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희곡 (문단 편집) === 한국에서의 희곡 ===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희곡이 문학으로서 홀대받는다는 이야기가 반복하여 제기되고 있다. 시, 소설, 희곡에서 모두 작품활동을 하였던 [[장정일]]이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한 대표적인 작가 중에 한 명이다. 한 번 우리나라 국어 교과서에 실리는 작품들 중에 [[희곡]]이 몇 편이나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자. 또, 한국의 [[문학상]]은 이름만 '문학상'이지 대부분은 소설에게만 수여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연극의 위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영화관에서 영화는 보더라도, 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 한편으로 과거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개판이었던 것이 크다. [[왜정]] 때에는 어떤 극작가가 창작한 작품이 인기가 있다 싶으면 비슷하게 베껴서 공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었던 데다가, 극작가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공연하기도 했다. [* 당장 인터넷에 희곡 제목을 검색하면 그 희곡을 너무나도 쉽게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그리고 '신극(新劇)운동'이라 하는 비영리/반직업적인 연극운동에서 실질적인 근대연극이 출발한 터라, 대중성이나 상업성과는 거리를 두는 경향이 강했다. 돈을 버는 목적보다는 문화운동이라는 사명감이 더 컸던 터라 직업으로서의 본격적인 극작가 출현은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 1900~1920년대 [[신파극]]의 경우에는 [[쪽대본]]과 함께 어떠한 줄거리 흐름이 존재하고 거기에 맞게 배우가 사실상 [[애드립]]을 하는 터라, 극작가가 탄생하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하는 신파극 대본은 없다. 당장 1910년대 유명한 신파극인 [[이수일과 심순애]]도 소설이 존재할 뿐 현존하는 당시 희곡은 없다.] 무엇보다도, 유럽에서는 '극장(Theatre)'은 그리스 로마 시대 때부터 존재하였기에, '극장(Theatre)'이라는 존재 자체가 워낙 당연하고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특히 문명과 비문명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오늘날까지도 유서 깊은 유럽 귀족 가문들의 자식 교육 방식은 어려서부터 가정 교사를 붙여 [[그리스어]], [[라틴어]]를 공부하고 그리스 비극과 로마 희곡을 읽는 것이었다.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장뤽 고다르]]가 이런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도련님이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이미 영국에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엘리트 귀족 계층이 희곡을 쓰고 이를 무대에 올리고 배우를 연기했으며, [* 그리스어, 라틴어 같은 어떠한 엘리트 교육을 받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희곡을 썼던 천재 [[셰익스피어]]에게 열폭했던 영국 귀족 계급 출신 작가들이 셰익스피어가 사실은 말로나 베이컨 같은 귀족 출신 작가의 대역에 불과하다는 [[음모론]]을 만들어 퍼트렸고, 오늘날까지도 널리 퍼져 있다.] 오늘날에도 영국은 혈통을 따져서 왕실의 피가 섞여야 왕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할 정도이다. 즉, 유럽과 미국에서는 희곡이란 인류 문명의 정수로 대접받았다. 반면에, 한국은 [[구한말]]까지 '극장(Theatre)'이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지구 상에 몇 안 되는 국가였으며, 구한말까지 한국에서는 공연예술이라고 하면 '극장(Theatre)'이 아닌 흙바닥에서 하는 탈춤이나 판소리 같은 것이었다. 1950-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극장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기에는 이미 영상 매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자리잡은 시기였고, 이에 연극을 고급스러운 귀족 문화로 간주하고 영화를 저속한 [[대중문화]]로 여기는 유럽/미국과는 정반대로 한국에서는 영화가 고급 문화가 되고 연극은 탈춤 같은 서민 문화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한국의 국립 극장이 1960년에 설립되었는데, 이는 5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영화의 성장과 70~80년대 TV드라마의 등장과 시기가 겹친다.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가 살아있던 시기에 공연하던 국립 극장들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온다.) 이러한 결과로, 한국에서는 돈 안 되고 열악한 희곡 보다는, 영화나 드라마 [[시나리오]]가 훨씬 더 돈이 되니... [* 물론 넓은 의미에서 희곡의 하위 범주에 시나리오를 두는 경우도 있지만...] 당연히 그 방면으로 사람들이 몰릴 수 밖에 없다. 당장 희곡 공모전보다는 시나리오 공모전이 더 많고, 상금도 더 많은 편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전통극은 문자화된 희곡이 존재하지 않았고, 구전으로 전승되었었다. 일본만 해도 도쿠가와 막부 시절에 '노'와 '가부키' 등의 극문화가 발달하여, 가부키 희곡이 삼백여 편이 문자화되어 전승된다. 한국은 문자화된 희곡의 시초를 조선말기 [[신재효]]가 판소리 6마당이 문자화한 것으로 보며, 구한말 일본을 통하여 서구의 연극개념과 [[신파극]]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문자화된 희곡 창작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희곡작품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제각각 입장이 다르다. [[이광수(소설가)|이광수]]의 <규한>(1915)을 언급하기도 하고, 실제 공연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조명희(시인)|조명희]]의 <김영일의 사(死)>(1919)가 거론되기도 한다. 불과 10여 년전까지 조중환의 <병자삼인>(1913)이 근대 희곡의 시작이라고 언급되었었지만, 일본 신파극인 <희곡 우승열패>의 [[번안]]임이 밝혀졌다.[* 김재성, 「<병자삼인>의 번안에 대한 연구」(2007)에서 처음 밝혀졌다.] 그래서 지금은 최초로 지면에 발표된 희곡으로 언급되곤 한다. 분명한 사실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김우진, 김정진(김운정), [[송영(1903)|송영]], [[유치진]] 등 본격적으로 희곡을 창작하는 극작가들이 등장했으며, [[1935년]] [[동양극장]]이 생기면서 월급제의 전문 극작가가 탄생했다. 그 이전까지는 극단 내 전속 극작가를 두는 수준이거나, 아예 극작가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