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흥인군 (문단 편집) == 일생 == 1815년 2월 17일 한성부에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자 [[정원대원군|원종]]의 셋째 아들 [[능창대군]]의 양7대손인 [[남연군|이채중]](李采重)의 3남으로 태어났다.[* 둘째형 [[흥완군]]이 태어나고나서 음력 기준으로 정확히 1년 1일만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여흥 민씨]]다. 왕실의 후손이었지만 종친의 대우는 그의 고조부 [[안흥군]]의 대에서 끝났고 그의 가족은 단지 왕족 출신 양반일 뿐이었다. 그러나 생후 10개월만인 1815년 12월 9일 아버지 이채중이 [[정조(조선)]]의 이복 동생이자 [[숙종(조선)]]의 3남 [[연령군]]의 양손자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해 [[남연군]]으로 봉해지고 종친으로 편입되면서 이최응 역시 왕족이 되었다. 1829년 1월 1일에 흥인부정(興寅副正)으로 봉해졌으며 1830년 흥인도정(興寅都正)으로 승격했다. 동생인 [[흥선대원군]]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대원군의 친형이라서 상당한 권력이 있었다. 1865년(고종 2년)에 둘째 조카인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왕좌에 올랐던 시절 동생인 [[흥선대원군]]이 주도했던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를 지냈다. [[흥선대원군]]이 문호 개방 및 통상 수호 조약에 반대하자 문호 개방 및 통상 수호 조약을 지지하면서 동생과 대립했다. 결국 유림들의 반대로 사직했는데, 이 때부터 [[흥선대원군]]과의 관계가 나빠졌다. 이후 조카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친밀해졌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잃는데 도움을 줬다. 1873년 동생이 실권을 잃자 [[명성황후]]의 도움으로 호위대장,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왕실 종친이 영의정에 오른 것은 [[성종(조선)|성종]] 때 [[구성군]] 이후 매우 오랜만이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의 국사(國事) 보좌를 맡았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의 신설로 총리 대신에 임명되었으나 다음 해에 유림들의 반대로 물러나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1882년 잠시 [[경기도]] [[광주시|광주부]] 유수로 임명받았다가 다시 영돈녕부사 직을 맡았다. 동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 동생인 [[흥선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던 구식 군대 군인들에게 [[명성황후]] 지지자 및 문호 개방 주동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흥인군의 최후에 대해 상당히 처참하게 기록해놓았다. [[임오군란]] 때 병사들이 집을 둘러싸자 도망가려고 담장을 타 넘다가 떨어져 [[내가 고자라니|고환이 터져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고 적었다. 슬하에 [[완영군|완영군 이재긍]]이라는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는 후사 없이 25살이란 나이에 요절했다. 그렇게 대가 끊길 뻔했지만 먼 방계[* 4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세종대왕]]의 적5남 [[광평대군]]의 가계에서 골랐다.]의 손자 뻘인 아이를 이재긍의 아들로 입양시켜 가계는 이어졌다. 문제는 그 사람이 그 유명한 '''[[을사오적]]''' 멤버 [[이지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