다는, [[영국]]을 사이에 두고 "[[적의 적은 나의 친구|적군의 적은 아군]]"이라는 식으로 이루어진 것에 가깝지만. 이러한 프레임이 지구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는데, 프랑스와 영국은 서로 [[식민지]] 확보를 위해서 으르렁대고 있었던 시기다. [[그레이트 게임|그런데 이때 러시아를 유난스레 견제한 쪽이 영국이었다.]] 이러한 견제가 계속되어 영국은 [[거문도 사건]]도 일으키게 되고, 나중에 [[영일동맹]]마저도 영국과 일본 양국이 '러시아를 향한 견제와 적대'라는 이해 관계가 맞아지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어쨌거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정치적 입장에서도 괜히 러시아를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도 있다. 안 그래도 [[천주교]]를 배척하던 여론은 흥선대원군에게 선교사들을 잡아들이라고 부추겼고, 때마침 [[청나라]]가 서양 열강에 의해 좌지우지당하고 천주교를 박해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불안감을 느낀 그는 1866년 '''8천여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과 9명의 프랑스인 [[사제]]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때 신자들을 처음에는 '''생매장'''까지 단행하는 등 무작정 처형했다. ([[천주교 대전교구]]의 [[http://www.haemi.or.kr|해미순교성지]]([[충청남도]] [[서산시]])와 [[http://www.hongjushrine.com|홍주성지]]([[홍성군]]) 등에 당시의 생매장 흔적이 남아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천주교]]를 계속 믿겠다면 죽일 것이고, 더 이상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를 택했다. 이 신자들 중 어린아이들도 많았는데, 대원군은 "어린아이들은 죽이지 말라"고 했다. 때문에 [[병인박해]] 이후로 [[고아]]들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 무시무시했던 '''[[병인박해]]'''다. 이 난리 통에 살아난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는 [[베이징시|베이징]]에 주둔하고 있던 로즈 제독의 [[프랑스]] 극동 함대에 연락하는데 프랑스 극동 [[함대]]는 이를 구실로 [[조선]]에 수교를 요구하며 출정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강화성과 [[한성근]]이 지키던 [[문수산성]]을 개발살내고 갑곶진, [[광성보|광성진]]까지 함락하여 사실상 [[강화도]]를 장악한 후에 여유롭게 [[양헌수]]가 지키던 [[정족산성]](삼랑성)을 점거하려 했다가 매복한 조선군의 기습을 받은 뒤에는 사기가 꺾여서 곧바로 다음 날에 조선 정벌을 포기하고 돌아가게 되는데 이를 [[병인양요]]라 한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 [[군인]]이 쓴 일기에는 "조선이 [[베트남]]보다 풍요로운 것 같은데 베트남 말고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을 것"이라고 기재된 내용도 있다. 애초 베트남이 프랑스와 어설픈 접촉을 시도하다가 [[나라]]가 통째로 망한 걸 보면 당시 흥선대원군의 정세 판단은 정확했다고 평할 수 있다. 하지만 적절한 [[근대화]]로 식민지화를 막은 경우도 있는 만큼 이에 대해서는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은 수십 권의 [[책]]과 은괴를 약탈당하고 불타게 되는데 이 때 프랑스군이 가져간 [[의궤]]들은 2011년에야 반환되기 시작한다. 여담이지만 사실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은 [[식민지]]를 확보하려고 할 때 [[선교사]]들을 먼저 들여보내길 즐겨했는데, [[병인박해]] 같은 상황이 연출되면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으로 보면 [[선교사]]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오지[* 당시 서양의 눈으로 보면 조선은 말 그대로 오지다.]