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토쓰바시대학 (문단 편집) == 학풍 및 특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qhm_logo.png|width=100%]]}}} || || {{{#f5f5f5 '''카네마츠 강당'''}}}[* 학교의 주요행사가 이뤄지는 곳이다. 학교의 랜드마크로 학교 팜플렛을 포함한 각종 매체에 자주 등장한다.] || 학부생만 4만 명에 달하는 [[와세다대학]]의 재학생 수에 비교해서 히토쓰바시대학은 그 1/8인 5천 명 남짓이다. 더불어 학부생의 세미나 참석은 학-원 공동 세미나에 한해서이지만, 기본적으로 학과에 연연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사회학과 학생이 문학부인 언어사회연구과 세미나에 참가해도 무방할 정도로 자유롭다.[* 당연하지만, 사전에 교수님의 허락은 받아야 한다. 물론 대부분 교수님들은 허락해 주시는 편이다.] 또 일본 국내 대학치고 드물게 서양의 대학을 방불케 하는 전 학부생의 세미나 수업 참가와 졸업논문 제출이 필수이다. 상학부의 경우 1학년때부터 교수 1명과 학생 10명으로 이루어진 세미나 수업에 참가해야하며, 전 학부생은 3학년 때부터 2년간 소속될 세미나수업을 고르지 않으면 안된다. 3학년부터 자신이 연구하고 싶은 세미나에 참가하는 이 세미나 수업을 후기제미라고 하며, 학생은 자신이 연구하고 싶은 주제를 교수 밑에서 공부하며 최종적으로 그것에 관한 졸업논문을 제출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이 후기제미와 졸업논문 어느것이 빠지더라도 졸업할 수 없다.[* 애초에 이러한 세미나 방식의 수업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 [[히토쓰바시대학]]이다. 이 시스템이 더욱 더 빡세지면 빡세졌지, 완화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다 보니, 우직하게 본인 할 것만 열심히 하는 모범생 스타일의 학생이 많으며, 적은 재학생 수, 캠퍼스의 위치[* 메인 캠퍼스가 위치한 [[쿠니타치시]]는 교육도시로서 상업적인 개발이 제한된다. 즉, 동네 자체가 번잡하지 않고 조용한 동네다.] 등과 맞물려 전반적으로 굉장히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다.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선 말 그대로 천재가 모인 느낌인 [[도쿄대학]], 괴짜 기질인 학생들이 많은 [[교토대학]] 등과 비교하면, 정말로 이렇다 할 특징이 없다. 당장 동아리만 살펴봐도 광고연구회, 사회과학연구회, 공정무역 추진 동아리 등 이름만 들어도 지루해 보이는 학술 동아리들이 넘쳐난다. 좋게 말하면 조용하게 공부하기 좋은 학교이고, 안 좋게 말하면 '''재미없는 학교'''다. 학교는 문과 뿐인 대학임에도 불구하고 여학생 수가 적다. 성비는 약 3:1 수준.[* 2012년 5월 1일 학부생 기준으로 총 4450명 중 남자가 3347명, 여자는 1103명이다. 다만, 과에 따라서 성비의 편차가 굉장히 심하다. 경제학부의 경우 7:1 정도로 어마어마한 [[남초]]이지만, 사회학부는 1.3:1로 그나마 남녀성비가 균등하다.][* 대학원생은 1.5:1 정도로 여자가 적기는 하지만 학부생만큼은 아니다. 연구과나 지도 교수님에 따라서는 남자가 소수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학생들은 근처에 위치한 [[쓰다주쿠대학]]([[여자대학]])[* 9살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츠다 우메코(1864 – 1929)가 세운 일본 최초의 근대여성교육기관이 시초. 아가씨 학교로 유명하다고 한다.]와 클럽을 연합하는 등 교류가 활발하다. 또한 일본 최고의 국립여대인 [[오차노미즈여자대학]]과는 학점교환 단위협정을 체결하여 역시 교류가 많다. 학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교풍이다. 