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청 황제)] ---- ||<#00386a> '''건륭제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청의 황자)] ---- [include(틀:역대 청 황태자)] ---- }}}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86a 0%, #00386a 20%, #00386a 80%, #00386a)" '''{{{#fecd21 청 제6대 황제}}}[br]{{{#fecd21 {{{+1 고종 건륭제 | 高宗 乾隆帝}}}}}}'''}}} || ||<-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9c4acb9b1a34b829c11d3028f8ecfd1.jpg|width=100%]]}}}|| ||<-2> '''{{{#fecd21 묘호}}}''' ||'''[[고종]](高宗)''' || ||<|2> '''{{{#fecd21 시호}}}''' || '''{{{#fecd21 만주어}}}''' ||용캬하 황디[br]{{{+5 ᠶᠣᠩᡴᡳᠶᠠᡥᠠ ᡥᡡᠸᠠᠩᡩᡳ}}} || || '''{{{#fecd21 한자}}}'''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br]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 ||<-2> '''{{{#fecd21 한호}}}''' ||압카이 워혜허 한[br]{{{+5 ᠠᠪᡴᠠᡳ ᠸᡝᡥᡳᠶᡝᡥᡝ ᡥᠠᠨ᠌}}}[br]Abkai Wehiyehe Han || ||<-2> '''{{{#fecd21 칸호}}}''' ||텡그린 테트국센 칸(ᠲᠩᠷᠢ ᠶ᠋ᠢᠨ ᠲᠡᠳᠭᠦᠭ᠍ᠰᠡᠨ ᠬᠠᠭᠠᠨ)[* Tengryin Tedqügsen] || ||<-2> '''{{{#fecd21 연호}}}''' ||[[건륭#s-3|乾隆]][br]{{{+5 ᠠᠪᡴᠠᡳ ᠸᡝᡥᡳᠶᡝᡥᡝ}}}[br]건륭(압카이 워혜허) || ||<-2> '''{{{#fecd21 별호}}}''' ||십전노인(十全老人)[* 건륭제 자신이 자칭한 별호이다.(...)"10번의 전투에서 모두 이긴 노인"이라는 뜻인데,몇몇 원정은 득보다 실이 많은 것도 있고 대충 끼워 맞춘 것도 있다.] || ||<|3> '''{{{#fecd21 휘}}}''' || '''{{{#fecd21 만주어}}}''' ||아이신기오로 훙리(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ᡥᡠᠩ ᠯᡳ) || || '''{{{#fecd21 중국어}}}''' ||아이신줴뤄 훙리(愛新覺羅 弘曆) || || '''{{{#fecd21 한국식 독음}}}''' ||애신각라 홍력 || ||<-2> '''{{{#fecd21 생몰}}}''' ||양력 [[1711년]] [[9월 25일]] ~ [[1799년]] [[2월 7일]] (87세 4개월) [br] 음력 [[1711년]] [[8월 13일]] ~ [[1799년]] [[1월 3일]] (87세 4개월) || ||<-2> '''{{{#fecd21 신장}}}''' ||약 160~165cm[* [[https://new.qq.com/omn/20220407/20220407A0BLCD00.html|출처]] 당시 청나라를 방문한 영국인 매카트니의 기록에서는 건륭제의 키를 약 5피트 2인치(五英尺二英寸)(약 160cm)로 기록하였고 건륭제가 생전에 입었던 예복으로 추정하면 165cm로 건륭제의 건륭제의 실제 키는 약 160~165cm로 추정된다고 한다.] || ||<|2> '''{{{#fecd21 재위기간}}}''' || '''{{{#fecd21 황제}}}''' ||음력 [[1735년]] [[10월 18일]] ~ [[1796년]] [[2월 9일]] (60년 114일)[* 역대 중국의 군주들 중 강희제 다음으로 오랜 기간 동안 재위했다.] || || '''{{{#fecd21 태상황}}}''' ||음력 [[1796년]] [[2월 9일]] ~ [[1799년]] [[1월 3일]] ([[2년]] 328일)[* 태상황제의 재위 기간까지 합치면 63.24년 정도로 역대 중국 황제 중 가장 오랫동안 다스린 황제가 된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청나라.png|width=100%]]}}} || || '''{{{#000 청의 최대 강역}}}'''[* 빨간 선은 현재 중국의 영토이다.][* 동쪽의 [[흑룡강]] 이북 땅과 [[연해주]] 지역은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에 의해 [[러시아]]에 귀속되었고, [[외몽골]]은 1921년 [[소련]]에 의해 독립하였다.] || >'''[[강건성세|강건성세(康乾盛世)]]'''[* 강희, 옹정, 건륭을 거치며 이어진 청나라의 번영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이 강건성세는 건륭제 때에 절정을 맞이했다. 이시기 청나라는 중국 통일왕조 중 원나라와 더불어 최대의 판도를 이룩하여 중국의 인구는 명나라 때부터 유지되던 1억 선을 훌쩍 뛰어넘어 무려 4억에 달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매우 부흥하여 청나라는 전대에 확립됐던 지정은제의 영향으로 은의 블랙홀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갖추었다.] [[청나라]](淸)의 제6대 황제. 옹정제의 4남으로 할아버지 [[강희제]], 아버지 [[옹정제]]의 뒤를 이어 흔히 [[강건성세]]로 알려진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제이며 그의 치세 동안 청나라의 경제, 군사, 문화는 절정을 맞이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잦은 대외원정과 [[니오후루 허션]]으로 대표되는 황족과 관료들의 부패[* 뒤에 나오겠지만 황제 본인도 금불상 3만 개를 생일 선물로 받는 등 재산 축재에 골몰하여 타락한 모습을 보였다.]로 백성의 삶은 피폐해져갔으며 문화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청나라 정부에 비판적인 서적을 폐기해버리는 등 문화에 대한 탄압도 빈번히 일어나면서[* [[문자의 옥]]으로 한족들이 탄압을 당한 것 자체는 할아버지인 [[강희제]]와 아버지인 [[옹정제]] 때부터 이어져온 거였지만 최소한 이 두 황제는 문자의 옥으로 숙청한 대상도 거의 대부분이 반청복명을 추구하던 이들이나 부패한 관리들이었으며, 청나라의 번영에 도움이 되는 적절한 비판은 대부분 수용했다.(물론 옹정제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황위 정통성에 대한 시시비비 문제가 있었기에 사적인 용도로 사용한 측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러한 경우에는 최대한 죽이기보다는 회유하고자 하였다.) 반면 건륭제는 정당한 비판마저 반역 행위로 간주하는 막장 행각을 보이면서 정작 청나라의 번영에 걸림돌이 되는 부패한 관리들은 숙청하지 않고 방치한 탓에 결과적으로 청나라의 지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일반 백성들이나 청렴한 관리들에게 피해를 주었으므로,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해 질이 나쁘다.] 결과적으로 청나라 멸망의 씨를 뿌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대 학계의 평가 역시 명군인지, 암군인지, 성군인지, 폭군인지로 갈리지만, 대체로 선대에는 못 미친다는 의견이 대세이며, 여러 모로 전한의 [[한무제|무제]]나 명나라의 [[영락제]], 프랑스의 [[루이 14세]], 인도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와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모두 외정에 집중해서 당대부터 후대까지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주며 찬란한 전성기를 상징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면에서 국가의 내정에 악영향을 끼친 왕들이다. 건륭제 역시 이들처럼 선대의 강희제와 옹정제에 비해 중국 내외에서 평가가 좋지 못한 편.] 청 황제들 중 유일하게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황제이기도 하다. 물론 퇴위 이후에도 3년간 상황으로 지내며 사실상의 황제로 군림했으며 89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일을하다 시간이 나면 무조건 시를 왕왕 썼다.그러나 양이 많아서인지 전부 어법도 일치하지 않는 쓰레기 시였다고 한다. == 일생과 치세 == [[파일:external/a0.att.hudong.com/01300000110309123563232701275.jpg]] 갑옷을 입은 건륭제. 이탈리아의 선교사 카스틸리오네가 서양식 화법으로 그렸다. [[파일:external/a3.att.hudong.com/01300000565649125906774083688_s.jpg|width=400]] 청년기의 모습. 1736년 건륭 원년에 그린 것으로 그의 나이 26세 때 모습이다.[* 건륭 왼쪽에는 아내인 [[효현순황후]]가 그려졌고, 이 그림은 부부 합동 초상화이다.] 위의 두 그림은 [[카스틸리오네]]가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파일:清_郎世宁绘《清高宗乾隆帝朝服像》.jpg|width=500]] 즉위 초기의 어진. [[청나라]]의 6대 황제. 선대 황제인 [[옹정제]]의 아들로, 1711년에 태어났다. 1735년 옹정제가 57세로 붕어하자 25세로 제위를 이었으며, 60년이나 재위하며 [[중국]] 역사상 [[강희제]] 다음으로 오랫동안 재위하였으며, 이 시기에 청제국의 국력은 사상 최강, 국토 역시 사상 최대에 달하였다. 건륭제는 청 역사상 유일하게 스스로 퇴위한 황제이다. 이는 건륭제가 존경하는 조부인 강희제의 61년 치세라는 대기록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1795년 재위 60년만에 퇴위하여 상황(上皇)이 되었다. 이에 따라 [[가경제]]가 다음 황제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건륭제는 퇴위 후에도 권력을 아들한테 주지않았고 말이 상황이었지 실제로는 황제나 다름없어 사실상의 실세로 군림하였다. 가경제가 부패로 악명높은 건륭제의 총신 [[니오후루 허션]]을 건륭제가 죽은 뒤에야 처벌한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건륭제는 퇴위 4년 만인 1799년에 89세로 붕어하였다. 일부 중국 학자들은 건륭제가 정치 실권을 쥐었음을 들어 현직 황제로서의 60년에 상황으로서의 4년을 더해 64년으로서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쥔 황제로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황제가 되기 전 == 건륭제가 태어난 해는 강희제의 치세가 50년에 다다랐을 때였다. 건륭제는 (미래에 옹정제가 되는) 윤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건륭제의 어머니 [[효성헌황후|희귀비 니오후루씨]](熹貴妃 鈕祜祿氏)는 만주인이지만 정실 황후가 아닌 후궁이었다.[* 기록에 따라서는 건륭제의 생모는 효성현황후 니오후루씨가 아니라 '''전씨'''라고 설명하지만,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이라고 보는 편이다.] 건륭제는 황자들의 교육 기관인 상서방(上書房)에서 공부를 했지만, 당시 강희제의 아들들은 20명이 훌쩍 넘었고 손자들까지 따지면 100명에 육박했다. 당연히 강희제가 얼굴조차 기억 못 하는 자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건륭제는 금방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보였다. 문재가 탁월했고 사서삼경에 통달했으며 사냥에서도 용감하게 곰과 싸워 곰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강희제는 건륭제를 칭찬하며 관심을 기울였고, 늙은 몸이었지만 손자에게 직접 학문과 무예를 가르쳐주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강희제의 마음에 가장 드는 것은 건륭제가 부모님인 옹정제와 적모(嫡母)인 효경헌황후, 친어머니 효성헌황후에게 꼬박꼬박 예를 다하며 문안을 올리는 것이었다. 