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임관]] [include(틀:장교임관과정)] [목차] == 개요 == [[대한민국 육군]] 초창기의 [[장교]] 양성 제도 중 하나. '''갑종장교''', 혹은 줄여서 '''갑종'''이라 한다. [[1950년]] [[1월]]에 창설돼 [[1969년]] 폐지됐으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 [[대한민국]] [[장교|국군 간부]]들의 요람이었다. 현재의 [[학사장교]]와 매우 닮은 제도로, 한마디로 학사장교와 갑종간부후보생은 둘 다 해외 군대 기준으로 보면 [[OCS]]에 해당되며, 장교를 최대한 빨리 육성해서 전장에 투입시키기 위한 용도로 운영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을종간부후보생]]은 [[부사관]]을 양성하는 [[제도]]였다. == 역사 == [[미군]]이 철수한 [[1949년]] 6월경 육군은 8개 [[사단]] 5개 [[여단]] 편제였다. 이중에서 장교는 도합 4,900명이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 110명, 조선경비사관학교 4,551명, 개별 병과학교 313명] [[초급장교]] 양성은 물론 현역 장교들의 재교육 목적으로 [[경기도]] [[시흥시|시흥]]의 제3군무예비훈련소[* 일제 시대 때 조선인 징병을 목적으로 만든 시설이었다.] 시설을 이용해 [[9월]]에 [[육군보병학교]]를 개교했다.[* 육군보병학교는 초급장교를 위한 신임장교 지휘참모과정(3개월), [[지휘관]] 및 참모능력 제고를 위한 [[대위 지휘참모과정]](3개월), 경찰간부반(2개월)을 운영했다.] [[1950년]] [[1월]]\ 6개월 과정의 초급장교 양성 과정을 추가로 개설했고 이것이 갑종간부후보생과정이다. 1기생은 현역/[[민간인]] 출신으로 387명, 4월에는 2기생 현역/민간인 출신 150명이 입교했다. 하지만 6월 [[한국전쟁]]으로 휴교하고, 간부 후보생들은 문산지구, 김포지구, 과천지구 전투를 돌며 대다수가 전사한다. [[육군보병학교]]는 [[8월 4일]]에는 [[대구광역시|대구]], [[8월 10일]]에는 [[경주시|경주]], [[8월 15일]]은 [[부산광역시|부산]] [[동래구|동래]]로 이전하는데 갑종간부후보생 1~2기를 다시 받아들여 1기는 [[7월 15일]]에 임관시키고, 2기는 [[9월 10일]]에 임관시켰다. [[9월]]에는 [[육군사관학교]]와 통합해 [[육군종합학교]]로 개칭했다. 갑종 3기와 50년 6월에 입교한 육사 2기는 [[9월 4일]]자로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해 6주간 교육 후 제1기로 임관하게 된다. 이들이 이른바 육종 1기이다. 육종은 [[1951년]] [[4월 15일]]에 입교하는 32기까지 총 6,987명이 임관했다. 한편 육군보병학교는 [[1951년]] [[2월]]에야 재개교해, 동년 [[10월]] [[전라남도|전남]] [[광주광역시|광주]] [[상무대]]로 이전했다. [[1951년]] [[4월 29일]] 다시 갑종간부후보생 3기를 모집해 [[1969년]] [[8월 30일]] 갑종 마지막 [[기수]]인 제 230기가 임관하기까지 총 45,424명이 임관했다. 6.25 동안 [[육군종합학교]]와 함께 전시 단기 육군 장교 양성을 담당했다. 53년 7월 18일까지 임관한 6.25 마지막 기수는 갑종 49기다. 갑종 1~49기는 총 10,550명으로 이중에서 2000 여 명이 [[전사]]하고 54명이 [[장성]]이 됐다.[* [[대장(계급)|대장]] 2명, [[중장]] 3명, [[소장(계급)|소장]] 19명, [[준장]] 30명. 장성진급자중 6.1%] 정리하자면 갑종 1,2기, 육종1~32기, 갑종3기~230기 순서로 임관했다. 평균 2주 단위로 입교해 약 6개월(24주) 교육을 받았으며 기수별로 평균 인원은 215명이었다.[* 기수별로 사병/하사관이 들어가는 일본식이었다가, 민간인 기수였다가, 사병/민간인이 섞인 기수등 계속 변동이 있었다.] 