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흥완군 (문단 편집) == 생애 == 1814년 2월 16일 [[한성부]]에서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이자 [[정원군|원종]]의 적3남 [[능창대군]]의 양7대손인 [[남연군|이채중(李采重)]]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여흥 민씨]]이다. 왕실의 후손이었지만 종친의 대우는 그의 [[고조|고조할아버지]] [[안흥군]]의 대에서 끝났고 그의 가족은 단지 [[왕족]] 출신 [[양반]]일 뿐이었다. 그러나 2살 때인 1815년 12월 9일 아버지 이채중이 [[정조(조선)]]의 이복동생이자 [[숙종(조선)]]의 3남 [[연령군]]의 양손자인 [[은신군]]의 [[양자(가족)|양자]]가 되어 [[남연군]]으로 봉해지고 [[종친]]으로 편입하면서 이정응 역시 왕족이 되었다. 1829년 1월 1일 흥완부정(興完副正)으로 봉해졌다.--새해 선물-- 1830년에는 흥완도정(興完都正)이 되었으며 당시 죽은 [[효명세자]] 원[* 왕세자의 무덤을 '원(園)'이라고 한다.]의 수원관을 맡았다. 1833년에 소의대부(昭義大夫) [[품계]]를 받고 흥완군(興完君)으로 봉해졌으며 그 무렵 이름을 '정응(晸應)'으로 고쳤다. 1834년 아내 대구 서씨와 사별하고 3살 연하의 [[순천 박씨]]와 [[재혼]]했다. [[순조]] 사후 산릉도감과 빈전의 대전관(代奠官)으로 참여했다. 1836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받았는데 그해 아버지 [[남연군]]이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오위도총부 도총관 직을 맡았고, 1844년 10월에는 동지정사 자격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8년 5월 18일에 [[한성부]]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34세, [[세는나이]] 35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