유교 가르침에 감화되고 가족간의 정을 소중하게 여긴 강희제에게는 대단히 좋게 보일 수밖에 없는 광경. 이렇게 수많은 손자들 중에서도 건륭제를 유독 아꼈던 강희제는 죽기 직전, 황위를 물려준 옹정제에게 건륭제를 후임으로 삼으라고 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왕조 실록 경종 시대에 사신이 가져온 강희제 전위 조서에서도 실린다. (덤으로 저 오랑캐 놈들이 아직 태자를 정하지 않았으니 한바탕 쌈박질하지 않겠냐는 호조판서 이태좌의 첨언까지도 있다. 옹정제 등극 전 일어났던 암투를 생각하며 이런 예상을 한 모양이었지만, 홍력이 너무 압도적이라 홍시는 뻘짓만 하다 몰락하고 홍주는 알아서 대권에서 멀어지는 길을 택해서 현실이 되지는 않았다.) 실록에는 '윤진의 제2자는 영웅의 기상이 있으니 반드시 봉하여 태자를 삼도록 하라' 했다고 전해지는데, 홍력보다 앞서 태어난 형들은 셋째인 홍시를 제외하면 강희 연간에 모두 요절했으므로 홍력을 2자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건륭제 역시 자신에게 후계자의 가능성을 열어 준 사람은 강희제였기에 일평생 동안 강희제를 대단히 존경했다. 강희제의 초상화를 보면서 자신을 다잡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재위 60년에 상황으로 물러난 이유도 강희제의 재위 기간보다 더 오래 통치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에 따라 이후 아버지 옹정제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건륭제는 차기 황제 1순위가 되어 후계자는 이미 정해졌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옹정제의 아들은 총 10명이었지만 그들 중에 생존한 아들은 고작 4명으로, 장성한 아들은 셋째 홍시, 넷째 홍력, 다섯째 홍주 셋 뿐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옹정제의 재위 중 태어난 젖먹이였던 10황자 홍염 뿐이었다. 또한 다른 황자들의 생모는 한인 출신이었지만 홍력만이 유일하게 만주족 생모 소생의 황자였다. 실제로 건륭제는 아버지 옹정제의 가벼운 일을 도우며 정치에 관여했다. 강희제 때의 황태자 사건과 만주족의 전통 등의 요인으로 청나라는 다른 왕조들과 달리 차기 황제를 미리 정하지 않았지만 당시 3황자 경패륵 홍시는 패륵에 불과했는데 넷째 홍력만 혼자 군왕도 뛰어넘어 보친왕에 책봉되는 등, 거의 대놓고 옹정제가 홍력을 황태자이자 후계자로 대우하였고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렇듯 홍력의 위치가 공고해 보이자 3황자 홍시는 판세를 바꿔보려고도 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옹정제의 눈 밖에 나는 결과밖에 되질 못했다. 결국엔 셋째 형 홍시는 사사당하고 황실 선원보에서 제명된다. 다섯째 홍주는 일찍부터 정치와 멀리하고 형에게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건륭제 즉위 후에도 상당히 예우받았다.[* 홍주는 그야말로 개망나니짓을 저지르면서 수차례 사고를 쳤지만 형인 건륭제가 감싸준 덕분에 별 탈없이 잘 먹고 잘 살다 가버렸다.] 옹정제는 워커 홀릭이었던 터라 재위 10년차에 건강이 악화되어 앓아눕게되자 홍력은 실질적으로 황태자나 다름없는 감국(監國)에 임명[* 감국은 나라 전반을 감독하라는 특별 직책으로, 섭정으로 봐도 무리가 없으나 섭정왕이라는 타이틀은 이때까지 온전히 복권되지 못하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라는 영 거시기한 예가 있어서 다른 직책명을 쓴 듯 하다.]되며 사실상 옹정제의 업무를 상당 부분 떠맡았다. 3년 후 옹정제가 붕어하자 후계자는 당연하게도 홍력의 차지가 되었다. 그렇게 건륭제는 25세의 나이로 청나라의 황제에 즉위한다. == 재위 기간 == 건륭제의 제위기간은 매우 길어 60년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건륭제는 죽어서 재위가 끝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강희제]]의 61년 대기록을 깨고싶지 않았기에 자발적으로 황제일을 그만두었다. 그 이후 자신의 아들인 영황귀비 소생 [[가경제]]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었으나 3~4년동안은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었기에 사실상 재위 기간은 64년이라 보아도 무방하다.재위기간동안 일어난 자세한 일들은 밑 문단에서. === 개혁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Qianlong_Horse.jpg|width=550]] * 백마를 조공품으로 받은 건륭제 건륭제는 황제가 된 후 그가 존경하는 [[강희제|할아버지]]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건륭제는 여러 차례의 원정을 벌였는데 대부분은 강희제처럼 최고 지휘관으로 활약하기보다는[* 다만 강희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야전 사령관으로 활약한 것은 [[준가르]]의 갈단 칸 정벌 때뿐이다. 그리고 친정할 이때에는 갈단이 동으로 공격해와서 외몽골지역을 점거하여, 청의 북변을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장군들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독려를 하는 편이었다. 이때 건륭제의 부대는 [[팔기군]] 대신 만주족과 한족이 합쳐진 군대였는데, [[준가르]] 정벌군 총사령관이었던 보르지기트 반디(Borjigit Bandi, 博爾濟吉特 班第), [[준가르]] 및 동투르키스탄 정벌에서 활약한 우야 자오후이(Uya Jaohui, 烏雅 兆惠)[* 1706~1762. 작위는 1등 무용공 겸 3등승은공. 3등승은공이라는 작위에서 알 수 있듯이 자오후이의 고모할머니는 [[옹정제]]와 순근군왕 윤제의 생모인 [[효공인황후]]다. 즉 건륭제와도 6촌 관계], 아구이(Agui, 阿桂), 건륭제의 처남인 푸차 푸헝(Fuca Fuheng, 富察 傅恒), 그의 아들인 푸차 푸캉안(Fuca Fukanggan, 富察 福康安)[* 여담이지만 황제의 딸에 등장하는 이강과 이태가 복(福)씨로, 극중 영비의 사촌 친정(즉 영비가 이강과 이태의 이모 뻘)으로 나온다.] 등이 활약하였다. 건륭제는 옹정제 때 탄압받은 숙부들을 사면하였는데, 종친들이 정치에 끼어드는 것만은 막았다.[* 이는 종친들이 정치에 끼어들어 제위쟁탈을 벌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에는 보갑제(保甲制)와 이갑제(里甲制)라는 제도를 뜯어 고쳤다. 보갑제는 100 가구를 모아서 갑(甲), 그리고 그 10개의 갑을 모아 보(保)로 나누어 같은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끼리 서로 질서와 치안의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였고, 이갑제는 보와 갑에서 세금을 인구에 따라 모아서 재정을 충당하는 제도였다. 본래 [[북송]]의 [[왕안석]]이 신법으로 쓰려다가 수포로 돌아간 이후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이후 강희제가 부분적으로 시행하다가 옹정제 때에 들면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보·갑의 장들은 자신이 맡은 구역의 백성들의 호적을 조사하고 그 기록을 관아에 바쳤고 수상한 촌민들을 감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고 뒤로는 세금을 무겁게 매겨 막대한 사익을 취하자, 1740년(건륭 5년), 건륭제는 정확한 인구 조사를 위해 각지의 보·갑장에게 가구당 세는 사람의 수를 군역을 지는 장정이 아닌, 집안의 여자들까지 모두 다 계산하였는데 계산한 백성들의 수는 나이, 성별과 이름을 패에다 적어 각자의 집 문 앞에 걸어놓고 매년 인구 조사를 하여 북경의 군기처와 호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건륭제는 청나라의 총 인구 수를 보다 정확히 알게 되었고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여 사익을 취하려 한 경우를 차단하여 또한 이를 방치하거나 세금을 빼돌린 총독이나 순무에게도 중징계를 내려 특히 이 중 그 행태가 심한 자는 참수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95px-The_Qianlong_Emperor%E2%80%99s_Southern_Inspection_Tour.jpg]] * 건륭제의 남순 강희제처럼 건륭제도 남순을 자주했다. 이때 건륭제가 한번 움직이면 기본으로 황제를 보좌하는 황자와 공주, 대신, 환관, 시녀, 요리사, 호위병 등 3,000여 명이 움직였다. 남순을 할때 건륭제는 유명한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풍류를 즐기는것을 좋아했다. 특히 시와 그림을 좋아하며 관심이 많았기에 이때 유명한 시인과 화가들도 초청해서 같이 식사하고 차를 마시면서 시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강희제는 남순은 자주 했어도 예산을 철저하게 짜서 백성들의 부담은 없었는데,[* 최소한의 인원으로 편성해서 최대한 조용한 방식으로 갔다왔으며, 지나가는 길에 총신들의 집에서 유숙하는 방식으로 비용을 아꼈다. 이에 강희 말년 부정부패에서 위동정이라는 총신이 이 비용을 부담하느라 국고에서 돈을 빌렸다가 큰일이 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강희제는 [[내탕금]]을 써서 위동정의 돈을 갚아주었다.] 건륭제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신나게 놀고 없으면 다시 돈을 여기저기서 마련해서 계속 움직이는 식이라[* 이는 건륭제의 남순이 단순 순방이라기보다 여행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부담이 극심했다고 한다. 때문에 보다 못한 신하들이 남순을 자제하라고 간언했고 이 간언에 화가 난 건륭제가 신하들한테 화를 내는 등 남순을 하는 일로 갈등했다. 그러고 훗날 사서 등을 편찬할 때 자신의 남순을 [[강희제]]의 남순, 사냥 원정[* 강희제는 몽골 귀족들을 모아 놓고 사냥으로 군사 훈련을 병행했는데, 청나라의 부와 번영을 과시하고 청에 대한 몽골 귀족들의 충성심을 유발하기 위해 시행했다. [[강희제]]의 유조에 남아있는 사냥에서 어쩌구~는 이 사냥 원정의 결과물들이다. 강희제 시기에는 산해관 입관 이전까지의 정책적 영향과 조모였던 몽골 출신의 효장문황후가 생존하였고, [[삼번의 난]]으로 북변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이후 갈단의 공격에 외몽골의 부족들이 남하하면서 이들에 대한 충성을 받아야 하는 등의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건륭제 시기에는 변방이 안정되어 그런 것들이 거의 없었고,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았다.]과 비교하며 정당화하는 한편 부정적인 의견은 없애는 엄청난 정치 공작을 펼쳤는데, 이걸 보면 자신도 이 행위가 정상적이거나 당연한 합리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인 결과들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 십전 무공 === 건륭제는 60년의 치세 동안 총 10회의 원정을 수행했다 하여 자신의 별호를 십전노인(十全老人)으로 자칭하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실 몇 개의 원정은 하나의 원정을 10이라는 숫자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쪼갠 것에 가깝다.[* 준가르 2회, 위구르 1회, 진촨 유역 2회, 대만 반란, 베트남, 미얀마, 그리고 네팔 샤왕조 2회] 이 10회의 원정은 [[위구르]]나 진촨(金川) 유역처럼 현재의 중국 영토인 곳으로 감행한 것도 있으며, [[베트남]]이나 [[미얀마]]처럼 외국에 감행한 것도 있었다. 