干朱里 (? ~ 557) 환도성 사람으로 [[고구려]] [[양원왕]] 대의 반역자. 557년 10월 환도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한 후 붙잡혀 처형되었다. 간주리의 난에 대해선 [[국내성]] 일대의 토착세력이 평양 일대의 귀족들에게 밀리자 주도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일으킨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이시기 고구려는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던 [[안장왕]]이 승하하고[* [[삼국사기]]에는 그냥 승하한 것으로 나오나 [[일본서기]]에서는 '''시해'''당한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일본서기 외의 여타 국내외 역사서와 교차검증되는 부분이 없거니와 본격적인 혼란기의 시작도 몇 십년 후인 [[안원왕]] 말엽부터이기에 확실한 사실이라 단정짓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안원왕]] 또한 후계자 문제로 귀족 간 내란을 겪는 등 대내적으로 불안한 상황이었다. 대외적으로는 551년 돌궐의 침공 및 동년 백제, 신라의 북진으로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신라에게 남옥저 진출을 허용하는 등 전쟁에서 잇달아 패배하자 간주리를 위시로 한 국내성의 귀족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간주리의 난의 여파로 양원왕 사후 즉위한 [[평원왕]]이 560년 [[졸본성]]으로 행차해 [[동명성왕]] 사당에서 제사를 올리는데 졸본성이 [[국내성]] 근방임을 생각하면 북방 귀족들에 대한 견제의 의미가 있는 걸로 보인다. [[분류:고구려의 인물]][[분류:55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