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1 開闢}}} [[1920년]] 6월 창간되어 1926년 8월 폐간될 때까지 [[천도교]]에서 발행한 월간 잡지. == 상세 == === 역사 === [[3.1 운동]] 이후 [[일제]]가 이른바 [[문화 통치]]로 정책 기조를 바꾸며 조선인에 의한 [[신문]] 및 [[잡지]] 발행이 가능해지면서 개벽사에 의해 창간되었다. 개벽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박달성(朴達成)이었다고 한다. || [[파일:개벽 창간호.jpg]] || || 개벽 창간호. 포효하는 호랑이 그림으로 유명하다. || 그런데 정작 이 창간호는 [[검열]]에 걸려서 제대로 발간도 되지 못했다. 이에 개벽사는 임시호를 찍었지만 그것도 발매 금지를 얻어맞았고 결국 [[김기전]]의 시를 비롯해 [[총독부]]가 문제삼은 부분을 삭제한 후에야 [[호외]]로 겨우 간행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짤린 [[호랑이]] 표지는 1주년 기념호(13호)에 다시 사용되어 비로소 독자들에게 공개된다.[* '개벽' 하면 생각나는 컬러 프린팅된 호랑이 그림이 바로 13호의 표지이다. [[http://www.adanmungo.org/view.php?idx=5439|#]]] --발행인들도 그림이 아까웠나 보다-- 이렇게 창간된 뒤 초반에는 매월 25일에 발행하다가 1920년 11월(제5호)부터 매월 1일에 발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만, 민중 지향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잡지였기 때문에 [[일제]]에게는 늘 눈엣가시였다. --그야말로 [[민족정론지]]-- 그래서 총 72호를 발행하며 '''발매금지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라는 화려한 기록을 세웠고 1926년에는 결국 [[폐간]]되었다. === 특징 === 개벽사는 [[천도교]] 인사들의 재정적 후원을 기초로 설립하였기 때문에 [[동인지]]들과는 달리 원고료 지불이 가능했다. 때문에 개벽에는 수준 높은 외부 필진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또한 [[종교]] 계열 잡지임에도 천도교 홍보보다는 개방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근대 문물 소개와 민족의식 고취에도 주력하였다. 1922년에는 시사기사 게재도 허가받아 [[정치]], [[경제]], [[역사]], [[지리]], [[종교]], [[문학]]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을 다루며 종합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지면의 3분지 1가량에 문학 작품을 수록했던 만큼 [[현진건]], [[염상섭]], [[방정환]], [[김동인]], [[김명순]], [[김기진]], [[박종화]], [[김소월]], [[이상화]], [[이광수]]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다. 원래는 국민문학파 계열 작품들이 많았지만 1925년쯤 되면 [[신경향파]]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문예지가 아니었음에도 문학사 연구에서 중요한 잡지로 평가받는다. 인기도 확실히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조선일보]]가 개벽을 '''조선 잡지계의 패왕'''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publishDate=1921-05-04&officeId=00023&pageNo=2#|#]] 개벽사 자체 평가로는 창간 이후 4개월이 경과한 시점에 이미 독자가 1만 명에 육박해 다른 잡지들을 압도했다고 한다. === 폐간 이후 === 개벽이 폐간된 뒤에도 개벽사는 잡지사 경영 규모와 내용에 있어서 1920년대를 대표하는 회사였다. 개벽사는 1926년 11월 1일부터 개벽을 계승한 월간 잡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6306&cid=46668&categoryId=46668|별건곤(別乾坤)]]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별건곤은 일단 취미 잡지를 표방하기는 했으나 1920년대까지는 [[시사]] 기사도 자주 실었다. 그러다 1932년부터는 갑자기 가격을 10분의 1[* 50전에서 5전으로 인하했다. 참고로 개벽은 40전이었다.]로 내리며 본격적인 통속 잡지로 탈바꿈했으나 1934년 8월 통권 74호를 끝으로 종간했다.[* 개벽처럼 강제 폐간된 것은 아니다.] 이후 개벽과 별건곤 발행 당시 참여했던 [[차상찬]] 등이 1934년 11월부터 다시 개벽이라는 이름으로 잡지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예전 개벽을 계승한 잡지는 아니었고, 그마저도 얼마 못 가 1935년 3월 1일에 4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되었다. 