어쨌든 총 10회의 원정으로 건륭제는 [[원나라]] 다음으로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이룩하였으며, 그 영토는 현재의 [[캐나다]]보다 큰 약 1,300만㎢에 달한다. 이 시기 청나라의 판도 하에 있던 인구는 무려 3억을 넘었다. 이 당시 건륭제의 최대 업적은 바로 [[준가르]]의 복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강희제]], [[옹정제]] 때부터 이어져 온 청나라 최대의 위협 세력인 준가르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함과 동시에 청나라의 국경을 신장 일대까지 넓혔고, 또한 이후 대금천과 소금천을 완전히 굴복시키는데 성공하고 [[네팔]]을 정벌하여 티베트 서부 국경을 안정시킴으로써 청나라와 그 뒤를 잇는 현대 [[중국]]의 서부 국경을 확정한 것은 건륭제의 온전한 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만]]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이 신강의 면적은 한반도의 10배 가까이 되며, 만주와 맞먹는다. 현재 중국 영토의 1/6을 늘려놨다. 하지만 이 지역은 후에 이슬람교도의 난이 벌어지기도 하며, 100년 후에는 [[야쿱 벡]]이라는 중앙 아시아의 모험가가 침입해서 난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19세기 안 그래도 흔들리는 청나라의 혼란을 더 증폭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건륭제의 정복 전쟁이 반드시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었는데, 남쪽의 [[버마]]와 [[베트남]]([[후 레 왕조|여왕조]]) 정벌에 있어서는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형과 전염병 등의 문제로 인하여 [[광중제|완혜]]에게 패하고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형식적인 복속을 얻어내는 데 그쳤다. 게다가 이러한 정복 전쟁을 위해 건륭제는 막대한 군비를 소모하여 이는 청나라의 국가 재정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슷한 케이스로 [[요나라]]가 있다. 요나라 또한 [[고려-거란 전쟁]]에서도 처참하게 패한 후 고려를 형식상 요나라의 제후국으로 만들었을 뿐 상국으로서 고려를 일방적으로 찍어누르지는 못했다. 송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제압하는데 실패하여 송나라를 제후국이 아닌 형제국으로 그치게되었다. 나중에는 발해 멸망, [[발해부흥운동]] 진압, 고려-거란 전쟁 등 한민족과의 오랜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와 군사력을 소모하는 바람에 결국 요나라의 국가 재정과 인력 문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단, 고려를 공격하는 와중에 발해멸망 이후 압록강 서안에 자립하고 있던 여진족들을 복속시켰으며,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거란의 황제가 동생이 되었지만, [[소태후]]가 송황제의 숙모가 되면서 가장 윗자리를 가지면서 막대한 세폐를 지급받으면서 경제적 풍요를 가지게 되었다. 오히려 거란의 멸망은 정치체제 자체적인 결함--남북면관제 시행으로 호한융합을 꾀하였지만, 사실은 북면관인 거란인들이 군사적 업무를 담당하며 상위에 존재--과 세폐로 인한 경제적 풍요에 거란인들이 무사적인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곳, 그리고 황실 내부 권력 암투 속에서 찾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또한 이러한 점은 [[수나라]]도 비슷한 편이다. 수나라 역시 [[문제(수)|수문제]]까지는 정치가 잘 발전되어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양제(수)|수양제]] 이후 잦은 원정으로 수나라의 영토를 넓혔고 왠만한 나라들을 복속시켜 수나라의 부하처럼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긴 군사원정은 후기로 갈수록 국력이 약화되고, [[고구려]] 침략에 대한 집착과 [[명군]]이자 [[성군]]인 [[영양왕]]과 [[명장]]인 [[을지문덕]]과 [[영류왕]] 고건무가 있는 [[고구려]] 원정에 실패를 하면서 역으로 수나라만 더 심해졌다. 통일하여 대국을 만들고 웅장하고 온화한 문화를 만들었음에도 지나치게 잦은 군사원정은 훗날 [[대운하]]를 다시 공사 및 억지로 빨리 완성시켜 백성들과 일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준 것과 더불어 단명왕조가 되는 원인이 되고 말았고 훗날 수나라가 망한 후 수나라 전역은 빈 공간처럼 되다가 훗날 [[당나라]]가 차지했다. 그나마 건륭제는 강남 유람을 즐겼을지언정 [[진(영성)|진나라]]의 [[만리장성]]이나 수나라의 대운하처럼 무리한 대규모의 공사 작업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폭정도 [[양제(수)|수양제]]나 [[시황제|진시황]] 같은 폭정까지는 아니었다. 준가르부에 대한 학살문제가 있긴 하지만, 현대가 아닌 전근대 시절의 학살은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 === 말년 === [[파일:고종말년Qianlong-alt2.jpg]] 말년의 건륭제 건륭제의 치세 후기에 총신 [[니오후루 허션]]이 막대한 축재를 감행하였고 이를 건륭제가 눈감아 주어 순식간에 청나라의 관료 사회는 부패하게 되었다. 허션이 해먹은 게 당시 청나라 20년치 예산에 맞먹는다고. 심지어 건륭제 본인도 말년에 생일 선물로 '''금'''불상 3만 개를 받는 등 재산을 모으는 데 골몰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곧바로 민생에 나쁜 영향을 주어서 건륭제가 퇴위한 이듬해인 1796년에는 한족 백련교도의 난이 발생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쇠퇴의 조짐은 보다 일찍부터 있었는데, 이미 1774년 백련교도 왕륜(王倫)이 난을 일으키다 진압된 바가 있고, 1786년에도 대만의 임상문(林爽文)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건륭제 말년의 문제들은 [[가경제]]와 [[도광제]] 대에 고스란히 짐이 된다. 건륭제는 태상황으로 퇴위하고도 권력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는데 국정에 대해서는 절대 소홀히 하지 않고 정무를 처리하며 조정에 자주 참석했다. 그러나 말년에 가면 건륭제의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기 시작했고 피접을 여러번이나 갔음에도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 건륭제는 70대에 접어들면서 건강이 나빠졌는데 수면이 줄거나 아예 일어나지 못하고 늦잠을 자는 일이 많아졌으며 왼쪽 눈의 시력이 나빠져서 잘 보이지 않고 건망증까지 심해졌다.] 결국 1799년 2월 7일에 건륭제는 자금성의 양심전에서 세상을 떠난다. 사후 그의 장례를 아들 가경제가 국상으로 성대하게 치루며 시신을 청동릉에 매장했다. 여담으로 건륭제는 무려 8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이는 중국 역대 황제들 중에서 가장 장수한 축에 속한다. 역대 중국의 황제들은 혹독한 업무로 인한 과로나 스트레스 혹은 궁중 생활에서 비롯된 비만과 질병 등의 문제 때문에 의외로 수명이 길지 못해서 40~50세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암살당하거나 살해된 황제들도 많다.] 이에 반해 건륭제는 하루에 식사를 두 끼만 먹었으며[* 사실 한번에 3끼만큼 많이 먹었고 중간에 간식을 먹기도 했다.] 콩과 나물류 등의 채식과 생선을 위주로 한 소박한 음식과[*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두부와 생선조림이었다.] 제비집 요리를 즐기는 등[* 다만 그렇다고 고기를 안 먹은 것은 아니고 닭고기, 오리고기, 양고기로 만든 요리를 좋아했다. 오리알과 거위알도 좋아해서 자주 먹었다.], 극히 절제된 식습관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이 장수의 한 비결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조선에서 가장 장수했던 국왕인 [[영조]]와도 흡사하다. 영조 또한 채식을 좋아하며 규칙적이면서도 매우 절제된 식습관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이 장수의 비결로 손꼽힌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일중독자였던 조부와 아버지에 비하여서 여유를 가지고 놀았던 것도 장수의 비결이지 않을까 한다. 왜냐면 조부와 아버지, 특히 '''아버지 [[옹정제]]'''의 행적은 그야말로 과로사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옹정제는 과로사했다. 특히 명나라 주원장이 만든 권력 제도[* 명나라의 멸망으로 그냥 사라진 게 아니라 청나라에서 상당부분 계승했다.]에서 황제의 일은 사실 제대로 한다면 쉴 시간이 없어야 정상이다. === 문화 정책 === ==== 예술 애호 황제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Qianlong11.jpg]] 시상을 떠올리는 건륭제.[* 아이러니하게도, 한족들의 [[한푸]] 착용을 금지한 것과 반대로 만주인 귀족들이랑 심지어 청의 황제들은 한푸를 입고 생활한 적이 제법 많았다고 한다. ~~정작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중화권 사극]]의 만주족 캐릭터들은 만주족 복장을 한 모습만 나온다는 게 함정.~~ 물론 [[변발]] 풍습은 청이 망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지만, 대신 시대가 흐르면서 청나라의 변발도 점차 머리를 덜 밀어내는 형태로 변해갔으며 그로 인해 청나라 말기에는 청나라 변발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 타입인 음양두가 보편화되기에 이른다.] --손이 참 곱다-- 참고로 이 그림은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이자 청나라 궁정 화가였던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중국 이름은 낭세녕)가 그린 그림이다. 청나라는 황실의 사치로 멸망한 전대의 명나라를 항상 [[타산지석]]으로 삼아 대체로 황제들도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였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도 새 왕조가 개창하면 대체로 옛 왕조의 왕궁을 사용하지 않고 새로 지었으나, [[도르곤]]과 [[순치제]]는 명나라의 황궁인 자금성을 그대로 청나라 황궁으로 사용했다. 그 뒤를 이은 강희제나 옹정제는 검소함으로 유명했고, 예술을 즐길 시간도 없이 정사만 몰두했다. 하지만 건륭제는 이런 청교도적인 선대 황제들과는 달리 노는 것을 좋아하고, 예술을 애호하여, 예술품을 광적으로 수집했으며 본인 스스로도 서예나 서화에도 능했고 시도 즐겨 지었다. 건륭제는 유명한 예술가들을 후원하거나 황궁에 초청해 [[다회]]를 여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런 예술가들은 초청받은 댓가로 황제 앞에서 글씨나 그림을 남겨 기증해야했지만, 그림값 명목으로 두둑한 은자나 값비싼 다기를 받아왔으니 딱히 [[재능기부]]를 한 것은 아니다. 건륭제는 이렇게 초대된 예술가들에게 마음에 든 걸작품을 팔거나 기증하라고 떼를 썼고, 예술가들은 황제의 간청을 거절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한 당대의 이름난 서예가나 화가들은 걸작을 그렸을 경우 두 벌을 마련해 황제가 달라고 했을 때 복제본을 진상했다고 한다. 