로 떠날 때엔 언제라도 신앙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순교]]할 위험에 처하면 이미 각오한 대로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사의 자세라고 볼 수 있는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 [[스테파노]] [[부제(성직자)|부제]]가 왜 그토록 칭송받는지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처럼 도망쳐 군대를 이끌고 오는 짓을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우스운 일이다. 물론 그도 사람이니 두려워 도망쳤다 해도,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조선 정벌을 강하게 주장하기까지 했다. 리델 신부는 나중에 [[주교]]가 되어 [[천주교 서울대교구|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선교 활동을 위해 다시 조선 땅에 들어왔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오래 논의하다가 리델 주교를 죽이지는 않고 조선 밖으로 추방했다. 이후 리델 주교는 다시 조선에 돌아오지 못하고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자세한 것은 [[펠릭스 클레르 리델]] 문서를 참조. 1868년(고종 5년) [[독일]]계 유대인 상인이자 인류학자인 오페르트가 주도한 140여 명[* 이들은 그야말로 다국적이었다. [[독일인]] 야코브 오페르트와 선장 뮐러, [[미국인]] 물주인 --리로이-- 젠킨스, [[길앞잡이]]를 한 [[프랑스인]] 페롱 신부, 조선인 최선일 외 2명, 대부분을 차지한 선원들은 [[중국인]]이었다.]은 조선과의 수교를 위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 시도했다. '조선인은 부모를 특히 각별히 여기니, 남연군의 시신을 들고 인질극을 펼치면 어쩔 수 없겠지'라는 생각이었다. 이건 뭐… 현대인 입장에서 봐도 이건 인륜을 한참 벗어난 짓거리에, 정작 부모의 시신을 뺏긴 아들이 미치도록 분노할 거라는 건 생각도 안 해본, 순도 100% 바보 멍청이 짓이다. 서양에서도 왕족의 무덤을 함부로 건드리면 당연히 끔살이다. 이후 오페르트 일당들의 처벌은, 조선 정부는 오페르트 일행의 만행에 대해 [[청나라]] 예부에 자문을 보내 이 사건을 알리면서 이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의 국가의 영사들에게 통고하는 동시에 사건 해명을 요청했다. 청국 정부의 요청을 받은 [[상하이]] 주재 [[프로이센]] 영사는 사건의 주모자 3인, 즉 오페르트, 페롱 신부, 젠킨스 등은 [[프로이센]] 사람이 아니며, 선주 묄러와 선원들은 전연 음모 사실을 몰랐다는 등의 해명을 했다. 한편 상하이 주재 함부르크 영사는 오페르트의 혐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그를 조사해서 본국 정부에 조회하여 응분의 처분을 하겠다고 해명했다. 이후 오페르트는 본국에서 실형을 받아 감옥살이를 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조난선 구제 문제를 놓고 교섭함으로써 조선과 실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미국]] 측의 총영사 슈워드는 [[베이징]] 주재 미국 대리공사 윌리엄스와 상의한 후 젠킨스를 불법적이고 수치스러운 원정을 준비했다는 등 8개의 범죄 조항을 들어 주 상하이 미국 영사 재폰에 기소했다." 연갑수, <대원군 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대]] 출판부, 2003년, pp.109-110 [[중국]]에서 출발한 이들은 [[프로이센]] 국기를 달고 [[일본]]에 가서 무기와 도굴 장비를 구매한 다음, [[충청남도]]에 상륙한다. 이후에 [[러시아 제국|러시아]] 군대를 자칭하면서 덕산 관아와 인근 민가를 습격해서 무기와 도굴 장비를 다시 강탈했다. 하지만 구만포에서 남연군 묘까지 도보로 이동하면서 시간을 많이 소모해서, 결국 한밤중에 남연군 묘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전날 마을에서 깽판 부리고 간 탓에 금방 관군이 출동했고, 결국 그들은 관에 발라놓았던 석회[* 조선시대 사대부를 중심으로 많이 퍼진 [[회곽묘]]는 요즘도 가끔 발굴된다. 그 구조를 쉽게 말하면, 조선 전기는 관 위에 석회(…)를 퍼부어 [[공구리]]질한 수준에 가까웠고, 조선 후기는 공구리로 만든 관 안에 나무 관을 넣는 방식이다. 어느 쪽이든 이걸 깨려면 굴착 장비를 들고 와야 한다.]를 뚫지 못한 채 날이 밝으면서 철수한다. 오페르트는 이후 "우리가 석회를 못 팠을 것 같냐? 파려고 하면 팔 수 있었음. 우리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너네 백성이 불쌍해서 봐준 거야." 