이 뒤로는 다시 부활하지 못하다가 [[광복]] 후인 1946년 1월 [[김기전]]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개벽을 복간했다. 1926년에 폐간된 개벽을 계승하여 제73호부터 시작했으며 1949년 3월 25일까지 총 9호를 더 발행하고 제81호를 끝으로 자진 휴간하였다. --그리고 김기전은 [[납북]] 크리-- == 기타 == === 조선 10대 위인 선정 === 흥미롭게도 개벽지에서 [[1921년]] 5월 1일부터 6월 10일까지 [[조선인]]을 대상으로 '''위인 투표'''를 진행한 적이 있다. 개벽 제11호 85쪽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참고로 여기서 조선은 딱 이씨 조선 왕조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의미한다.{{{#!folding [ 펼치기 · 접기 ] >'''위대투표(偉大投票)''' >'''조선민족의 발전에 대한 최대 공헌자는 누구?''' > >[[한반도|우리의 사는 곳]]이라 하여 재어보니 그 면적 겨우 1만 4천여 방리(方里), [[한민족|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라 하여 세어보니 그 숫자 불과 2천여만, 반드시 커야 하고 많아야 된다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이 이에 이르면 뉘 능히 외로운듯한 느낌을 금할 자이냐. >속이지 말고 말하자. >만일 지금의 우리에게 한없는 권능과 솟아나는듯한 감격으로써 영원에 도움을 줄 혹 응원자가 있다하면 그 경행(慶幸)이 과연 하(何)타 하리오. >그러나 시(試)하야 금일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125&cid=41826&categoryId=41826|환구(寰球)]]를 돌아보면 어떠한가. >우리의 실제를 뒤져보고 뜨거운 느낌을 가질 자 누구며 비록 일시로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의 큰 생(生)을 위하여 자기의 소유를 희생키까지 그 느낌을 사실로써 나타내여 줄 자가- 다시 말하면 사실(事實)로써 응원을 줄 자가 누구인가. >오인(吾人)은 써하되 누구라도 다 아니라 하노라. >그러면 우리는 영원에 외로움을 면치 못할 것인가?. >참 의미의 응원자를 얻지 못할 것인가? >오호라 한 마리의 적은새[鳥]에도 오히려 그 짝이 있거니 2천만의 우리에게 어찌 그 벗이 없을까보냐. >있도다 있도다 확실히 있도다. >그 누구이냐? >[[한국사|4천년의 역사]]가 그이며 그 역사의 심혈을 지은 [[위인|기다(幾多)의 위대걸사(偉大傑士)]]가 곧 그이다. >모르거니와 그들의 영(靈)은 지금 넘치는 듯한 애린(愛憐)과 결연(决然)의 의력(意力)을 가지고서 우리의 땅 위를 휘돌을지니라. >자못 섭섭한 것은 우리 각자가 목석연(木石然)하야 그의 영감(靈感)에 접치 못함이며 그의 품속에 들지 못함 뿐이다. >오인(吾人)은 이에 느낌이 있어 이제 『위인투표(偉人投要)』라는 형식을 빌어서 과거 사천년간에 조선의 발전을 위하여 최대공헌을 행한 각방면의 위인을 탐구 소개하여서 감히 이천만 형제의 참 의미로의 응원자를 짓게코저 하나니, 동무여 당신도 오인(吾人)과 동감이거든, 아니 조선형제이거든 다투어 본사(本社)의 차거(此擧)에 관성(貫成)함이 있을지어다. >---- >□ 투표하실 이에게 > 一, 사상, 정치, 군사, 문학, 미술, 종교, 과학, 산업, 교육, 사회개선의 열 가지 방면에 대하여 최대공헌을 행하였다 인하는 위인 각 일인식(즉 사상에는 누구, 정치에는 누구 기타 무엇에는 누구누구라 기입할 것)을 선기하여 엽서로써 본사에 보내시오 > 一, 투표할 위인은 조선 상하 4천년 간의 역사에 나타난 이로 하되 현재 생존한 이는 기입치마시오 > 一, 이 투표는 본지의 독자임과 독자 아님을 묻지 아니합니다 > 一, 투표엽서에는 기 표면에 필히 『개벽사 편집부 위인투표계』라 주서함 > 一, 투표기간은 오월 일일로 육월 십일까지로 하며 투표의 결과는 본지 칠월호 지상에 발표함 > 一, 투표의 결과로 최대점을 얻은 각방면의 위인 즉 십인 본지 팔월호로 위시하야 축호로 기 일인식(式)의 최상세히 소개함 >---- >[[http://db.history.go.kr/id/ma_013_0110_0131|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부 표현은 윤문하였다.]