건륭제의 글씨과 그림은 이렇게 수준급이라 여러 작품이 남아 있다. 건륭제의 글씨는 송나라 시대의 [[왕희지]], [[미불]],명나라의 [[동기창]]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명필이라고 불릴만 했다. 문제는 본인의 글씨에 너무 자부심이 많아서, 자신이 수집한 여러 명화에 작품에다가 자신이 직접 감상평이나 시를 남겼는데, 하필이면 건륭제의 시재는 필체에 미치지 못한지라 후대에 이는 [[반달리즘]]으로 간주되고 있다. [[파일:external/www.npm.gov.tw/m3_7pic_6s.jpg|width=20%]] [[내탕금]]을 써서 저명한 고서화들을 많이 수집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자신은 '''고서화의 운치를 망쳐버린''' 인물로 악명이 자자하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중국화 학자로 유명한 마이크 설리번이 '''탐욕스러운 미술 수집가이자 빈약하고 독단적인 감식안의 소유자'''라고 비꼬았을 정도. 왼쪽 작품은 건륭제가 망쳐놓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원대의 화가 방종희의 "고고정도(高高亭圖)"인데, 운치 있는 절벽을 그려놓은 작품에 눈에 확 띄는 최상단 중앙부에다가 '''떡하니 자기 인장을 찍어 놨다.''' 덕분에 고고정도를 감상하는 사람은 그림 자체보다 건륭제의 큼지막한 인장이 먼저 눈에 들어올 정도. [[파일:external/ortus.webnow.biz/m534.jpg|width=600]] --세상에-- 조맹부의 걸작인 위쪽의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에도 건륭제의 흔적이 많은데 여러 도장을 찍고 시를 적는 등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는 [[북송]]의 [[휘종(송)|휘종]]이 직접 그린 "계산추색도"라는 걸작을 수집하고 나서, 상술한 "고고정도"에 찍힌 것과 동일한, 큼지막한 인장을 찍어놓고, 여러 자잘한 인감을 찍은 뒤, 좌측 상단부에 자신의 엉터리 시까지 적어놓았다.[[https://twitter.com/youweiwanxiang/status/1128984897811492865|#]] 사실 고서화는 도장이 많이 찍혀있는 것들이 많은데, 대부분 그림이 다른 수집가에게 넘어갈 때마다 그림의 새 주인이 기념으로 찍어놓은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안평대군]], [[신숙주]], [[박연]], [[김종서]] 등이 모두 그림에 감상평을 적어 놓은 것에 보듯이, 유명한 문인들이 명화에 자신의 감상평이나 시를 남기는 것도 동양의 전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건륭제는 하필이면 문재로는 평범했던지라, 후대인들의 원성을 듣게 된 것이다. 이렇게 건륭제는 [[시]]를 굉장히 좋아했고, 평생 동안 4만편이 넘는 시를 썼다고 한다. 하도 많이 쓰다보니 책 몇권을 채울 정도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는 문학성의 측면으로 봤을때 그닥 좋은 평가는 못 받는다고... 오죽하면 '''[[조조]]의 시는 몇십 편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오늘날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명문인데, 건륭제의 시는 많이 남아 있지만 그저 도서관 구석에나 꽂혀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 아무튼 정말 좋아한 것은 맞아서 대신들에게도 이런 시를 선물로 줄 정도였으며, 평소에도 유명한 시인을 초청하여 시낭송하는 것을 즐겼다. 건륭제는 특히 예술품 수집을 즐겼는데, 고대 [[상나라]]때부터 제작된 중국의 각종 예술품을 시대별, 장르별로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목록을 작성했으며, 등급을 매겼다. 이런 일은 이전에는 거의 없었던 일이며, 이후 청나라가 망했을 때도 그대로 [[자금성]]에 소장되어 있었다. 이는 이후 [[국부천대]]때 [[장제스]]가 그대로 옮겨가서 현재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가면 볼 수 있다. ==== 만주족 정체성 우려 ==== [[만주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주족의 한화(漢化)를 걱정한 황제이기도 하다. 강희제 이후, 궁궐 내에도 [[중국어]]가 스며들게 되자 건륭제는 이 때문에 만주 귀족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건륭제는 너무 많은 중국어가 만주어 상주문에 스며들었다고 불평한 후, 대학사 나친을 우두머리로 새로운 만주어 단어를 만들 테스크 포스팀을 구성했다. 이들의 활약 덕택에 중국어에서 파생된 단어들이 만주어에서 대거 사라졌는데, 대신 1,700개가 넘는 새로운 만주어 단어가 생겼다고 한다. 이와 함께 만주어로 각종 중국 고전들을 번역하는 사업도 진행하였다. 하지만 이미 만주어는 강희제 초기부터 쇠퇴하고 있었다. 지배계급이 된 만주족들은 열심히 한학을 공부하여, 번역판 대신 한문을 직접 읽고 만주어 대신 중국어를 말하게 되었다. 건륭제 후기인 1775년에 만주족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심양시|심양]] 출신인 만주족 관리 과이민(果爾敏)이 조정에 출사했는데, 봉금령 때문에 한족이 거의 없었던 그 곳에서 자란 그도 건륭제의 만주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건륭제는 할 수 없이 중국어로 영을 내려야 할 형편이었다. ==== 사고전서 사업 ==== 한편, 건륭제는 막대한 문화 사업을 단행하여, 중국은 물론 그때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백과사전]] 사업을 완수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사고전서]]". 이 사업의 동기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는데, 그중 청나라가 진행한 '[[문자의 옥]](文字之獄)'의 일환으로써, 전국의 책을 검열하여 백과사전에 등재하면서 청에 비판적인 서적을 삭제하고 수정하며 폐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건륭제 본인은 [[성리학]]에 매우 깊이 빠져든 인물이었고, 그래서 신하들한테 충성을 강조하면서 과거 [[명나라]]의 신하였다가 [[청나라]]한테 항복했던 전겸익(錢謙益)[* 명나라의 대신이자 학자였고, 한 때 [[남명]] 정권에 가담하였으나 [[홍광제]]가 청나라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청나라 군대를 찾아가 항복하였다. 그래서 그와 뜻을 같이 했던 동지들은 전겸익을 배신자라고 무척이나 미워하였다.]을 가리켜 "글재주는 있었지만 지조가 없었으니 입에 담을 가치조차 없다. 그가 쓴 책은 모조리 불태워야 한다."라고 혹평하면서 이신전(貳臣傳)이라는 문헌을 만들어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항복했던 신하들을 비난하였다.[* 출처: 중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117쪽][* 조선으로 치면 조선 중후기 이후로 [[최영]], [[정몽주]] 등 [[고려]] 말기에 끝까지 고려에 충성하다 죽어간 인물들이 높이 평가받은 것과도 비슷하다.] ===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 === [[파일:external/y3.ifengimg.com/213d5e6a76eb4f9.jpg]] 위의 만화는 시사만화가 제임스 길레이 (James Gillary)가 매카트니 사절단의 중국 방문을 풍자한 것으로, 길레이는 매카트니와 동행하지 않고, 매카트니가 중국으로 떠난 이후 영국에서 이 만화를 그렸다. 그래서 청나라 조정의 묘사는 고증과는 거의 맞지 않는다. 만화에 묘사된 청나라 황제나 관리들의 위로 올라간 눈과 비정상적인 체형에서 영국인들이 동양에 대한 편견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건륭제의 재위기는 당시 [[조선]]의 [[영조]](재위 1724~1776년)와 [[정조(조선)|정조]](재위 1776~1800년)의 시기와 거의 일치하며 청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라서 그런지 청을 배경으로 한 중국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한다. 건륭제 말년인 1793년, [[영국]]의 대사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 [[비틀즈]] 소속으로 유명한 [[폴 매카트니]]와 성은 같지만 혈통으로는 상관 없는 인물이다.]가 정식으로 교역을 하자고 청한 일이 있었다. 이때 청나라 신료들은 매카트니에게 청나라식 삼배구고두례를 갖출 것을 요구했으나 매카트니는 거부[* 3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3번씩 총 9번 머리를 찧는 의식으로, [[병자호란]]에서 패배하고 [[삼전도의 굴욕]] 때 [[인조]]가 시행한 바로 그 의식이다.]했는데 동양권의 조공 문화에 익숙치 않은 서양인에게 행하라고 했으니 온전히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던 것.[* 매카트니는 이때 "내가 영국 국왕 폐하의 신하지, 귀국 황제의 신하인 줄 아나?" 라고 거부했다.] 건륭제의 뒤편에 영국 왕 조지 3세의 초상화를 걸어놓는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결국 매카트니는 한쪽 무릎만 꿇었다고 한다(사실 서양에서는 이런 방식이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조공국의 방문으로 여긴 건륭제와 대등한 관계의 접촉으로 여긴 영국의 입장 차이가 근본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에 양보하기 어려운 순서이기도 했다. 여하튼 건륭제가 관대하게 매카트니의 주장을 받아줘서 매카트니가 한쪽 무릎만 꿇는 것으로 예를 표할 수 있었다. 다만 다른 기록으론 건륭제의 단호한 요구대로 결국 절을 하고 말았다는 기록도 있다. 하여튼 이때 매카트니는 건륭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종 모직물과 기기묘묘한 완구 및 마차, 열기구와 지도 따위를 가져왔는데 하필이면 마차의 마부가 황제 바로 앞에 앉게 되는 식으로 설계가 된 바람에 찍히고 말았다. 또한 매카트니는 당시 청의 공행 무역을 폐지하고 자유 무역[* 당시 청은 외국과의 무역에 대한 규제가 강해서 외국 상인들의 불만이 컸다.], 교역량 증대, 대사관 설치, 대사의 상주를 허용, 덤으로 일부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엄밀하게는 매카트니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조지 3세의 친서에 들어있던 내용으로 작은 섬을 할양해서 영국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건륭제는 기분 나빠하며 >'''地大物博(지대물박)''' >---- > 청나라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다. 라며 "청나라는 모든 것이 다 있는 천자의 나라다. 너희 오랑캐들이 우리 청나라에서 나는 [[차]], [[비단]], [[도자기]] 수입도 감사하지 못할 망정 뭐가 어째? 안 돼." 라는 식으로 대답하며 거부했다. 게다가 자유 무역은 그렇다 쳐도 영토 할양은 중화식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기에 타협을 했다곤 해도 예법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 건륭제가 불쾌감을 느꼈을 테니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던 셈. 