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타이트 (문단 편집) == 정치 == 히타이트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그들의 정치체계와 법률이다. 히타이트의 정치체계는 타바르나(왕), 타와난나(제사장+왕비+대비), 판쿠(귀족회의)라는 세 주체에 권력이 분산되어 상호 견제하게 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 타바르나의 여성형인 타와난나는 대왕비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지만, 왕비와 타와난나는 별개의 지위였으며 왕의 정비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타와난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타와난나는 여제사장의 지위도 함께 맡았으며, 왕비일 때는 왕의 배우자로서, 왕위가 계승되고 나면 왕의 어머니로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왕과는 별개의 권한을 가진 여성판 최고직위가 왕의 부인이나 어머니에게 별도로 계승되는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텔레피누의 칙령으로 판쿠는 왕위와 타와난나의 계승을 비준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왕이 지명한 후계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다음 왕이 되는 것은 아니고 반드시 판쿠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이는 왕위를 둘러싼 지나친 권력다툼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며 왕권을 제한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쿠와 왕 사이에 특별한 권력다툼이 일어난 흔적은 없다. [[인도유럽어족]] 계통 언어를 쓰는 히타이트는 작은 도시국가들과 봉건계약을 맺어서 통치했다. 이를 [[중세]] [[유럽]]의 [[봉건제]]와 비교하며, '''최초의 봉건제'''가 시행된 국가로 보는 견해도 있다. 히타이트의 봉신국가들에게는 여러 의무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히타이트의 편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 히타이트가 봉건계약을 맺은 작은 나라들을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가 있는데, 기원전 13세기 히타이트와 [[아시리아]]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지던 때, 당시의 히타이트 임금인 투드할리야 4세는 소국인 아무르에게 대(對)[[아시리아]] 경제제재에 앞장서라는 서한을 보내 아시리아에 무역봉쇄로 맞섰다. 물론 히타이트가 모든 영토를 봉건제로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카르케미쉬]]와 [[알레포]]는 직접 통치하여 시리아 지역의 행정 중심도시로 삼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