}}} 개벽의 독자 여부와 상관없이 진행한 [[대중]] 투표였기 때문에 개벽사의 잡지 외에 다른 언론 매체에도 관련 [[광고]]가 실렸고,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길거리에도 광고가 붙었다고 한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publishDate=1921-05-04&officeId=00023&pageNo=2#|#]] 10개 부문에서 최고의 [[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한 명씩 택해 '''직접 적어서 엽서로 부쳐야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투표 참여자들은 당대의 [[지식인|식자층]]이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투표 결과는 다음과 같이 나왔다. ||<-6> {{{+1 '''개벽사 [[틀:개벽 선정 조선 10대 위인| {{{#333,#fff 조선 10대 위인}}}]] 투표 결과'''}}}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6> 참여자 수: ''' 2,305명 이상''' || || '''부문''' || '''위인명''' || '''득표수''' || '''부문''' || '''위인명''' || '''득표수''' || ||<|2> '''사상''' || [[이황]] || 1,492 ||<|2> '''종교''' || [[최제우]] || 1,239 || || - || - || [[원효]] || 563 || ||<|2> '''정치''' || [[이이(조선)|이이]] || 989 ||<|2> '''과학''' || [[서경덕]] || 892 || || [[을파소]] || 920 || [[정약용]] || 883 || ||<|2> '''군사''' || [[이순신]] || 1,100 ||<|2> '''산업''' || [[문익점]] || 697 || || [[을지문덕]] || 1,002 || 흘간(屹干) || 534 || ||<|2> '''문학''' || [[최치원]] || 978 ||<|2> '''교육''' || [[최충]] || 1,321 || || [[박지원(실학자)|박지원]] || 651 || - || - || ||<|2> '''미술''' || [[솔거]] || 1,320 ||<|2> '''사회개선''' || [[유길준]] || 360 || || [[담징]] || 985 || - || - || ||<-6> {{{-2 {{{#000000,#e5e5e5 ※ 응답수 100명 미만의 차점자는 공개되지 않음.}}} }}} || ||<-6> {{{-2 {{{#000000,#e5e5e5 [[http://db.history.go.kr/id/ma_013_0130_0280|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 대체로 현대에도 유명한 위인으로 생각되는 인물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100년 정도 시간차가 나는 만큼 현재의 인식과는 다른 면도 존재한다. * [[최제우]]가 [[원효]]를 제치고 종교 부문 최고 위인으로 선정되었다.[* 개벽 독자들 상당수가 천도교 교인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 미술 부문에서 [[김홍도]]를 위시한 조선 화가들이 보이지 않는다. * [[서경덕]]이 사상가가 아닌 과학자로 인식되었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이걸 밀고 있다.] * 현재는 인지도가 약한 [[유길준]]이 사회개선 부문 1위로 선정되었다. --투표수가 확연히 적은 건 넘어가자-- * 산업 부문에서 흘간(屹干)이라는 생소한 인물이 2위를 차지했다. 특히 '''흘간(屹干)'''은 사실 [[현대]]에 와서도 [[듣보잡|대체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인물인데, [[한국]]의 어떤 역사서에도 저런 인물은 나오지 않는다. 일단 [[간(군주)|간 자가 들어간 걸 봐선]] [[가야]]나 [[신라]] 쪽 인물인가 싶지만 한자가 일치하는 인물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로 싹 뒤져봐도 없다. 그런데도 1921년에는 534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위인]]이라고 투표를 했으니 --[[환빠|일제강점기에 유실된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흘간(屹干)의 간([[干]])이 우([[于]])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를 [[백제]]의 개국공신 [[흘우]](屹于)를 오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흘우라는 인물이 딱히 산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록이 없어서 확실하지는 않다. [[https://blog.naver.com/demon_illu/222121324953|참고]] == 참고문헌 == * [[https://kiss.kstudy.com/Detail/Ar?key=1971630|《개벽》지의 잡지사적 가치 연구]]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698990|잡지 《개벽》의 표지 이미지 연구― 민족주의적 주체와 정치의 기획을 중심으로]]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74927|조선 위인과 위인 전기의 기원 -개벽사의 조선 위인 투표와 "조선지위인(朝鮮之偉人)"(1922)을 중심으로-]] [[분류:1920년 설립]][[분류:1926년 해체]][[분류:천도교]][[분류:대한민국의 잡지]][[분류:일제강점기의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