매카트니와 영국 사절단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고 건륭제가 강제 귀국을 명령해서 하는 수 없이 영국으로 돌아간다.[* 당시 영국이 대중국 외교 노하우가 떨어진 원인도 있다고 봐야 한다. 포르투갈의 경우 명나라 시대부터 마카오를 실효지배를 하고 있었다. 법적 지배는 아편전쟁 이후지만 이미 몇백 년 동안 실질적 자국 영토로 관리하고 있었으며 이는 포르투갈이 오랫동안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중국 정부의 비위를 안 상하게 할 수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도 사절단과 그들의 수장 이삭 티치가 건륭제의 6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영국 사절단이 거부하던 삼배구고두례를 하자 건륭제가 기뻐하며 이삭 티치와 네덜란드 사절단을 특별 대우하면서 선물도 많이 챙겨 주었다.][* 추가적으로 러시아 역시 청과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을 맺어 청과 교류 중이었으며 당시 베이징에는 러시아 외교 공관(근대적 의미의 외교 공관은 아니나, 러시아 외교관들이 상주했다)과 정교회 신학교가 있었다(이 정교회 신학교는 예수회를 비롯한 카톨릭 교회가 다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멀쩡히 남아서 근현대까지 존속했다. 신학교에서 중국어를 러시아 인들에게 가르치고 통역관을 육성하며 중국어 사전과 한자 사전을 편찬한 것은 덤). 러시아도 영국과 비슷하게 고두 문제로 청과 외교적 마찰을 빚었으나, 러시아가 고두를 하겠다고 양보함에 따라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그래서 매카트니 사절단이 방문했을 때 같이 있던 러시아 사절단은 '영국놈들' 앞에서 고두를 하는 '추태'를 보이기 싫어서 천자 앞에서의 고두를 거부했다가 '이제까지 잘만 해오더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고 청 측으로부터 한소리 듣기도 촌극도 있었다.] 또한 건륭제는 영국 국왕인 [[조지 3세]]에게 자신의 친서를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구 반대편까지 미치는 나의 은덕에 감사함을 느끼고 예의를 갖추어라. 그러나 이미 청의 기술적 수준은 영국 등 서양에 꽤나 많이 뒤쳐지고 있던 상태였다. 일례로, 당시 매카트니와 영국 사절단이 [[성냥]]으로 불 붙여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성냥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청의 관리들이 놀라서 '오랑캐가 요술을 부리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성냥]] 문서에는 근대적인 마찰식 성냥은 매카트니 사후인 1827년에 등장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아무래도 근대식 성냥 등장 직전의 과도기적 물건이었던 듯.] 결국 반 세기쯤 뒤에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한낱 서양 오랑캐라고 무시했으나 [[Rule, Britannia!|사실은 당시 세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대영제국]]에게 그야말로 개박살이 나게 된다. 한편, [[조선]]과 다른 쪽으로 연관이 있기도 한데,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에서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 사신단에 끼어간 인물이 바로 [[박지원(실학자)|박지원]]. 즉, [[열하일기]]가 바로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저서였던 것이다.[* 열하일기는 당시 조선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할아버지인 강희제 때와 비슷하게 본인 치세의 각국의 군주들 또한 묘하게도 중흥기 아님 전성기를 가져온 군주들이었다. 우선 조선에는 영조·정조, 오스트리아-헝가리·보헤미아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 프로이센에서는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 러시아 제국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 그리고 미국엔 군주는 아니지만 미국 최초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도 있다. == 가정 관계 == 수많은 후궁이 있었지만 건륭제 사이에서 자식을 낳은 이는 [[효현순황후]], [[계후 호이파나라씨|계황후]], [[효의순황후]], 철민황귀비, 숙가황귀비, 순혜황귀비, 유귀비, 흔귀비, 서비, 돈비로 열명에 불과하다. 혜현황귀비, 용비는 총애를 받은 것으로 보이나 자식은 없었다. 할아버지 [[강희제]]가 여러 후궁에게서 수십명의 자식을 본것과는 대조적이다. 열 명의 후궁 가운데 아이를 둘 이상 낳은 이는 [[효현순황후]], [[계후 호이파나라씨|계황후]], [[효의순황후]], 철민황귀비, 숙가황귀비, 순혜황귀비, 흔귀비다. 아이를 낳은 이들 대부분이 보친왕 시절부터 함께한 후비인 것이다. 건륭황제가 즉위한 뒤에 들어온 후궁 중에서는 효의순황후와 흔귀비만 아이를 여럿 낳았다. 이들이 건륭이 총애했던 후비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남아있는 초상화를 보면 화법 때문인지는 몰라도 공통적으로 매우 마르고 좁은 얼굴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옛날 초상화임에도 상당히 미인들이다. 건륭제의 후궁은 출신이 다양하고 이야기도 많아서 여러 야사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건륭제의 계후들은(계황후와 효의순황후) 역대 [[청나라]] [[황후]]들 가운데서도 출신이 제일 한미하다. 계황후는 팔기군에 만주족이긴 하지만 집안이 호이파나라 씨로 최고의 만주족 가문은 아니었고 효의순황후는 팔기군 출신이긴 하지만 포의 가문에 심지어 민족은 [[만주족]]이 아니라 [[한족]]이다. 후궁들 역시 출신이 다양한데, 또한 [[조선]] 출신 조상을 둔 숙가황귀비, [[위구르]] 족인 향비, 팔기군도 아닌 [[한족]]인 순혜황귀비 등이 있다. === 아내 === '''[[효현순황후|효현순황후 푸차씨]](孝賢純皇后 富察氏)''' [[1712년]] 출생 ~ [[1748년]] 사망 * 황장녀 [[1728년]]~[[1729년]] * 황2자 단혜황태자 영련(永璉) [[1730년]]~[[1738년]] 영련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옹정제가 지어준 것으로 璉자에는 이어지다라는 뜻이 있다. 건륭 원년에 밀건법으로 황태자에 임명하였다. 영련이 죽자 건륭은 슬퍼하며 무덤을 성대하게 만들었다. * 황3녀 고륜화경공주 [[1732년]]~[[1791년]][* 1745년 몽골 과이심부 좌익중기 찰살극 달이한친왕 색포등파륵주이에게 하가. 참고로 달이한친왕가는 [[효장문황후]]의 남동생인 박이제길특 만주습례가 창설한 가문으로 할아버지 박이제길특 반제는 순치제의 양녀이자 [[아이신기오로 지르가랑]]의 손녀인 고륜단민공주와 결혼하며 아버지인 나복장곤포는 강희제의 이복동생 유친왕 복전의 딸과 결혼한다. 실제로 건륭제는 이 딸을 매우 아껴서 결혼 당시 북경에 민가 200채를 허물면서까지 공주부를 지어준다. 이후 남편인 달이한친왕이 준가르와의 전쟁 중 과실로 처형당할 위기에 놓였음에도 한 번 용서해 주었으며, 공주가 죽은 후에는 공주와 그 남편의 무덤의 격을 능으로 올려준다.] * 황7자 화석철친왕 영종(永琮) [[1746년]] ~ [[1747년]] [[부처님오신날]]에 태어났는데 가뭄이 오래 지속되었다가 마침내 단비가 내렸다고 하며 태어나자 마자 엄청난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천연두로 요절하게 되며 친형이 안치되어있는 단혜황태자원에 안치되었다. 첫 번째 황후인 [[효현순황후|효현순황후 푸차씨]](孝賢純皇后 富察氏)는 상당한 미인이었으며 건륭제도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효현순황후는 성정이 어질고 소박했으며 태후에게도 효성스러웠고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다. 한번은 건륭제가 크게 앓은 적이 있는데 쾌유한 뒤에도 어의는 "반드시 100일은 푹 쉬어야만 원기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당부했다. 황후는 매일 밤 건륭제의 침실 밖에 거주하면서 정성을 다해 100일 동안 시중을 든 뒤에야 비로소 합방했다.[* 출처: 옌 총니엔 저, 대청 제국 12군주 열전.] 하지만 효현순황후는 건륭 13년에 지방 순행 중 [[더저우]] (德州)에서 죽었는데 그녀가 죽은 이후 그 지역에는 건륭제는 일생동안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건륭제의 개혁 성향이 이즈음부터 크게 꺾이고 본인은 천자 놀음에 더 신경 쓰면서 제국은 슬슬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그런데 건륭제는 이 황후의 남동생인 푸차 푸헝(富察 傅恒)의 부인과 불륜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야사가 있다. '''[[계후 호이파나라씨|계황후 호이파나라씨]](繼皇后 輝発羅拉氏)''' [[1718년]] 출생 ~ [[1766년]] 사망 * 황12자 다라패륵 영기(永璂) [[1752년]]~[[1777년]] * 황5녀 [[1753년]]~[[1753년]] * 황13자 영경(永璟) [[1755년]]~[[1757년]] 수녀 선발에 참여했다가 [[옹정제]]의 눈에 띄어 보친왕 왕부의 측복진(첩)으로 들어왔다. 당시 보친왕부의 여자들은 적복진(훗날 효현황후) 부찰씨와 측복진 고씨(훗날 혜현황귀비) 말고는 모두 격격이었는데 휘발나랍씨는 바로 측복진으로 들어왔다. 왕부에 들어온 시첩 가운데 [[완귀비 진씨]]와 함께 제일 어린 편이었고, 제일 늦게 들어온 사람이었다. 측복진이 된지 9달만에 보친왕이 건륭제로 즉위해 후궁이 되었다. 건륭제 즉위 후 ‘우아할 한’의 봉호를 받고 한비(嫻妃)에 봉해졌으며, 이는 효현황후와 귀비 고씨에 이어 서열 3위의 위치였다. 후에 귀비(嫻貴妃)로 올랐다. 효현순황후가 죽고 난 뒤 곧바로 황귀비로 육궁을 통솔하게 되었다. 이 과장에서 건륭제는 휘발나랍씨에게 전례를 깨뜨리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첫 황후의 죽음 이후 황귀비(嫻皇貴妃)에 봉해져 황후 대리로 육궁을 통솔했다.[* 책봉문마다 “자애로운 태후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문구가 있어 태후픽으로 승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황후가 된 호이파나라씨는 일가가 [[만주족|만군]] [[팔기제|팔기]] 상삼기인 정황기로 승격되었으며, 건륭 사이에서 아이를 연이어 셋이나 낳으며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건륭 30년 남순 중 미스터리하게 북경으로 돌려 보내지고, 총애를 잃은 채 냉대를 받다가 죽게 된다. 심지어는 죽고 난 후의 장례 절차마저도 황귀비의 예에 따라 치르도록 건륭제가 명령하였으며, 건륭제는 슬퍼하지도 않았고 그녀의 친자인 황12자만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건륭은 황후가 화를 내며 머리를 잘랐다며, 머리를 자른것은 부모나 남편이 죽었을 때나 하는 행동인데, 이는 매우 큰 불경이라며 황후를 유폐한 이유를 말했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총애를 잃은 이유는 아직도 미궁에 빠져있으며, 여러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뒤끝이 장난아니던 건륭제는 계황후가 그려진 초상화를 모두 태우거나 얼굴을 고쳐 그렸으며, 계황후에 대한 처사가 부당하다는 대신들 역시 파면되거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유일하게 장성한 황12자 영기 역시 죽고 나서야 동생 [[가경제]]에 의해 패륵으로 추존되었다고 한다. '''[[효의순황후|효의순황후 워이기야씨]](孝儀純皇后 魏佳氏)''' [[1727년]] 출생 ~ [[1775년]] 사망 * 황7녀 고륜화정공주 [[1756년]]~[[1775년]][* 1773년 찰살극 외몽고 새음약액부 중좌익 말기 친왕(a.k.a 초용친왕)박이제길특 납왕다이제(1754~1816)에게 하가. 