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출신 인물]][[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br]{{{-1 [[라틴어]]: Gaius Licinius Crass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조부)[br]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아버지)[br][[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171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형제)[br]리키니아(누이)[br]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아들)[br]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아들)[br][[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손자)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68년 || ||<#800080> {{{#ffffff '''전임''' }}} ||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186년 집정관)|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br][[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기원전 169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 ||<#800080> {{{#ffffff '''후임''' }}} || [[퀸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br][[마르쿠스 유니우스 펜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노빌레스]] 집안인 리키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는 기원전 236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는 기원전 208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형제로 기원전 171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171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있었고, 누이로 기원전 175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기원전 175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의 아내 리키니아가 있었다. 기원전 172년 [[법무관]]을 맡아 로마의 사법 재판을 관장했다. 이 시기, 기원전 173년 집정관을 맡았던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기원전 173년 집정관)|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리구리아인들을 상대로 잔악행위를 일삼자, 리구리아인들이 분노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원로원은 리구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을 조사하고 범인을 처벌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그는 라이나스에게 로마에 오지 않으면 재판을 강행해 유죄를 선고하겠다고 통보했다. 기원전 172년 집정관이자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의 형제인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이를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원로원의 허락을 받지 않고 포 강 북쪽 땅에 리구리아인 일부를 정착시켜서 그들을 달래려 애썼다가 원로원의 비판을 받았다. 결국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임페리움]]을 포기하고 로마로 돌아갔고, 리구리아인들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포 강 너머의 토지에 정착했다.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심각한 봉기를 유발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포필리우스 가문의 간청을 받은 그가 임기가 끝날 때까지 다음 재판을 연기했고, 이후 재판은 흐지부지되었다. 기원전 171년 집정관을 맡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투입된 형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를 역임했으며, [[칼리니코스 전투]] 당시 우익 부대를 이끌었다. 기원전 168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와 함꼐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파울루스가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투입되었을 때, 그는 이탈리아에서 추가 병력을 모집했다. 그러다 파울루스가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을 궤멸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군대를 해산시킨 뒤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가서 그곳을 다스렸다. 기원전 167년 10인 특사 중 한 명으로 선임되어 마케도니아의 전후 처리를 관장했다. 그 결과 마케도니아는 4개의 귀족 공화국으로 나뉘었고, 자체 군대도 없고, 이전 세금의 절반을 로마에 납부해야 했다. 또한 이들 4개 국가의 주민들은 다른 공화국에서 재산을 가질 수 없었고, 외교 활동을 독자적으로 거래할 수 없었으며, 목재를 수출할 수 없고, 은 및 금 광산을 개발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145년 [[호민관]]을 역임했다. 그리고 또다른 아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이름만 전해지지만, 이 사람의 아들이자 기원전 168년 집정관의 손자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당대 최고의 로마 웅변가로서 명성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