따위의 [[정신승리]] 쩌는 병맛 글[* 석회가 하도 두껍게 발라져 있어서 [[드릴]]도 제대로 안 들어갔었을 거라고 한다. 지금이야 손쉽게 부술 수 있지만, 그 당시라면 정말 중장비는 끌고 와야 부술 정도. 사실 지금도 회곽묘에 대한 개장이나 이장 작업을 할 때는 드릴을 장착한 포크레인을 동원하는 게 일반적이다. 수작업으로 뚫으려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을 보내려 시도했다. 오페르트는 자신을 수군 제독이라 일컬으며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를 영종첨사 심효철을 통해서 대원군에게 전달하려고 하였는데, 심효철이 "내용이 윤리에 어긋난다"고 전달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것이고, 사본이 조정에 올라가서 온 대신이 다 같이 보았다. '''당연히 대원군도.''' 아버지 무덤이 파헤쳐진 대원군은 격노해서 통상 금지 정책을 강화했다. 자세한 것은 [[오페르트 도굴사건]] 참조. 다만 이 [[오페르트 도굴사건]]에 대한 가장 정석적인 이야기고,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목할 것도 존재한다. 우선 도굴 사건의 배경인데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우선 [[병인박해]]로 인해 [[청나라]]로 망명한 '''조선인''' [[천주교]] 신자 최선일([[오페르트 도굴사건]]에 참여한 조선인)이 오페르트에게 관과 부장품을 볼모로 조선 정부와 교섭하라고 제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의 주장이다. 조선에는 와 본 적도 없는 [[프랑스인]] [[예수회]] 신부였던 쟝 바티스트 뒤 알드(Jean Baptiste Du Halde, 1674년 - 1743년)가 풍문만 듣고 쓴 책 《조선 왕국(Kingdom of Korea)》에 "조선은 왕족의 무덤에 부장품을 만땅으로 채워 넣어서 보물 창고나 마찬가지"라는 글을 썼고, 이후 외국인들에게 도굴 붐이 일어났는데 오페르트도 그 중 하나란 것이다.[[http://blog.naver.com/kjyoun24?Redirect=Log&logNo=60039971903/|#]] 다음으로 주도자가 오페르트이냐 아니면 젠킨스이냐도 문제다. 일반적으로는 오페르트가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런 식의 발굴 혹은 도굴 작업의 주도자는 경비를 대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데, 이 사람이 바로 [[미국인]] 젠킨스였다. 그리고 이 사건이 국제 문제가 되어서 벌어진 재판에 출석한 사람도 오페르트가 아니라 젠킨스. 오페르트의 경우는 일단 도굴단이 프로이센 국기를 달고 프로이센 군을 자칭했다는 점, 대원군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시도했다는 것, 무엇보다도 돌아가서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이라는 책을 썼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다. 오페르트가 남연군 시신을 통해서 조선 정부와 협상하려고 했다는 것도 이 책에 나온다. 당연히 [[미국]]이라면 이를 갈고 있는 [[북한]]의 경우, 오페르트는 안중에도 없고 남연군묘 도굴 사건이 미국이 주도한 간악한 만행들 중 하나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월북 화가 정현웅의 대표작이 바로 '''미제의 남연군묘 도굴'''일 정도. [[한제국 건국사]]에서도 이 도굴 사건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기본적인 얼개는 같지만, 대체 역사 소설이라서 실제와는 좀 다르다. 1869년(고종 6년)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이 지나서 조선에 수교를 청하는 국서를 보냈는데, 이 편지의 내용이 이전의 관례에 어긋나는 내용이었던지라 거절했다. 그 관례란 [[천황]]이 '조선 국왕 전하'라고 존칭을 써서 보내는 것이었으나, 이때 [[일본]]은 '본국 [[천황]]이 조선 국왕에게'란 제목으로 시작하게끔 써서 보내왔고, 대원군은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결국 1872년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는 정식으로 단절되었는데, 두 나라 모두 이대로 끝낼 생각은 아니었기에 협상은 여러 차례 시도했는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조선은 이전의 격식과 일본 전통 복장을 요구했고 서양식 양복을 입고 서양식 화륜선을 타고 온 일본 외무성 관리들은 그걸 거절하는 식의 일이 반복되었다. 