이들은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당시 많은 피를 흘렸는데, 6.25 전쟁 3년간 약 10,500명의 육군 장교들이 [[전선]]에 나가 2,000여명이 전사했으며, 베트남 전쟁 때는 참전한 육군 장교 22,000여명 중 14,700여명이 갑종 장교 출신이었다. 특히 갑종간부후보생 1, 2기 출신들은 교육기간 도중 [[6.25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이들 중 일부는 임관도 하기 전 [[사관후보생]] 신분으로 전선에 투입되어 전사한 [[사람]]도 많았으며, 수료증조차 받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2&aid=0000055754|참고 기사]][* 참고 기사에 언급된 갑종장교단중앙회 회장 박희모(육군 중장 예편) [[장군]]은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 측에 협력한 당시 [[제30기계화보병사단|제30보병사단]][[사단장|장]]이었고, 갑종장교 1기 대표인 하소곤([[소장(계급)|소장]] 예편) 장군은 당시 진압군 측에 있던 [[대한민국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수도방위사령부|수경사]] 부[[대한민국 국군 군사경찰|헌병]]단장이었던 신윤희 [[중령]]이 이끄는 [[장태완]] 장군 체포조의 한영수 [[대위]]가 쏜 [[총]]에 맞고 이후 강제전역당했다. 둘이 저런 자리에서 만나는 것도 참 어이없을 듯.] [[1969년]] 갑종간부후보생 제도가 폐지되고 이듬해 [[제2사관학교|육군제2사관학교]]와 [[육군3사관학교|육군제3사관학교]]가 설치됐다. 또한 [[학사장교|학사장교후보생]]와 [[단기간부사관]] 제도가 동시에 시작돼 오늘날까지 정착됐다. 갑종간부후보생 제도는 약자인 'KOCS'도 [[학사장교|학사장교후보생]] 약자 'KAOCS'와 흡사하고, 교육 특성 또한 같아 현 육군3사관학교 보다는 학사장교 제도의 전신이라고 본다. [[2006년]] [[11월 17일]] 갑종 222기 출신이었던 육군대장 [[권영기]] 장군(당시 [[제2작전사령부|제2]][[야전군사령관]])이 퇴역하면서 갑종 출신은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 기수 == ||<|2> 임관 [br] 년도 ||<|2><-10> [[기수]] ||<|2> 비고 ||<-3> 타출신 해당 [[기수]] || || 육사 || 3사 || ROTC || || 1950년 ||<-5> 1기 ||<-5> 2기 || || 육사 [br] 10기 ||<|32> 없음 ||<|25> 없음 || || 1951년 || 3기 || 4기 || 5기 || 6기 ||<-2> 7기 ||<-2> 8기 ||<-2> 9기 || || - || ||<|3> 1952년 || 10기 || 11기 || 12기 || 13기 || 14기 || 15기 || 16기 || 17기 || 18기 || 19기 ||<|3> ||<|3> - || || 20기 || 21기 || 22기 || 23기 || 24기 || 25기 || 26기 || 27기 || 28기 || 29기 || ||<-2> 30기 ||<-2> 31기 ||<-2> 32기 ||<-2> 33기 ||<-2> 34기 || ||<|4> 1953년 || 35기 || 36기 || 37기 || 38기 || 39기 || 40기 || 41기 || 42기 || 43기 || 44기 ||<|4> ||<|4> - || || 45기 || 46기 || 47기 || 48기 || 49기 || 50기 || 51기 || 52기 || 53기 || 54기 || || 55기 || 56기 || 57기 || 58기 || 59기 || 60기 || 61기 || 62기 || 63기 || 64기 || || 65기 || 66기 || 67기 || 68기 ||<-2> 69기 ||<-2> 70기 ||<-2> 71기 || ||<|4> 1954년 || 72기 || 73기 || 74기 || 75기 || 76기 || 77기 || 78기 || 79기 || 80기 || 81기 ||<|4> 92,93기 [br] 95,96기 [br] 98,99기 [br] 각각 동시임관 ||<|4> - || || 82기 || 83기 || 84기 || 85기 || 86기 || 87기 || 88기 || 89기 || 90기 || 91기 || || 92기 || 93기 || 94기 || 95기 || 96기 || 97기 || 98기 || 99기 || 100기 || 101기 || || 102기 || 103기 || 104기 || 105기 || 106기 || 107기 || 108기 || 109기 || 110기 || 111기 || || 1955년 || 112기 || 113기 ||<-2> 114기 ||<-2> 115기 ||<-2> 116기 ||<-2> 117기 || || 육사 [br] 11기 || || 1956년 ||<-10> 118기 || || 육사 [br] 12기 || ||<|2> 1957년 || 119기 || 120기 || 121기 || 122기 || 123기 || 124기 || 125기 || 126기 || 127기 || 128기 ||<|2> ||<|2> 육사 [br] 13기 || ||<-5> 129기 ||<-5> 130기 || ||<|2> 1958년 || 131기 || 132기 || 133기 || 134기 || 135기 || 136기 || 137기 || 138기 || 139기 || 140기 ||<|2> ||<|2> 육사 [br] 14기 || || 141기 || 142기 || 143기 || 144기 ||<-2> 145기 ||<-2> 146기 ||<-2> 147기 || || 1959년 ||<-3> 148기 ||<-3> 149기 ||<-4> 150기 || || 육사 [br] 15기 || || 1960년 ||<-2> 151기 ||<-2> 152기 ||<-3> 153기 ||<-3> 154기 || || 육사 [br] 16기 || || 1961년 ||<-3> 155기 ||<-3> 156기 ||<-4> 157기 || || 육사 [br] 17기 || ||<|3> 1962년 || 158기 || 159기 || 160기 || 161기 || 162기 || 163기 || 164기 || 165기 || 166기 || 167기 ||<|3> 168,169기 [br] 178,179기 [br] 각각 동시임관 ||<|3> 육사 [br] 18기 || || 168기 || 169기 || 170기 || 171기 || 172기 || 173기 || 174기 || 175기 || 176기 || 177기 || ||<-3> 178기 ||<-3> 179기 ||<-4> 180기 || || 1963년 ||<-3> 181기 ||<-3> 182기 ||<-4> 183기 || || 육사 [br] 19기 |||| 학군 [br] 1기 || || 1964년 || 184기 || 185기 ||<-2> 186기 ||<-2> 187기 ||<-2> 188기 ||<-2> 189기 || || 육사 [br] 20기 |||| 학군 [br] 2기 || || 1965년 || 190기 || 191기 || 192기 || 193기 ||<-2> 194기 ||<-2> 195기 ||<-2> 196기 || || 육사 [br] 21기 |||| 학군 [br] 3기 || || 1966년 || 197기 || 198기 || 199기 || 200기 || 201기 || 202기 || 203기 || 204기 ||<-2> 205기 || || 육사 [br] 22기 |||| 학군 [br] 4기 || || 1967년 || 206기 || 207기 || 208기 || 209기 || 210기 || 211기 || 212기 || 213기 || 214기 || 215기 || || 육사 [br] 23기 |||| 학군 [br] 5기 || || 1968년 || 216기 || 217기 || 218기 || 219기 ||<-2> 220기 ||<-2> 221기 ||<-2> 222기 || || 육사 [br] 24기 |||| 학군 [br] 6기 || || 1969년 || 223기 || 224기 || 225기 || 226기 || 227기 || 228기 ||<-2> 229기 ||<-2> 230기 || || 육사 [br] 25기 |||| 학군 [br] 7기 || == 진급 == [[광복]]과 6.25 전쟁 당시에는 국군의 장교 인력들이 많이 부족했기에 육군에선 갑종장교도 많이 뽑았고, 게다가 육사 초창기부터 10기까지는 4년제 출신도 아니어서[* [[해군사관학교]]는 육군보다 장교 수요가 적었던 [[대한민국 해군]]의 처지와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의 의지로 전시에도 교육 과정을 단축하지 않았다. 6.25 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잠시 해군[[사관생도]]들이 육전대로 편성되어 적 병력과 소규모 [[교전]]을 하기도 했으나, 금방 원복해 교육을 재개했다.] 