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출신 인물]][[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감찰관]]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800080> {{{#ffffff {{{+3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br]{{{-1 [[라틴어]]: Gaius Cassius Longin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조부)[br]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아버지)[br][[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124년 집정관)|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71년 || ||<#800080> {{{#ffffff '''전임''' }}} ||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br][[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리구스]] || ||<#800080> {{{#ffffff '''동기''' }}}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171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800080> {{{#ffffff '''후임''' }}} ||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br][[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기원전 170년 집정관)|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집안인 카시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기원전 178년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맡았을 때 아르미눔(현재 리미니)에 주둔한 군단을 이끌고 이스트리아인과의 전쟁을 계획했지만 전염병으로 인해 막대한 희생자가 양산되자 취소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 간의 재임 최소 시간 간격을 규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해 늦어도 기원전 174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173년에는 갈리아와 리구리아의 땅을 로마 시민에게 분배하기 위해 결성된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기원전 171년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171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 시기에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했다. 제비뽑기 결과, 크라수스가 마케도니아 전쟁을 이끌게 되었고, 그는 이탈리아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군공을 세우고 싶었던 그는 아퀼레이아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그곳에서 일리리아를 거쳐 마케도니아로 행진했다. 그 과정에서 로마와 전쟁 중이 아니었던 갈리아인, 카르니인, 이스트리아인, 그리고 이아피드인의 땅을 약탈했다. 그러다 마케도니아 국경에 이르렀을 때 [[원로원]]으로부터 복귀 명령을 접수받고 어쩔 수 없이 복종했다. 이후 그에게 약탈당한 부족들이 로마에 사절을 보내 항의했을 때, 이미 임기가 만료되었던 그는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서 마케도니아에 투입된 로마군에 배속되었다. 원로원은 사절들에게 그가 부재한 상황이기 때문에 책임을 물 수 없다고 답했다. 그 후 카시우스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발칸 반도에 남아 있었고, 기원전 168년 법무관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의 지시에 따라 포로로 잡힌 [[일리리아 왕국(고대)|일리리아 왕국]]의 국왕 [[겐티오스]]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154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들은 영구적인 석조 극장 건설하려 했지만, 영향력 있는 귀족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공중 도덕에 쓸모없고 해로운 건물"이라며 반대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여 건설 중인 건물을 철거하기로 했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건설 계획을 포기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일은 기원전 125년에 벌어졌으며, 여기서 등장하는 카시우스는 그가 아니라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빌라라고 추정한다. 아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124년 집정관)|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기원전 124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27년 집정관이며 기원전 125년 감찰관인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빌라]]도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164년 집정관인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164년 집정관)|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아들이라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