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800080> {{{#ffffff {{{+3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br]{{{-1 [[라틴어]]: Gaius Valerius Flacc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고조부)[br][[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95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증조부)[br]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조부)[br]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아버지)[br]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형제)[br][[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00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사촌)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93년 || ||<#800080> {{{#ffffff '''전임''' }}}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94년 집정관)|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br][[가이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 || ||<#800080> {{{#ffffff '''동기''' }}} ||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 ||<#800080> {{{#ffffff '''후임''' }}}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92년 집정관)|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br][[마르쿠스 페르페르나(기원전 92년 집정관)|마르쿠스 페르페르나]]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로마 공화국의 가장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으로 손꼽히는 [[발레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특히 그가 속한 플라쿠스 가문은 여섯 세대에 걸쳐 집정관에 선임될 정도로 로마 정계에 오랫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조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27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219년 로마와 동맹을 맺은 [[사군툼 공방전|사군툼을 포위 공격한]] [[한니발 바르카]]의 인도를 카르타고 정부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발발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았다. 증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95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95년에 [[대 카토]]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184년에 대 카토와 함께 [[감찰관]]을 맡았다. 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52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명시되었을 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형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86년에 보결 집정관을 맡았다. 사촌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00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00년 집정관을 맡았으며 프린켑스 세나투스를 역임했다. 그는 최고 행정관의 법적 제한 연령을 규정한 빌리우스 아날리스의 법에 의거해 기원전 96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법무관으로서 루카니아 지방의 벨리아 시에서 온 여사제 칼리파나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할 것을 원로원에 제안해 승인을 얻어냈다. 기원전 93년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였던 [[마르쿠스 헤렌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 해에는 로마와 그 너머 모두에서 별다른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후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켈티베리아인들과의 전쟁을 치러 20,000명의 적병을 사살하고 지난날 [[원로원]] 의원을 큐리아 건물에서 불태웠던 벨구에다 시민들을 학살했다. 기원전 91~88년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고, 뒤이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가이우스 마리우스]] 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그는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과 갈리아 속주 총독을 연이어 맡으면서 이 상황에 별다른 입장을 표하지 않았지만, 그의 형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루키우스가 사망한 후 조카 루키우스는 삼촌이 있던 갈리아로 망명했다. 그는 갈리아에서 병사들에게 [[임페라토르]]로 선포되었고, 주화를 스스로 주조했다. 기원전 83년 [[술라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즉시 술라의 편으로 넘어갔다. 기원전 81년 로마로 돌아와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서 거둔 승리가 동시에 기념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