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가이우스 플라미니누스'''}}}[br]{{{-1 [[라틴어]]: Gaius Flamini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아버지) || ||<#800080> {{{#ffffff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임기'''}}} || 기원전 187년 || ||<#800080> {{{#ffffff '''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기원전 188년 집정관)|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br][[가이우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 ||<#800080> {{{#ffffff '''동기'''}}}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기원전 187년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800080> {{{#ffffff '''후임'''}}}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186년 집정관)|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br][[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186년 집정관)|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평민 출신 집안인 플라미니우스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가문 최초로 최고 행정관에 오른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였다. 그는 기원전 223년과 기원전 217년에 집정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220년에 [[감찰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기원전 217년 [[한니발 바르카]]와 맞서다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카르타고군과 맞섰고, 기원전 210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재무관을 맡아 히스파니아 전선에서 활동했다. 기원전 196년 [[조영관]]을 맡아 시칠리아 총독 시절 자신들에게 선정을 베푼 그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시칠리아인들이 보내준 밀 100만 파운드를 로마 빈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줬다. 로마는 이를 기념하여 이틀 동안 [[루디 로마니]] 축제를 성대하게 치렀다. 기원전 193년 [[법무관]]에 선임된 뒤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부족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로마 정부에 추가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발레리우스 안티아스]]에 따르면, 그는 히스파니아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에서도 군인을 모집했다고 한다. 그렇게 모집한 병력을 이끌고 오르텐스 시를 공략했으며, 겨울 동안 히스파니아 부족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했지만 많은 손실을 입었다. 원로원은 그의 권한을 세 번 연장해 히스파니아에서 작전을 계속 이어가게 했다. 이후 로마로 돌아온 그는 기원전 187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기원전 187년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아이톨리아 동맹]]과의 전쟁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한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기원전 189년 집정관)|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가 아이톨리아 동맹과 전쟁을 벌이면서 잔혹행위와 약탈을 서슴지 않아 로마인의 명예에 먹칠했다며 개선식은 커녕 추방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조영관 시절 자신과 함께 임기를 수행한 노빌리오르 편을 들었고, 원로원 역시 노빌리오르가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 후 두 집정관은 리구리아인들과 전쟁을 벌였지만 플라미니우스는 나중에 질병에 걸려 로마로 귀환해 차기 고위 행정관 선거를 조직하는 임무를 수행한 후 후임자에게 지휘권을 넘겨줬다. 그는 집정관 재임 기간 동안 보노니아와 아레티우스를 연결하는 플라미니아 가도를 건설했으며, 식민도시 아퀼레이아 시 건설에 참여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