오늘날과 같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갑종장교 출신이라고 육사 출신에게 기죽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이 때문에 같은 육사 출신이라 해도 4년제 육사와 2년제 육사는 [[차별]]이 극심해서, 후배들이 [[선배]]들을 뛰어넘어 [[진급]]하는 것이 일상다반사 였다. 그래도 [[전두환]]을 필두로 한 4년제 육사 첫 졸업생 패거리(육사 11기)였던 [[하나회]] 멤버들이 [[정권]] 잡기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갑종출신들은 장성급에도 잘 진급하고 꽤나 [[요직]]에 있는 경우도 많았다. 이 시기의 육사 생도들을 다른 기수와 비교하자면 [[실업계]] 출신인데 [[내신]]만 좋아서 입학한 기수 정도에 불과했다. 이 당시 육군사관학교 11기는 지금과는 달리 갑종간부후보생에게 입지가 밀려있었으며 [[2020년]] 기준으로 따지자면 거의 [[학사장교]]급 위상을 갖고 있었다. 갑종간부후보생이 육군사관학교 11기보다 위상이 높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게 이들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육사 11기가 [[생도]]이던 시절에 이미 현역 장교로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다만 육사 11기들 중에 드물게 6.25전쟁을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육사생도가 된 경우가 존재했다. 그래도 이 들을 제외하면은 위상 차이가 [[넘사벽]]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 육사 11기는 자신들이 [[공부]]를 못했던 것에 대한 콤플렉스로 이후 후배 육사출신 장교들 중에서 [[하나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일때 학업성적을 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하지만 그 후 하나회를 필두로 한 장군인사가 진행되고 육사의 위상이 올라간 뒤로 갑종은 무시받아 "갑종 출신으로 [[별]] 달았다"면 정말 드물고 대단한 케이스로 취급되게 되었다. 갑종장교 출신 중 약 200여명이 [[장성급 장교|장성]]으로 진급했고, 이들 중 5명은 [[대장(계급)|대장]]에까지 올랐다. 갑종 장교 중 [[6.25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등 참전 용사들이 많았기에 이들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다음가는 대접을 받았고, 육사 다음으로 장성에까지 오른 인원도 많은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압도적으로 많은 육사 출신 장성수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이었다. 특히 [[12.12 군사반란]] 이후 전두환이 하나회 중심으로 [[장군]] 자리를 정리하면서 갑종출신은 이후 천대를 받게 된다. 