참고로 납왕다이제의 할아버지인 고륜액부 책릉(1672~1750)은 강희제의 10녀인 고륜순각공주와 결혼하였으나 1723년 [[준가르]]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옹정제]]는 책릉의 작위를 고산패자에서 친왕으로 올려준다. 참고로 납왕다이제와 화정공주는 6촌 간이다. 이후 납왕다이제는 1803년 가경제 피습사건 당시 가경제의 목숨을 구해 더욱 총애를 받는다.] * 황14자 영로(永璐) [[1757년]]~[[1760년]] * 황9녀 화석화각공주 [[1758년]]~[[1780년]][* 1780년 화석액부 오아 찰란태에게 하가. 참고로 오아 찰란태의 왕대고모는 [[효공인황후]]이다. 효공인황후의 조카손자인 우야 자오후이는 건륭제 당시 준가르 정벌전에서 큰 공을 세워 공작 작위를 받았다.] * 황15자 [[가경제|인종 가경예황제]] 영염(永琰) [[1760년]]~[[1820년]] * 황16자 영선 [[1762년]]~[[1763년]] * 황17자 화석경의친왕 영린(永璘) [[1766년]]~[[1820년]] 한족 출신인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a/af/Empress_Xiao_Yi_Chun_%28%E5%AD%9D%E4%BB%AA%E7%BA%AF%E7%9A%87%E5%90%8E%29_at_the_time_being_the_Imperial_Consort_Ling_%28%E4%BB%A4%E5%A6%83%29.PNG|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 위씨]]를 총애하였다. 청나라는 기인 중에서 후궁을 뽑고 상삼기 포의 중에서 궁녀를 뽑는데 위씨는 정황기 포의 출신이라 처음에는 궁녀였을 것으로 본다. 건륭의 눈에 띄어 건륭 10년 귀인으로 봉해졌다. 같은 해 ‘하여금 영(令)’의 봉호를 받고 영빈으로 오르고 4년 뒤에 다시 영비로 오르는 고속 승진을 했다. 황7녀, 황14자를 낳은 후 건륭 24년에 귀비에 봉해졌다. 계황후가 유폐된 후 황귀비(令皇貴妃)로 승격되어 육궁을 다스렸다. [[황후]]가 될 수 없었던 한족으로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다. 황제에게 큰 총애를 받아 황7녀 고륜화정공주를 시작으로 해마다 아이를 출산했다. 역대 청나라 후비를 통틀어 제일 아이가 많다. 건륭 치세 후반기에 낳은 아이들은 거의 효의순황후 사이에서 본 자식들이다. 그러나 거듭된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49세에 훙(薨) 하였다. 이후 건륭제가 그녀의 아들인 황15자 영염에게 선위하여 [[가경제]]가 된다. 그녀는 사후 남편인 건륭제가 직접 효의순황후(孝儀純皇后)로 추증해주었으며, 성씨에 ~가(佳)가 붙여져[* 만주족 성씨에는 ~가(佳)씨로 끝나는 성이 많아, 한족을 만주족으로 편입시킬 때는 성씨 뒤에 가(佳)를 붙여 승격시켜주었다.] 일가가 만주족 팔기에 편입된다. 효의순황후가 죽은 뒤 비빈 중 가장 연장자였던 서비 예허나라씨와 유비 커리예트씨가 육궁을 관리했지만 그마저 죽은 뒤로 내명부는 건륭이 완전히 다스리게 된다. === 후궁 === '''[[철민황귀비 부찰씨(건륭제)|철민황귀비 푸차씨]]'''(哲憫皇貴妃 富察氏) [[1735년]] 사망 * 황장자 정안친왕(定安親王) 영황(永璜) [[1728년]] ~ [[1750년]] * 황2녀 [[1731년]] ~ [[1731년]] * 보친왕부 '''격격''' - '''철비'''(哲妃)로 추봉(옹정 13년, 1735년) - '''철민황귀비'''(哲憫皇貴妃)로 추봉(건륭 10년, 1745년) 효현순황후 푸차씨와 성은 같으나 같은 집안은 아니다. 소속은 만주 정황기에 한미한 집안이었다. 보친왕이 건륭제로 즉위하기 몇 달 전에 죽었다. 맏아들을 낳은 공을 생각해 황귀비로 추봉되었다. '''[[혜현황귀비 고가씨(건륭제)|혜현황귀비 고기야씨]](慧賢皇貴妃 高佳氏)''' [[1711년]] 출생 ~ [[1745년]] 사망 * 보친왕부 '''격격''' - 보친왕부 '''측복진''' - '''귀비'''(貴妃, 옹정 13년, 1735년) - 죽기 전 '''황귀비'''(皇貴妃)로 특진(건륭 10년, 1745년) - '''혜현황귀비'''(慧賢皇貴妃)로 추봉(건륭 10년, 1745년) 고빈의 딸로 일찍이 보친왕부의 격격으로 들어와 건륭제의 사랑을 받았다. 건륭제는 즉위하면서 고씨를 첩의 작위 중 제일 높은 등급인 귀비(貴妃)로 봉했다.이는 고씨가 측복진으로 수년간이나 건륭제와 함께했다는 명분 외에도,[* 한비는 만주 양람기 출신으로 처음부터 측복진으로 들어왔으나 고씨는 격격으로 들어와 측복진이 되었는데 이는 건륭제가 한비보다 고씨를 총애했다고 볼 수 있다.] 한비보다 승진이 빠른것으로 보아 꽤 아꼈다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따로 봉호를 주지는 않았는데, 이는 만주족이던 황후 푸차씨와 격차를 늘리고, 역시 만주족이지만 지위는 고씨보다 낮던 한비(嫻妃) 호이포나라씨와는 격차를 줄이려는 의도였다. 고씨는 명문가의 숙녀로 오랜 시간 건륭제를 성심성의껏 모셨지만, 몸이 약해 34세의 젊은 나이로 병을 얻어 일찍 사망했다. 건륭제는 그가 죽기 직전에 황귀비로 특진시켜 주었다. 몸이 약해 일찍 죽었기에 자식은 없다. 고귀비 사후 권세를 누리던 고씨 일가는 몰락했다.[[만주족]]으로 편입되었긴 했지만 말이다. 건륭의 부황인 [[옹정제]]의 총비였던 연황귀비(돈숙황귀비 연씨)와 매우 흡사한 인생을 살았다. 사후 집안이 몰락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순혜황귀비 소씨(건륭제)|순혜황귀비 소씨]](純惠皇貴妃 蘇氏)''' [[1713년]] 출생 ~ [[1760년]] 사망 * 황3자 순군왕 영장(永璋) [[1735년]]~[[1760년]][* 적모인 효현순황후의 장례에 슬퍼함이 부족하여 황위계승권을 박탈 당했으며 생모인 순혜황귀비가 죽은 후 3개월 뒤에 죽었다.][* 참고로 아내인 보르지기트씨는 옹정제의 양녀인 화석숙신공주와 박이제길특 관음보의 딸이다. 화석숙신공주는 원래 강희제의 망나니 황태자 윤잉의 딸이었지만, 옹정제의 양녀가 된다. 이후 남편이 원정 중 일찍 죽고 큰오빠 이친왕 홍석이 역모에 몰렸음에도 황실의 큰 어른으로 대접받으며 건륭제의 총애를 받는다.] * 황6자 화석질장친왕 영용(永瑢) [[1743년]]~[[1790년]][* 강희제의 21황자이자 건륭제의 동갑내기 숙부인 윤희의 양손으로 출계하였으며 그의 복진은 효현순황후의 동생인 참장 부겸의 딸이다.] * 황4녀 화석화가공주 [[1745년]]~[[1767년]][* 복륭안에게 하가하였으며 복륭안은 효현순황후의 동생인 대학사 군기대신 부항의 차남이다.] * 보친왕부 격격 - '''순빈'''(純嬪, 옹정 13년, 1735년) - '''순비'''(純妃, 건륭 2년, 1737년) - '''순귀비'''(純貴妃, 건륭 10년, 1745년) - 죽기 전 '''황귀비'''(皇貴妃)로 특진(건륭 25년, 1755년) - '''순혜황귀비'''(純惠皇貴妃)로 추봉(건륭 25년, 1755년) 보친왕부의 격격으로 들어와 즉위 후 도탑고 순수하다는 뜻의 순(純)의 봉호를 받고 순빈(純嬪)에 책봉되었다. 한족 출신에 한미하기 그지없는 집안이었으나 건륭제가 사랑한 사람 중 하나였다. 건륭제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고, 귀비(純貴妃)까지 올라갔다. 병을 얻어 죽기 직전 건륭제가 직접 황귀비로 특진시켰다. '''[[숙가황귀비 금가씨|숙가황귀비 긴기야씨]](淑嘉皇貴妃 金佳氏)''' [[1711년]] 출생 ~ [[1755년]] 사망 * 황4자 화석이단친왕 영성(永珹) [[1739년]](건륭 2년)~[[1777년]][* 강희제의 12황자인 이의친왕 윤도의 양자로 출계하였다. 윤도의 복진은 의정대신 마제의 딸이고 마제는 효현순황후의 백부이다.] * 황8자 화석의신친왕 영선(永璇) [[1746년]](건륭 11년)~[[1832년]] * 황9자 영유(永瑜) [[1748년]](건륭 13년)~[[1749년]] * 황11자 화석성철친왕 영성(永瑆) [[1752년]](건륭 17년)~[[1823년]][* 효현순황후의 동생인 부항의 딸 중 하나가 적복진으로 시집을 갔다. 부항은 물론이고, 그의 아들들이 모두 총애를 받았으며, 다른 딸은 예친왕 도르곤의 후계자에게 적복진으로 시집을 갔다.] * 보친왕부 격격 - '''김귀인'''(貴人, 옹정 13년, 1735년) - '''가빈'''(嘉嬪, 건륭 3년, 1738년) - '''가비'''(嘉妃, 건륭 6년, 1741년) - '''가귀비'''(嘉貴妃, 건륭 13년, 1748년) - 죽고 난 뒤 '''숙가황귀비'''(淑嘉皇貴妃)로 추봉(건륭 20년, 1755년) 숙가황귀비의 조상은 조선인 출신으로 정묘호란 당시 청에 잡혀간 김신다리 형제이다. 신다리 형제는 병자호란 당시 통역 일을 하며 청나라에 공을 세워 정황기의 포의 니루[* 포의란 황실 직속의 도우미, 노복 신분을 말한다. 기인이되 귀족인 기분 니루에는 속하지 못한 중산층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중 하나인 ‘고려니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숙가황귀비의 증조할머니는 [[순치제]]의 유모였고[* 이때부터 김씨 일가의 지위가 높아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후손들은 정1품, 정2품 관원을 배출했다. 특히 조선 혈통이다보니 조선 사신들과 로비를 주고받아 조선왕조실록에서 김상명, 김간 등의 이름이 심심찮게 언급되기도 한다. 숙가황귀비는 보친왕부의 격격으로 들어와 즉위 후 귀인(貴人) 작위를 받았으며, 후에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가(嘉)의 봉호를 받고 가귀인(嘉貴人)의 작위를 받았다. 빈(嘉嬪), 비(嘉妃)를 거쳐서 귀비(嘉貴妃)까지 올라갔다. 매우 아름다워 건륭제가 사랑한 이 중 하나였고 황태후와의 관계도 좋았다. 건륭제와의 사이에서 아들만 4명을 줄줄이 낳으며 자식복도 많았고, 대부분 장성해 황족 최고 작위인 친왕(親王)을 부여받았으며 그 중 황11자 영성은 건륭제의 후계자 후보에도 들었으나 영성이 무예를 싫어해서 동생인 황15자 영염이 후계자가 된다.[* 훗날 [[도광제]]의 장자 혁위가 후사 없이 죽자 영성의 증손자 중 하나인 재의가 혁위의 양자로 입양되었는데, [[동치제]]가 후사 없이 죽자 재의의 아들인 부륜이 동치제의 양자로서 제위에 옹립될 뻔 했으나 실제 혈맥이 너무 멀다는(실상은 [[서태후]]가 제어하기 까다롭다는) 이유로 무산되었고, 부륜을 제외하면 이 항렬까지 세대교체가 빨리 이뤄진 가까운 황족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차기 황제는 결국 같은 항렬에서 선정되었다.] 가귀비는 죽은 후 곧바로 [[효성헌황후|숭경황태후]]에 의해 황귀비로 추증되었다. 건륭제는 숙가황귀비를 비롯한 김씨 일가를 모두 정황기 만주 기분 니루로 편입시켜 신분을 높여 주었고, 훗날 가경제가 만주 성씨인 '~가(佳)'가 붙은 긴기야씨(金佳氏)로 사성하며 긴기야씨로 기록되었다. 현재 긴기야 가문의 후손들은 한국식으로 김씨 성을 쓰고 있다.[* 사실 이는 긴기야 가문 뿐만 아니라 다른 조선계 만주족 가문의 후손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경공황귀비 육씨]](慶恭皇貴妃 陸氏)''' [[1724년]] 출생 ~ [[1774년]] 사망 '''육귀인'''(陸貴人, 1748년) - '''경빈'''(慶嬪, 건륭 16년, 1751년) - '''경비'''(慶妃, 건륭 24년, 1759년) - '''경귀비'''(慶貴妃, 건륭 33년, 1768년) - '''경공황귀비'''(慶恭皇貴妃)로 추봉(가경 4년, 1799년) 상재(常在)로 있다가 귀인으로 진봉했다. [[효의순황후]]의 아들이자 훗날 [[가경제]]로 즉위하는 15황자 영염을 키웠다. 이 때문에 태상황 건륭제가 죽은 뒤 가경제의 손에 의해 황귀비로 추봉된다. 별 탈 없이 귀비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건륭제의 여러 총비 가운데 하나로 보이나 자식은 없다. '''[[유귀비 가리엽특씨|유귀비 커리예트씨]](愉貴妃 珂里葉特氏)''' [[1714년]] 출생 ~ [[1792년]] 사망 * 황5자 화석영순친왕 영기(永琪) [[1741년]]~[[1766년]] * '''해상재'''(海常在, 옹정 13년, 1735년) - '''해귀인'''(海貴人, 건륭 2년, 1737년) - '''유빈'''(愉嬪, 건륭 6년, 1741년) - '''유비'''(愉妃, 건륭 10년, 1745년) - 죽은 뒤 '''유귀비'''((愉貴妃)로 추봉(건륭 57년, 1792년) 건륭제의 보기 드문 몽골 출신 후궁. 