대원군 실각 후 조선 조정에서 일본의 새로운 모습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사이에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다.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가 일어난다. 병인양요 이전 1866년에 [[평양시|평양]]에 제너럴 셔먼호[* 제네럴 셔먼호라는 배는 이른바 무장 상선이다. 그래서 일반적 상선과는 달리 상당한 무장이 되어 있었고 [[미국]]은 이 배의 침몰 원인이 조선이라는 것에 전력을 오판하게 된다.]라는 미국 배가 올라와 통상을 요구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중군 이현익을 억류하고 기습 [[사격]]을 가해 7명의 평양 군민을 살해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에 평양 군민들은 평안감사 [[박규수]]의 지휘하에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고 사로잡은 서양인들과 [[중국]]인 선원들을 죽였다. 선원들 살해 자체는 박규수의 명령이 아닌 성난 민중들이 중심이 되어 벌인 일이다. 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삼아 1871년 로저스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쳐들어왔는데 이 때 미국은 [[남북전쟁]] 때문에 상황이 좋지 않았고 결국 5년만에 함대를 이끌고 온 것이다. 신미양요 당시에도 조선은 미국 함대 군인에게 [[전쟁]]할 때 하더라도 일단 [[음식]]과 [[물]]을 보낼테니 잘 먹으라고 하였으나 미국 함대는 가볍게 씹고 온 강화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어재연]] 등이 광성보와 갑곶에서 대항했으나 조선군은 정말이지 처참하게 참패했는데 조선군은 정말이지 필사적으로 싸웠다고 한다. 참전한 [[미군]]의 기록에 따르면 [[무기]]를 놓친 사람은 아예 [[돌]]을 들고 달려들었으며 패배가 확정되자 칼로 목을 찌르거나 [[바다]]에 투신해 자결하는 병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강화도를 점령했지만 미군은 더 싸워봐야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4월 28일에 철수한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태평양 너머에서 소수의 병사로 장기전을 치를 여력이 안 되었다. 조선에게 있어 실질적인 전투 결과는 병인양요 때와 비슷하게 전술적 패배임과 동시에 전략적 승리였다. 조선군의 피해가 막심했지만 프랑스도 미국도 조선과 통상을 맺지 못하고 물러났기 때문. 이에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는데 척화비 건립은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이양선 사건 등으로 민심이 극도로 반외세에 달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한 조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10년 후에 한반도에는 관심이 없었던 [[영국]]이 [[러시아]] 견제차 [[거문도 점령 사건|거문도와 인근 섬들을 불법 점령]]하였고, 냉전과 흡사한 기류가 한반도에 흘러 하마터면 한반도 자체가 위기에 처할 뻔했으나, 2년 ~ 3년이 지난 후에 러시아의 남하 정책 철회를 확신하고서는 그냥 뱉어냈다. 사실 두 나라 모두 한반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던 게 아니라[* [[영국]]은 [[인도 제국]]과 [[청나라]]만으로 충분했고, [[러시아]]도 [[발칸 반도]]를 못 삼킨 이후엔 [[중앙아시아]]로 머리를 돌렸다. 다만 발칸 반도에 진출 못한 이유가 영국이었기에 같은 일을 반복하기는 싫어서 행동에 옮겼을 수도 있다.]서 전면전으로 가지는 않았겠지만, 만약에 영국이 한반도까지 식민지화한다면, 동북아 균형에 차질이 생겨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서구 열강들이 영국을 압박하려고 준비하기는 했었다. 이 2차례의 양요가 단지 무모한 [[쇄국]] 정책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친정을 맡게 된 후에는 당백전의 여파로 재정이 완전 파탄 지경에 이르러서, 조선군 기강과 무장 상태는 대원군 집권기와 비교해도 더욱 형편없는 수준이 되었다. 