그래도 [[1990년대]]까지 육사 다음으로 많은 장성 자리를 차지한 장교가 갑종출신이었는데, 아무리 무시한다 해도 육사 출신이 무시 못할 만큼 쪽수가 받쳐줬기 때문이다. == 문제점 == 지원자 중 고졸 이상인 자는 갑종으로 분류하여 소위로, 중졸 이하는 을종으로 분류하여 을종은 [[하사|일등중사]]로 임관시켰는데, [[장교]]와 [[부사관]]의 역할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같은 [[훈련]]을 받고 [[학력]]을 차별해서 임관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큰 문제점이었다. 현재 육군 [[학사장교]]와 [[부사관후보생]]들의 교육 기간은 얼추 비슷하지만, 분명 훈련 교과목 편성 자체는 상당히 다르다.[* 학사장교는 배울 건 다 배우는데 부사관후보생은 학사장교가 배우는 것들 중에서 육군 기준으로 몇가지가 빠져있다. 그 과목들이 전쟁사, 북한군전술, 지휘통솔기법, 분소대전술 등이다. 부사관후보생은 이것들을 안배우는 대신 [[개인화기]], [[수류탄]], 편제화기, 화생방 등을 학사장교보다 더 많은 [[시간]]동안 훈련한다. 공군의 경우 장교 부서장 부재시 [[2인자]] 역할도 해야 하므로 지휘통솔기법이라던지 [[반]] 단위의 [[부대]] 운영 기법 같은 것들을 [[공군부사관교육대대|훈련소]]와 [[특기학교]]에서 배우고, 상사급 이상을 위한 부사관 고급 과정에서는 [[중대장]] 부재시 2인자 역할도 해야하므로 특기학교에서 [[중대]] 단위의 부대운영기법 같은 것도 배운다.] [[미 육군]]이 대졸자에게 신병 수료 후 [[상병]](Specialist) [[계급]]을 부여하나, 저 경우는 고학력자에 대한 일종의 학력인정에 따른 혜택이지, 동일 계급이지만 부사관으로 분류되는 코퍼럴(Corporal)이 아니다. 다만 상병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미 육군 부사관 [[신분]]인 코퍼럴[* 이 계급은 상병들 중 [[분대장]] 직책 등을 맡으면서 부사관 신분으로 분류되는 계급이므로, 이 계급을 거치지 않고 바로 서전트를 달 수도 있다.]이나 서전트(Sergeant)[* 국군은 공식적으로 이 계급이 육군의 [[병장]]에 대응된다고 명시해뒀지만, 실질적인 지위는 육군 [[하사]]에 가깝다.]로 고졸보다 진급을 빨리 할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당시 고학력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군 체계가 자리를 잡지 못한 과도기에서 볼 수 있었던 제도라고 할 수 있다. == 여담 == === 일제 시대 때 갑종간부후보생 제도 === [[일본 제국|일본]]의 '갑종간부후보생' 제도는 [[1927년]]에 시작되었다. 지원 자격은 [[구제중학교]] 졸업자, [[고등학교]] 고등과 졸업자, [[대학예과]] [[1학년]] 수료자로 소속학교 [[교련]] 검증 합격자에 한정하였다. 당시는 병역기간이 2년이었는데 [[간부후보생]]도 동일하였다. 일단 일반병으로 4개월 이상 재영한 이후[* 입대하면 6개월간 [[초병]] 교육을 받는데 약 3~4개월째 [[연대장]]에게 1기 검열을 받아 합격 해야지 [[일등병]]으로 승진하고 [[간부후보생]] 추천을 받을 수 있었다. 불합격 하면 다시 초병 교육을 받는다.] 간부후보생에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면 소정의 선발전형 후 3개월간 집체 교육을 거쳐 우수자는 갑종간부후보생(통상 [[고졸]] 이상), 그 이하는 을종간부후보생(통상 [[중졸]])이 되었다. 이후 예비사관학교에서 11개월간 집체교육을 이수 후 견습사관 4개월 근무를 하면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하며 전역하게 된다. 을종간부후보생은 육군교도학교 또는 [[연대]]에 설치된 하사관학교에서 자체교육 후 [[예비역]] 하사관으로 전역했다. [[중일전쟁]] 이전의 일본은 소수의 육군사관학교 출신들로만 소위들을 충당하였고, 평시에는 아예 [[소대장]] 제도 자체가 없어 신임장교들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고 [[T/O]] 대부분을 비워 두었다. 