커리예트 씨가 낳은 영기는 매우 총명하고 출중했으나 장수한 자기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다. [[황제의 딸]]에 나왔던 오왕자 영기가 바로 이 사람이다. 거란, 여진, 만주어 연구로 명성이 높은 언어학자 [[아이신기오로 울히춘]] 부녀가 영기의 후손이다. 서비 예허나라씨가 죽은 뒤 육궁 관리권한을 넘겨받았다. '''[[완귀비 진씨]](婉貴妃 陳氏)''' [[1716년]] 출생 ~ [[1807년]] 사망 * 보친왕부 '''격격''' - '''진상재'''(陳常在, 옹정 13년, 1735년) - '''진귀인'''(陳貴人, 건륭 2년, 1737년) - '''완빈'''(婉嬪, 건륭 13년, 1748년) - '''완비'''(婉妃, 건륭 59년, 1794년) - '''완귀태비'''(婉貴太妃, 가경 6년, 1801년) 건륭제가 보친왕이던 시절에 제일 늦게 격격으로 들어왔으며, 왕부 시절부터 있던 후비 가운데 제일 어린 편이었다. 보친왕부 시절부터 건륭제와 함께한 후비들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건륭제가 죽은 후까지 살아 태비가 된 인물이다.''' 건륭 13년에 빈(嬪)에 책봉된 뒤 40년이 넘는 기간동안 빈으로 있었다. 총애를 받던 후궁들은 아이도 안 낳고 한 방에 비까지 올라간것과 달리 완귀비 진씨는 별달리 총애를 받진 못한 걸로 보인다. 왕부시절부터 건륭제와 함께했다는 지위 덕분인지는 몰라도 강등이 밥먹듯이 일어나던 건륭 시대의 후궁에서 자기 자리는 온전히 보존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남아 귀비로 올라갔다. 후임 [[가경제]]가 그가 건륭제의 잠저 시절부터 함께한 모비(母妃)임을 존중해 귀비(貴妃)로 존숭했다. 그래서 죽었을 때 작위는 완귀태비(婉貴太妃). 그가 죽었을 때 악귀태인 시린기오로씨([[악귀인 서림각라씨]])가 진씨의 주검을 배웅했다. 악귀인 시린기오로씨는 완귀비 진씨 다음으로 건륭제와 함께한 경력이 제일 오래된 후비였기 때문이다. '''[[영귀비 파림씨|영귀비 바린씨]](穎貴妃 巴林氏)''' [[1731년]] 출생 ~ [[1800년]] 사망 * '''나상재(那常在, 건륭 13년, 1748년)''' - '''나귀인'''(那貴人, 건륭 13년, 1748년) - '''영빈'''(潁嬪, 건륭 16년, 1751년) - '''영비'''(潁妃, 건륭 24년, 1759년) - '''영귀비'''(潁貴妃, 가경 3년, 1798년) 팔기 [[몽골]]의 양홍기 출신으로 건륭 13년에 상재로 책봉되어 같은 해 귀인에 올랐다. 영황귀비 위씨가 막내 황자인 영린을 낳자 영비 바린씨가 영린을 도맡아 기르게 되었다. 유비 커리예트씨가 죽고 난 뒤로 후궁 사무를 돌보게 되었다. 영황귀비가 세상을 뜨고 난 뒤로 후궁에는 마땅한 통솔자가 없어서 제일 높은 지위의 후궁이 사무를 도맡았었는데, 영귀비 바린씨가 건륭 시대 후궁의 마지막을 통솔한 셈이다. 건륭제가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가경제가 즉위한 뒤 영비는 태비가 되었는데, 태상황 건륭제에 의해 귀비로 승봉해 최종 지위는 영귀태비(潁貴太妃)가 되었다. 가경제의 아내인 효화예황후는 어렸기 때문에 태상황 건륭제가 죽을 때까지 영귀태비 바린씨가 후궁을 관리했다. '''[[흔귀비 대가씨(건륭제)|흔귀비 다이갸씨]](忻貴妃 戴佳氏)''' 출생시기 알 수 없음, [[1764년]] 사망 * 황6녀 [[1755년]] ~ [[1758년]] * 황8녀 [[1757년]] ~ [[1767년]] * '''흔빈'''(忻嬪, 건륭 18년, 1753년) - '''흔비'''(忻妃, 건륭 28년, 1763년) - 죽은 뒤 '''흔귀비'''로 추봉(忻貴妃, 건륭 29년, 1764년) 승경황태후의 눈에 띄어 건륭 18년에 빈에 봉해졌다. 건륭 20년에 6째 공주를 낳았고, 건륭 22년에 8째 공주를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었다. 두 딸을 잃은 뒤 건륭 28년 비로 올랐지만, 1년 뒤에 죽었다. 죽은 뒤 건륭제에 의해 귀비로 추서되었다. '''[[순귀비 이이근각라씨|순귀비 이르건기오로씨]](循貴妃 伊爾根覺羅氏)''' [[1758년]] 출생 ~ [[1798년]] 사망 * '''귀인'''(貴人, 건륭 41년, 1776년) - '''순빈'''(循嬪, 건륭 41년, 1777년) - '''순비'''(循妃, 건륭 57년, 1792년) - 사망 후 '''귀비'''로 추숭(가경 2년, 1798년) 건륭제가 황제위에 있던 시절 마지막 수녀 선발로 들어왔다. 가경 2년 [[폐결핵]]으로 사망한 뒤 태상황 건륭제에 의해 귀비로 추숭되었다. '''[[서비 예허나라씨]](舒妃 葉赫那拉氏)''' [[1728년]] ~ [[1777년]] * 황10자 [[1751년]] ~ [[1753년]] * '''귀인'''(貴人, 건륭 6년, 1741년) - '''서빈'''(舒嬪, 건륭 6년, 1741년) - '''서비'''(舒妃, 건륭 13년, 1748년) [[효의순황후]]의 딸인 황9녀 화석화가공주(和碩和恪公主)를 길렀다.건륭 40년([[1775년]]) 내명부와 육궁을 다스리던 황귀비 위씨(효의순황후)가 병사하자 궁중 비빈 가운데 제일 높은 비빈이 되어 육궁을 관리하게 되었다. 건륭제는 황귀비 위씨가 죽고 난 뒤로는 [[황후]]나 황귀비를 따로 세우지 않고 자기가 직접 육궁을 통솔했는데, 그 때문에 짬 있는 후궁들도 저마다 한가닥 할 수 있었다. 서비 예허나라씨가 이들 가운데 제일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제일 발언권이 강했다. '''[[용비 화탁씨|용비 호자씨]](容妃 和卓氏, خوجام, Xojam)''' 일명 '''향비''' [[1734년]] 출생 ~ [[1788년]] 사망 본명은 화탁 파티마 (위구르어 : فاتىمە, Fatime)라는 설이 있다. 아버지는 엘리화탁씨 (위구르어 : ئەلى خوجام), 동생은 투르드화탁씨 (위구르어 : تۇردۇ خوجام)이다.[[https://ko.wikipedia.org/wiki/%EC%9A%A9%EB%B9%84_%ED%99%94%ED%83%81%EC%94%A8|한국어 위키백과]] 이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건륭제가 위구르의 소화탁훠지잔(霍集占)을 쳐 그 전리품으로 데려온 여성이고, 소화곽탁집점의 딸 혹은 첩이었다고 한다. 출생이 출생인지라 많은 전설이 내려오는 여성이다. 외모는 아주 아름다웠고 페로몬 내음이 강하게 났다는 전설도 있다. 건륭제는 그녀를 아주 깊게 사랑했다고 한다. 건륭제는 출신과 문화가 달랐던 용비 화탁씨를 위해 자금성 밖 북경 황성 [[중난하이]]에 보월루를 지어 궁에서도 이슬람식 생활을 영유할 수 있도록 특별히 보장해주고 보월루에 가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또한 용비에게 [[할랄 푸드|회족 요리사를]] [[청진 요리|붙여주었으며]] 보월루에서 매일 내려다 볼 수 있는 거리에 회족거리를 조성해 그녀가 고향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도록 해주었다. 건륭제는 위구르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문제 없이 이뤄졌다고 한다. 황제의 딸 2기에 나온 함향이 이 향비이다(그리고 드라마에서는 다른 남자와 야반도주) '''[[돈비 왕씨]](惇妃 汪氏)''' [[1746년]] 출생 ~ [[1806년]] 사망 * 황10녀 고륜화효공주 [[1775년]]~[[1823년]] 65세 때 돈비 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늦둥이 딸을 특별히 총애했다고 한다.[* 다만 돈비 왕씨는 자신의 딸을 믿고 궁녀를 때려 죽이는 등의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래서 돈빈으로 강등되었다가, 2년 후 다시 돈비로 돌아왔는데 어찌나 성격이 나빴던지 어지간한 후궁은 모두 2등급 이상의 품계를 올려주었던 [[가경제]]조차 그녀를 그냥 돈태비로 놔두었다. 건륭제가 죽고 난 뒤 그녀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황궁 내 태비들 사이에서도 [[왕따]] 신세가 되고 기고만장하던 과거와는 달리 초라한 말년을 보냈다.] 자연히 어미였던 왕씨도 총애를 많이 받았다. 화효 공주는 건륭제의 외모며 성격, 재능을 유난히 닮아 여러 면에서 출중했던지라 건륭제는 그녀를 보며 '네가 아들이었다면 너를 태자로 삼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곤 했다고. 딸을 각별히 사랑한 건륭제는 그녀가 후궁 소생의 공주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고륜 공주로 봉해주었으며[* 일반적으로 청나라에서 황제의 적녀는 고륜 공주로 봉해졌고 서녀는 화석 공주로 봉해졌다. 조선으로 치면 고륜 공주는 '공주' 에, 화석 공주는 '[[옹주]]'에 해당하는 셈. 물론 조선의 공주, 옹주와는 달리 모친의 지위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예외도 있었다.], 미행이나 사냥에도 그녀를 동반하여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또 본인이 각별히 총애했던 권신이자 상상을 초월하는 거부(巨富)였던 허션의 장남 니오후루 펑션인더(ᠨᡳᠣᡥᡠᡵᡠ ᡶᡝᠨᡤᡧᡝᠨᠶᡝᠨᡩᡝ, Niohuru Fengšeninde, 紐祜祿 豊紳殷德, 뉴호록 풍신은덕)와 일찍이 정혼시켰고, 1789년 11월 17일에 결혼시켰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남았는데, 그녀의 혼인 당시 융숭한 총애와 사치스러운 혼수는 저번 공주의 혼사에 비해 10배나 되었고, 공주의 집으로 실어 보내는 물건들은 대충 어림잡아 봐도 수백만 금이 넘었으며, 그녀가 시가로 가던 날에는 수천 수백 명에 달하는 고관들이 참석하여 작별을 고하는 절을 했다고 한다. == 평가 == === 긍정적 평가 === 건륭제의 치세는 할아버지 [[강희제]], 아버지 [[옹정제]]와 함께 '''[[강건성세]]'''[* 원래는 강옹건성세라고 해야 하겠지만, 옹정제의 재위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것도 있고, 묘하게 옹정제는 전통적으로 폭군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평가가 박했다.]라고 불리며 청나라 최대 전성기로 여겨졌고, 음습한 느낌에 내치에 주력한 아버지 옹정제의 치세와 달리 건륭제는 정복 전쟁이라는 화려한 군공도 세웠기에 오랜 시간 고평가를 받았다. 건륭제는 청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는데, 이것은 준가르부를 멸망시킨 부산물로 얻어진 것이다. [[명나라]] 때부터 역대 중국왕조에 골치를 썩이던 [[준가르]] ([[오이라트]])에 대한 최종 해결책으로 '''멸족'''을 결정했고,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비판하고 있다. 요새 말로 하면 [[학살자]]라고 할 수 도 있는데, 이는 준가르가 명나라때부터 중국의 골치거리였고, 평화적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준가르와 그 전신 오이라트는 [[북로남왜]]에서 알 수 있듯이 명나라시절부터 감숙성과 섬서성 일대를 약탈과 노예납치로 어지럽혔고, 청나라는 처음에는 조선이나 내몽골처럼 군신관계로 복속시켜 이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준가르 '''입조와 배신을 반복하면서''' 청나라의 신경을 긁는지라 건륭제는 아예 씨를 말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준가르부는 청나라는 물론 주변 민족[* 티베트, 위구르, 카자흐, 키르기스, 몽골족 모두 준가르를 증오하고 있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족]]은 티베트 불교를 믿던 [[준가르]]가 가장 탄압하던 민족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준가르는 체왕 랍탄 시절 포탈라궁을 불지른 일로 티베트인들에게도 원성을 들었다.]