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키아게샤 (문단 편집) === 중국의 히키아게샤 === 태평양 전쟁의 패전 직후 일본은 해외 공관에 현지에 남은 자국민을 가급적 잔류시키라는 훈령을 보냈다. 660만 명의 해외 거주 일본인이 한꺼번에 귀국하면 물자 부족 등 혼란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중국에 남겨진 자국민에 대해서도 전후 일부만 귀국시킨 채 1959년 ‘전시사망 선고’를 내려 호적을 아예 말소할 정도였다(...).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20121/111368861/1|日 미즈기와 대책]] 그 결과 [[중국]]에서는 [[중국인]] 행세를 하며 남은 일본인들도 탄생하게 되었다. 몇몇 일본인들은 자기 자식들을 평소 알고 지내던 중국인에게 맡기고 나중에 데리러 돌아오겠다며 자식들을 버리고 떠나기도 하였다. 이런 식으로 중국에 잔류한 일본인 고아가 2,700명에 이르렀고, 중국인과 [[결혼]]한 일본인들도 중국에 잔류했는데 [[https://ja.wikipedia.org/wiki/中国残留日本人|그 숫자도 4,000명 정도였다.]] 이 외에도 중국인 행세를 하며 중국에 남은 일본인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은 일본인들 중 일부는 [[홍위병]]들에게 [[문화대혁명]] 때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1972년에 중일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일본 정부]]는 이들의 [[일본]] [[귀국]]을 시도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자기가 [[일본인]]이라는 자각이 없었으며 90% 정도는 [[일본어]]조차 몰랐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과 혈연 관계가 있으면 영주권을 주는 법률에 의해 한 사람의 일본인과 친척 관계를 맺은 수십 명의 [[중국인]]들이 넘어오는 일도 있었다. 짐작한 대로 이들은 [[차별]]당했고 일부는 [[중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일본어판 위키에 따르면 이들의 2세, 3세가 일본에서 [[야쿠자]]가 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는 걸 보면 [[가이진]](外人) 인식은 완전히 불식되지 않은 듯하다. 일본인 3,000명이 [[조선의용군]]과 [[홍군]]에 의해 [[https://zh.wikipedia.org/wiki/通化事件|학살당한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이 통화사건은 잔류했던 일본 관동군의 선공으로 촉발되었고, 일본인들의 학살은 중국군의 진압과정에서 발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