이 때문에 갑종은 [[소위]] 임관 후에 전역한다는 면에서 [[미군]]의 [[ROTC]]가 소위 [[임관]] 후 [[전역]]하고 전시에만 동원된다는 점과 비슷하다. 이런 갑종간부후보생 제도는 [[1938년]]부터 실시된 [[조선지원병]]에게도 문호가 열려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 지원병들은 대부분 [[보통학교]] 졸업이라 을종간부후보생으로 가게 된다. [[조선인]]은 높은 지원율을 뚫고 지원했기 때문에 [[일본어]]만 다소 딸릴 뿐이지 신체조건과 [[두뇌]]가 상대적으로 우수하였다. 조선인 간부후보생은 입영 4개월차에 소속부대 하사관 교육대에서 교육 받았고, 입영 1년차부터 육군교도학교에 입교해서 약 1년간 집체 교육후 [[오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때는 중일전쟁 시기라 예비역으로 전역 못하고 계속 군생활 했는데 오장 6개월, [[군조]] 1년, [[조장]] 2년[* 진급이 무지하게 빠른데 [[일본군]]은 하사관 [[월급]]이 적어 [[가정]]을 꾸릴 수 없어 지원자도 없으며, 평시에는 [[준위]]까지 달아야 [[정년]]이 40세일 정도로 짧았다. 즉 [[직업군인]]이 아니라 병생활의 연장이었다.]으로 일제 패망당시 조선인 지원병 1기생은 [[준위]], 2기생은 조장에 달했다. 조선인 1기생 [[현역]] 300명 가운데서 갑종 간부후보생은 2명, 을종 간부후보생은 30여 명이다. [[필리핀]](19사단, 30사단)이나 [[뉴기니]](20사단), [[버마]](49사단)에 끌려가 [[반자이 돌격]]하다 거의 다 죽었다. [[해방]] 이후 [[군사영어학교]]에는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 6명이 있었는데 갑종 간부후보생으로는 번개장군 이치업 준장이 일본군 소위 계급 이었고, [[최경록]] 중장, [[함병선]] 중장, 이백우 준장, 이춘경 준장은 을종으로 일본군 준위[* 최경록, 함병선은 갑종 간부후보생으로 준위가 된 것이라는 말도 있다.], [[송요찬]] 중장은 일본군 조장(조선지원병 2기임)이었다. 이들은 대졸자인 다른 군사영어학교생들과 달리 보통학교 졸업이라 [[학력]]이 심각하게 딸렸고 [[영어]]도 못했다. 송요찬 장군의 경우 석두장군이라고 불리며 괄시 받았지만, [[사단장]]이 될 때까지 [[영어사전]] 3권을 갈아 마시며 공부하여 극복해 냈다. 이후 조선경비사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로 넘어가면 [[문형태]] 대장, 이민우 중장, [[임부택]] 소장, 한웅진 소장, 고백규 소장, 김진위 소장, 서윤택 소장, 공국진 준장, 이상국 준장, 박노규 준장, 김용배 준장[* 학병출신 [[김용배]] 대장과는 동명이인. 지원병 김용배는 전사함], 이병우 준장 등 다수의 일본군 을종간부후보생 출신들이 있었다. 즉, 이들은 한국군 간부후보생이 아니라 [[일본군]] 간부 후보생 출신이다. == 출신 인물 == * [[유지광]] * [[이강석(1937)|이강석]] * [[김수영(군인)|김수영]](1기) * 라보현(1기) * [[마달천]](1기) * [[한병기]](1기) * [[류근환]](2기) * [[오자복]](3기) * [[정호근(군인)|정호근]](5기) * [[김진기]](6기)[* 동시에 육사 9기이기도 하다.] * [[https://ko.wikipedia.org/wiki/%EC%86%A1%EC%84%9C%EA%B7%9C|송서규]](7기) * [[이용희(1931)|이용희]](11기) * [[전경환]] * [[신치구]](22기) * [[정육진]](57기) * [[차지철]](74기) * 이태우(157기)[* [[39사단]]장, [[육군훈련소|제2훈련소장]] 역임.] * [[윤창로]](170기) * [[조영길]](172기) * [[정남기]](182기) * 윤천득(200기) * [[강기창(군인)|강기창]](202기) * [[정수성(1946)|정수성]](202기) * [[권영기]](222기) * [[장태완]] (11기) * [[조창호]] * [[지성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