그 결과 영종진에서 [[병인양요]] / [[신미양요]] 때보다 훨씬 적은 수의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고,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 다만 개항을 한 것 자체는 조선 조정이 개항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운요호 사건은 단순한 계기라고 보면 된다. 흥인군 이최응을 비롯한 대신들은 "이거 상당히 이득될 듯합니다"란 결론을 내리고 있었고, 고종도 동의했다. 이후에도 고종은 병력 확충을 시작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나라의 무기를 마구잡이로 도입해 보급과 숙련에 차질을 빚게 만드는 등 문제가 많았다. 제식 소총만 해도 몇 가지가 됐는데 모두 다른 탄을 사용했으니 보급이 원활할 리가… 오늘날 흥선대원군이 개화를 이루지 않고 척화비 등으로 외세를 배척해서 조선의 발전이 늦어졌다고 평가하고 있으나 이러한 평가는 당시 현실에 비추어 보면 헛소리에 가깝다. 흥선대원군은 여타 [[위정척사파]]들처럼 사상적 [[도그마]]에 입각해 무조건적인 외세 배척을 주창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서양]] 문물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견지한 인물로 [[청나라]]에서 서양식 대포 제조술을 도입하여 [[대포]]를 제작하기도 했었다. 당시 서구 열강과 제휴나 조약을 체결할 것을 가장 적극 고려했던 인물 또한 흥선대원군으로 [[능력]]이 있었고 시대와 문제점을 읽는 안목도 있었으며 추진력도 강했지만 아들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사이가 너무 안 좋았고 [[정책]]이 일관되지 못했다. [[일본]]은 애초 [[네덜란드]]와 오랜 접촉이 있었고 [[미국]]이 일본을 [[식민지]] 삼으려고 살짝 간보다가 [[남북전쟁]]을 전후로 한 [[국내]]의 혼란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니 일본은 그야말로 천운이 따라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였던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제 아무리 수백 년간 네덜란드와의 교류로 서양에 대한 지식과 문물을 체험한 일본일지라도 당장 [[근대화]]로 강력한 군사력과 물량을 앞세운 미국의 화력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은 개항 당시에는 무리였다. 만일 [[남북전쟁]]으로 인한 국내 혼란이 아니었다면 일본도 [[베트남]]과 같은 식으로 식민화되었으리라는건 불 보듯 훤한 일이다. [[산업혁명]]으로 [[넘사벽]]의 수준이 된 서구 열강의 막강한 물리력에 [[동아시아]] 각국이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직접 맞대응하기란 [[태국]]처럼 [[지정학]]적인 요건을 잘 이용하거나 일본과 같은 시기적 [[행운]]이 주어지지 않고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조선이나 흥선대원군은 운이 없었을 뿐이고 일본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당장 개항을 하고 싶어도 서양에서 요구하는 것은 철저한 불평등 조약에 기반한 반[[식민지]]였기 때문에 개항을 하고 싶어도 할 대상이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설혹 평등 조약을 맺으려 해도 그러려면 서구 열강이 얕보지 못할 [[무력]]이 있어야 하는데 애초에 그 정도의 무력을 갖출 [[무기]]를 팔아줄 존재가 없었으며 그런 상대가 있었다 해도 [[재정]]이 파탄난 당시 조선에서 얼마나 가능했을까? 물론 개항 긍정파들의 주장도 강하기는 하다. [[태국]]과 [[에티오피아]]처럼 식민화를 면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사례를 들어 이 주장을 결정론적이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태국이나 에티오피아도 지정학적 조건, 열강 사이의 대립 이용, 전쟁을 통한 승리 등 조선과는 여러모로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속단할 수는 없다. 당장 태국의 이웃나라인 [[미얀마|버마]]는 당시 태국과 비교하여 딱히 크게 밀리는 [[국력]]이 아니었음에도 [[영국]]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어 방해가 되는 위치에 있었기에 3차례의 [[전쟁]] 끝에 결국 [[식민지]]가 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