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흥친왕 (문단 편집) == 생애 == 1845년 음력 7월 20일 [[한성부]] 중부 정선방 돈녕부상계 니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흥선군]](훗날의 흥선대원군)과 현부인 [[여흥부대부인|여흥 민씨]](훗날의 여흥부대부인) 사이의 적장남으로 태어났다. 흥선군은 [[안동 김씨]] 김병기의 의심을 피해 바보인척 하면서 고의로 장남인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했다고. 어린 시절 잠깐 둘째 큰아버지 [[흥완군|흥완군 이정응]]의 양자로 출계했다가 동생 고종이 즉위한 뒤 다시 본가로 돌아갔다.[* 원래 흥완군은 자신의 친아들 [[완림군|이재원]]이 있었는데 자식없이 죽은 큰형 [[흥녕군 이창응]]의 [[양자(가족)|양자]]로 보낸 뒤 자식을 새로 얻지 못하고 일찍 죽어 정작 자신의 후사가 없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재면을 입양했는데 그마저 돌아가 다시 양자를 들여야했고 결국 21촌이나 되는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10대손 [[완순군|완순군 이재완]]이 입적되어 대를 이었다.] 흥선대원군은 나이가 찬 이재면 대신[* 철종이 승하할 당시 이재면의 나이는 19세, 즉 당시 기준으로는 이미 성인이었다. 따라서 이재면을 왕위에 올리면 사실상 흥선대원군은 섭정을 할 수가 없다.] 아직 어려 당분간 섭정할 수 있는 차남 이명복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뒤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1864년(고종 1)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8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64_013377|급제하고]], [[규장각]]과 예문관 등에서 여러 벼슬을 지낸 뒤 [[승정원]] 도승지로 승진한다. [[1874년]] 아버지 대원군이 축출당한 뒤에도 이래도 응, 저래도 응 하는 성격 덕택에 관직을 유지했다. 사실 대원군의 축출 과정에서 아버지가 축출당하는 것을 방조했는데 적장남임에도 아버지가 자신이 아닌 동생을 왕으로 추대한 것에 불만이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흥선대원군이 믿고 의지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소설가 장덕조에 의하면 그가 '오랫동안 불우한 환경에서 염량세태의 무정함과, 인간의 배신을 뼈저리게 느껴온 흥선대원군은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도 좁은 범위 안의 복심인물(腹心人物)과 골육을 등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882년 청나라로 끌려간 흥선대원군은 그에게 살려달라는 편지를 여러 통 띄워 보낸다. 아버지의 편지를 본 이재면은 바로 [[청나라]] 텐진으로 달려가 아버지를 모셨다. 흥선대원군이 귀국한 후 정변을 기도할때마다 이런저런 관직에 임명됐지만 실패로 끝나면서 축출당했다. [[1898년]] 흥선대원군이 죽을 때 어가가 궁궐을 출발했느냐는 질문을 연발했지만,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전했다가는 동생 손에 죽을 것이 두려워서 끝까지 입다물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약하고 무능한 아버지라서 그랬는지 그의 장남 [[영선군|이준용]]은 아버지 이재면이 죽을 때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아서 무루공자[* 無淚公子. 눈물없는 사나이.]라고 조롱받았다고 한다. 고종은 대원군과 함께 여러차례 쿠데타 모의를 했던 조카 [[영선군|이준용]]을 상당히 미워했고, 이는 그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이재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재면은 동생 고종에게 별다른 해코지를 가하지 않았는데도 동생한테 찬밥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왕족이 쿠데타에 연루된 것만으로도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단순 연루된 정도가 아니라 쿠데타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까지 된 이재면은 목숨을 부지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왕족으로서 대우받았으므로 고종은 형을 최대한 비호했다고 볼 수 있다. 1899년 족보상 고조부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어 완흥군(完興君) 군호를 받고[* 군호는 왕실의 본관 [[전주시|완산(전주)]]의 '완(完)'에 어머니 민씨의 본관 여흥의 '흥(興)'에서 따왔다.][* 은언군계 : 증(贈)[* 작위 수여 당시 고인.] [[덕안군|덕안군 이재덕]], [[경은군|경안군 이재성]], [[청안군(1851)|청안군 이재순]]. [br] 은신군계 : 증(贈) [[완림군 이재원]], [[완순군 이재완]], 증(贈) [[완영군|완영군 이재긍]], [[흥친왕|완흥군 이재면]]. [br] 은전군계 : 증(贈) 인양군 이재근, [[의양군|의양군 이재각]], [[예양정|예양정 이재규]].] 1910년에 육군 부장에 임명되면서 흥친왕(興親王)에 봉해졌다. [[경술국치]] 때 황족 대표로 참여하여 조약 체결을 승인했고, 친왕에서 공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1912년 사망했는데, 고종은 그의 빈소로 가서 곡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