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정치인]][[분류:로마 공화국/군인]][[분류:로마 출신 인물]] ||||<#800080> {{{#ffffff {{{+3 '''가이우스 카시우스 카르멘시스''' }}}[br]{{{-1 [[라틴어]]: Gaius Cassius Parmensi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31년/30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티카 속주 [[아테네]]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퀸투스 카시우스(아버지) || ||<#800080> {{{#ffffff '''참전''' }}} ||[[해방자 내전]], [[시칠리아 내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원로원]] 의원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의 [[원로원]] 의원.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의 가담자다. == 생애 == 기원전 1세기 정계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노빌레스]] 가문인 카시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는 퀸투스 카시우스라는 이름만 알려졌을 뿐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고대 사료에서는 기원전 44년 이전의 행적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 없지만, 일부 학자들은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에 폼페이우스 편에 섰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승리한 카이사르가 작은 배를 타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왔을 때 우연히 마주친 카시우스가 바로 이 인물이었을 거라 추정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큰 배를 타고 있었지만 카이사르의 행운에 깊이 두려워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항복했다고 한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에 가담했다. 기원전 43년 [[조영관]]에 선출된 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아시아 해안에서 함대를 이끌었다. 동료 조영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는 "집정관, 법무관, 호민관, 원로원, 파트리키 및 평민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파르멘시스가 거대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마케도니아에 군대를 집중시켰을 때, 파르멘시스는 아시아에 남아서 그들을 지원했다. 기원전 43년 11월 제2차 [[삼두정치]]는 그를 숙청 명단에 올렸다. [[필리피 전투]]에서 해방자파가 패배한 후, 그는 로도스에서 포획한 30척의 배로 함대 규모를 강화한 후 삼두파의 추적을 피해 자신에게 합류한 무리를 거느리고 시칠리아로 가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합세했다. 이후 발발한 [[시칠리아 내전]]에 참여한 그는 기원전 36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패망하자 그와 함께 아시아로 향했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귀순했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을 때 옥타비아누스가 유일한 딸인 [[대 율리아]]를 [[오드뤼사이 왕국]]의 국왕 [[코티스 2세]]와 결혼시키려 하며, 옥타비아누스가 어렸을 때 카이사르에게 몸을 판 매춘 소문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수에토니우스]]는 파르멘시스가 옥타비아누스가 빵집 주인의 손자이며, 그의 할머니는 더러운 손으로 거칠고 추접스러운 밀가루를 반죽했다고 조롱하는 편지를 인용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의 편에서 싸웠지만 안토니우스가 패하자 아테네로 도주했다. 그 후 기원전 31년 또는 기원전 30년에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을 받은 퀸투스 아티우스 바루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카이사르 암살을 주동한 암살자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암살자였다. 파르멘시스는 여러 편의 비극, 풍자문, 비문 등을 집필했다고 전해진다.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카시우스'(아마도 파르멘시스)의 비극 작품 <브루투스>를 인용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현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