학생자치가 잘 되어는 것으로 유명하며, 심지어 히토쓰바시(외나무다리)대학이라는 명칭도 학생 투표로 결정했고, 현재도 학장 부학장을 학생들이 투표할 정도이다. [[도쿄대학]]과의 합병반대, [[제국대학|구 제국대학]] 편입을 거부한 역사로 국립대학이면서도 국가권력에 반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더불어 국가권력을 지향하고 달려간다는 이미지가 강한 [[도쿄대학]]과는 여러 가지로 복잡한 감정이 섞여있다.[* 물론 이 감정은 도쿄대학과 스포츠 교류전인 상동전에서도 드러난다.] 경험주의와 공리주의를 중시하는 실학의 대학이라는 풍토에 게임이론 행동경제학 등의 최신 학계의 경향과 신고전주의 케인즈부터 정통 마르크스주의까지 아우르는 수업을 하는 것이 교풍의 특징이다. 사실 [[일본 제국]]시대 [[제국대학]]의 경제학 강좌들은 (유럽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교수들이 대다수였으므로) 거의 전부가 [[마르크스경제학]]에 경도되었는데[*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도쿄제대의 분교격이던 모든 제국대학이 거의 비슷했다고 한다. 오사카 출신으로 나고야의 [[구제고등학교|제8고등학교]]를 거쳐 1924년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호세이대학]] 교수를 지내다 1927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정학강좌 담당교수로 부임한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 역시 학내 맑시즘 조직의 지도교수로서 법문학부에서 [[리강국]], [[박문규]], [[최용달]], [[박치우]], [[신남철]],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553788&cid=46645&categoryId=46645|김태준]], [[박치우]] 등의 쟁쟁한 공산주의자들을 제자를 길러냈고 공산주의자 도피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당해 징역 3년을 살았다. [[http://www.hangyo.com/mobile/article.html?no=89838|출처]] 참조. 재정학강좌 담당교수인 미야케와 함께 경제연구회 지도교수를 맡았던 스즈키 경제학강좌 담당교수 역시 강의를 온통 마르크스 이론의 소개와 해설로 메웠다고 한다. 김용직, 「김태준 평전」, 일지사, 2007. 97쪽.] 히토쓰바시대학의 전신인 도쿄상과대학은 상업강습소 시절부터 미국인 윌리엄 휘트니를 초빙해 가르치는 등 실무를 극히 중시하는 [[고등상업학교]]의 학풍에 더해 영미권으로부터 들어온 최신 학계 동향을 빠르게 수용해서 일본제국 시절부터 현대경제학을 받아들여 교수했다고 한다.[* [[파일:koeconrespection.png]]] 그리고 묘하게 [[일본]] 특유의 [[민족주의]] 색채가 없고, 반골 성향(제국대학에 반기를 든 전통)이 강한 학교라, 입학식과 같은 주요행사에서도 [[일장기]]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고등고시]]에 매우 강한 모습을 보인다. 국가 1종 공무원 시험[* 한국의 행시와 비슷하다.] 출신 통계를 보면, 매년 35명 정도는 꼬박꼬박 붙는다. 반면 [[사립대학]] 중 가장 많이 붙는 [[와세다대학]]에서 매년 102명 남짓 합격자가 나오는데, 고려할 것은 와세다대학 학부생과 대학원생의 총 인원이 5만 4천명 정도인 반면 히토쓰바시대학의 학부생과 대학원생 총인원은 6천 명 정도라는 사실이다. [[도쿄대학]] 다음으로 총원 대비 고시 합격자 수가 많기로 유명하다. [[고등문관시험]] 시절에도 합격률에서뿐 아니라 합격자 수로도 최상위권을 점한다. 영국에 있는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와 학풍이 비슷한 대학이다. 문과 특화 단과대학인 점, 실학을 중시하는 점, 자국 내에서 경제학 분야에 있어서 높은 평가를 받는 점 등이 그러하다. 이 때문에, 서로 끈끈한 교류활동도 하고있어, 두 대학이 비교 당하는 일도 잦다. 그리고, 2012년부터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교수를 초빙해 매년 강연한다. [[http://www.hit-u.ac.jp/function/outside/news/2016/20160620.html|링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