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감찰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800080> {{{#ffffff {{{+3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br]{{{-1 [[라틴어]]: Gaius Cornelius Cetheg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조부)[br]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아버지)[br]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97년 || ||<#800080> {{{#ffffff '''전임''' }}} ||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br][[섹스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카투스]] || ||<#800080> {{{#ffffff '''동기''' }}} || [[퀸투스 미누키우스 루푸스(기원전 197년 집정관)|퀸투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 ||<#800080> {{{#ffffff '''후임''' }}} ||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br][[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196년 집정관)|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켈트족]]에 속한 인스브레스족을 격파했다.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는 기원전 204년 집정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쿠스와 함께 고대 사료에서 언급된 코그노멘 케테구스(Cethegus)의 첫번째 사용자였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따르면, 그의 조부는 마르쿠스, 아버지는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고 기원전 204년 집정관 마르쿠스의 조부 역시 마르쿠스이고 아버지는 마르쿠스였다. 학자들은 두 케테쿠스가 할아버지를 공유했으며 서로 사촌 관계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200년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간 히스파니아 총독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199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의 대리 총독으로 지명되어 1개 로마 군단과 15개의 보조병 부대를 이끌었다. 그는 총독이 떠난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세데타니족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세데타니족은 약 15,000명을 상실했다고 한다. 이후 로마로 돌아간 그는 기원전 199년 [[조영관]]에 선임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서 유별나게 사치스러운 경기를 조직했다고 한다. 기원전 197년 [[퀸투스 미누키우스 루푸스(기원전 197년 집정관)|퀸투스 미누키우스 루푸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대 플리니우스]]는 그가 선거가 끝난 직후 시민들에게 포도주를 나눠줬다고 밝혔다. 그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원로원에 마케도니아로 갈 집정관을 제비뽑기로 뽑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호민관]]이 큰 전쟁 중에 지휘권을 빈번하게 바꿔서는 안 되니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전직 집정관으로서 계속 전쟁을 이끌게 해야 한다고 반박했고, 원로원은 이에 따라 두 집정관에게 이탈리아에 남으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한 그는 동료 집정관 루푸스가 리구리아인들을 통제하는 동안 갈리아인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케테구스는 인수브레스-케노마니-보이족 연합군과 대치했다. 그러던 중 보이족은 루푸스가 자신들의 영역을 약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그는 케노마니족과 비밀리에 접촉해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민키우스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리비우스에 따르면 35,000명의 인수브레스인이 섬멸되었다고 한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카르타고인으로서 갈리아-인수브레스 연합군의 사령관을 맡고 있던 [[하밀카르(갈리아 지도자)|하밀카르]]는 이날 사로잡힌 뒤 나중에 개선식에서 광장으로 끌려가 공개 처형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또다른 기록에는 하밀카르가 기원전 200년 크레모나 인근에서 법무관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에게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고 기술되었다. 케테구스는 적에게 붙들려 있던 로마 주민들을 구출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러면서 동료 집정관 루푸스에게도 동일한 명예를 줄 것을 요청했지만 원로원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기원전 194년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카투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당시 집정관이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정하고 로마에서 열린 검투 경기장에서 원로원 의원을 위한 특별 의석을 할당했으며, 3년 전에 건립된 유피테르 신전을 봉헌했다. 기원전 193년 카르타고와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 사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향했지만,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본 뒤 어느 쪽이 옳은 지를 결정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의 아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쿠스는 기원전 149년 [[루시타니아 전쟁]] 때 루시타니아인들에게 땅을 준다고 속여 비무장 상태로 유인한 뒤 몰살시켜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기원전 144년 집정관)|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를 고발한 호민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연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갈바는 막강한 집안배경과 부를 활용해 처벌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