에 성상납 강요나 노예 납치 등 여러 원한을 사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준가르족을 돕거나 퇴로를 열어주지 않았다.[* 비슷한 케이스로 오이라트족의 일파가 오늘날 러시아의 [[칼미키아]] 일대로 이주하면서 원주민인 [[노가이 칸국|노가이족]]을 학살한 사례가 있는데, 노가이족의 경우 이웃 국가들이 퇴로를 열어주어 전멸은 피했다.] 게다가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몽골-금 전쟁|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부와의 23년간의 전쟁 끝에 멸망하고]] 여진족들이 대거 학살당했던 것도 이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건륭제는 준가르부가 멸족되어 공지가 된 지역에 타림분지 서쪽에 있던 [[카자흐족]]과 남쪽의 [[위구르족]]을 불러 살게 했다.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는 인도적으로는 매우 비난받을 일이지만, 위에서 말한대로 준가르가 여러 민족의 원한을 사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에는 어쨌든 청나라 백성뿐만 아니라 주변 민족들이 준가르부 멸족을 들어 건륭제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외몽고]], [[일리 강|일리]]를 중국의 영역으로 들여온 것은 바로 건륭제의 업적이다. 청나라 고유영토였던 만주에다가 명나라 영토를 더했던 강희제 시대의 청나라 영토에서 40% 정도를 늘려놓았다. 다만 일리는 러시아에 잃어버리고, 외몽고는 이후 분리 독립한다. 이런 확장이 지금에 봐서는 엄청난 전비 지출 및 이후 점령지 관리 비용 증가로 청나라의 멸망의 한 원인이 된다고 보기도 한다.[* 준가르 멸족의 경우는 국방비 절감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라서 이런 비판이 합당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베트남과 태국, 미얀마 등 동남아 국가들과의 분쟁은 특별한 성과 없이 막대한 전비만 낭비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어떤 대제국도 이러한 확장 후에 쇠퇴가 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건륭제 개인의 오판이나 실책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영웅사관적 관점이다. 건륭제가 여러모로 강희제나 옹정제보다 사치를 좋아하고 과시욕이 강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건륭제의 사치는 주로 서화나 도자기와 같은 예술품에 한정되었으며[* 이 컬렉션은 [[국립고궁박물원|대만고궁박물관]]에 고스란이 모셔져 있다.], 진짜로 국가재정에 무리를 줄 수 있는 토목공사는 거의 하지 않았다.[* 건륭제가 추진한 대규모 토목공사는 [[이화원]] 정도가 있고, 건륭제 시절의 청나라 1년 재정의 1/10정도인 480만냥 정도를 들였다. 다만 이것은 물이 부족한 북경에 저수지를 건설해서 물공급원을 확충하는 의미도 있었기 때문에, 사치로만 보기는 힘들다.] 당시 청나라의 재정은 황제 건륭제 개인의 예술품 수집욕 때문에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고, 건륭제의 사지품 수집 때문에 청나라가 쇠퇴했다는 주장은 [[침소봉대]]나 다름 없다. 또한 이런 건륭제의 과시욕과 수집욕이 옹정제의 금욕적 정치와 비교되기는 하지만, 옹정제식의 독재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중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 옹정제 자신이나, 그 신하들의 피로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결과적으로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나 아들 건륭제보다도 훨씬 단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건륭제가 재위 초창기에 아무 생각 없이 신하들을 방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옹정제가 태묘에 같이 가자며 신임했던 장정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 건륭제가 할아버지 강희제를 본받아 강남순방을 하면서도 할아버지와는 달리 백성들에게 비용을 징수, 강남을 황폐화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건륭제는 총 6차례에 걸처 강남을 순행했는데, 준가르부 토벌이 마무리된 청나라 중기부터는 청나라는 재정이 풍족하여 건륭제는 오히려 가는 곳마다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그 이유는 강남에는 반청감정이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민심을 토닥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출처 중국어 위키백과 [[https://zh.wikipedia.org/wiki/%E4%B9%BE%E9%9A%86%E5%B8%9D%E5%8D%97%E5%B7%A1|건륭제남순]]][* 결국 청나라는 강남(현재의 절강성, 강소성, 안휘성) 보다도 훨신 더 서쪽의 호북성에서 발발한 [[백련교도의 난]]과 그 남쪽의 광동성에서 벌어진 [[태평천국의 난]] 때문에 큰 멸망 테크를 걷게 된다.] 건륭제 시절까지만 해도 청나라 조정은 늘어난 재정을 주체를 못해서[* 강희제 중기인 1685년 3100만냥이던 청나라 세수는, 옹정제 시대 (1725)년에는 3500만냥, 건륭제 중기인 1766년에는 4800만냥까지 늘어났다. 건륭제는 감세정책을 폈고, 건륭제 말기 1791년에는 4300만냥으로 줄어들었다. [[https://www.sohu.com/a/279136812_99979077|#]]] 계속 세금을 깎아주는 정책을 폈고, 막대한 무역흑자를 볼 수 있는 서방과의 교역도 매우 꺼릴 정도로 재정이 풍족했다. 건륭제 시절 전대인 강희제나 옹정제보다 민생이 어려워진 것은 건륭제의 원정이나 사치로 인한 재정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의 폭발적 증가 때문으로, 강희제 초에 2억에 불과했던 청나라 인구는 건륭제 말기가 되면 4억에 달해서 100년만에 인구가 두배로 뛰었기 때문이다. 아래 나오는 황무지 사업이 옹정제 시절보다 지지부진한 것은 이미 옹정제 시절 농사 짓기 좋았던 땅들은 모두 개간되었고, 건륭제 시절에 남은 땅들은 거의 쭉정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아래에 일부 재중 선교사들의 견해로 중국에 대한 평가가 서양에서 내려갔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정작 서방 전체에서는 당시만 해도 중국은 동쪽에 있는 초강대국이었다. [[가경제]] 시기에 프랑스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만 하더라도 "잠자는 사자를 깨우지 마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에서 당시 중국에 대한 평가에서 드러난다. 중국의 쇠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던 시기는 건륭제나 가경제 시기가 아니라 그 다음인 [[도광제]]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의 재정이 박살나게 된 원인은 가경제 초기(실질적으로 건륭제의 말년 )에 발생한 [[백련교도의 난]] 및 [[묘족]]의 반란이 거의 10년을 끌어 전비만 수억냥을 지출할 정도로 악전고투했고, 1810년대부터 중국에 [[아편]]이 유행하면서 무역수지가 적자로 들어서고, 아편중독자들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여 현대로 말하면 "쌍둥이 적자"를 기록하면서 청나라가 국가막장테크를 탔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건륭제의 치세를 살펴보면 대외적으로는 가장 크고 화려한 시기였다. 물론 이런 확장으로 인한 과다한 전비지출과, 풍요로 인한 관료 기강의 해이가 시작되었으나, 적어도 건륭제 시기에는 심각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역사가 [[진순신]]은 그의 저서에서 건륭제 시대를 '가장 행복했던 세대'라고 기술하였다. === 부정적 평가 === 옹정제 때까지 쌓아놓은 [[국부]]가 이후 건륭제의 팽창정책으로 건륭제 말기엔 이미 청나라 쇠퇴의 전주곡을 울렸다는 것이 요지이다. 또한 옹정제가 잡아놓은 관료들의 기강도 건륭제시절부터 해이해져서 부패나 축재도 늘어났다는 것이다. 겉으로의 화려함이 과시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말년의 건륭제는 신하들과 상인, 거부들로부터 금전을 끌어모으는 데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옹정제 시절부터 강력하게 추진된 황무지 개간 사업에서 아버지와 달리 자신에게 올라오는 보고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해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었다는 말도 있다. 실례로 옹정제는 초기 개간의 성과가 좋자 크게 기뻐했으나, 계속되는 보고에 '이렇게 빨리 개간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의심해 실상을 자세하게 조사했고 그에 따라 엄청난 토지가 서류에만 등록된 개간지임을 밝혀냈다. 이는 관료들이 황무지를 개간지로 등록해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내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관료들은 격분한 옹정제에게 갈렸다. 허나 건륭제는 '나만 한 군주가 어디 있어'라며 [[자뻑]]에 빠져 살았다. 또한 [[서양]]에서 중국에 대한 평가가 하락하던 것도 건륭제 시기였다. 건륭제의 할아버지였던 [[강희제]]는 '''[[가톨릭]] 군주가 아니라는 점만 빼곤 최고의 군주'''라는 극찬과 함께 엄청난 학구열과 뛰어난 군공과 정치력을 선보여 서양 선교사들을 감격시켰고, 그 영향으로 서양에서 중국학이 널리 유행하게 한 최고의 명군이었다. 건륭제의 아버지였던 [[옹정제]]는 '''가톨릭을 탄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능력있는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여기에는 가톨릭을 안 믿는데도 윤리 의식이 뛰어난 동방의 대국이 있다더라는 신기함도 한몫 했다. 즉, 가톨릭 따위 없어도 대국이 될 수 있다는 표본으로 동방의 대국인 청나라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가톨릭의 교리와 유교를 엮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다만 이는 계몽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한 방어라기보다는, 중국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의도가 더 강했다. 어느 날 갑자기 "너희 생각은 다 틀렸다"고 하는 것보다는, "공맹께서 하시던 말씀으로 보더라도 가톨릭은 설득력이 있다"고 하는 게 훨씬 중국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 이러한 경향을 '보유론(補儒論)'이라 하는데 명나라 시대의 예수회 선교에서부터 나타난 경향이며, 훗날 조선에서 특히 많은 공감을 받았었다. 게다가 선교사들이 생각하기에도, 가톨릭은 인류 보편적 논리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쪽이 훨씬 와닿는 설명이기도 하고. 실제로 천주교에서 제사를 금지하자 조선에서 배교자들이 많이 나왔다는 점도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이에 따라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프랑스의 [[루이 14세]] 같은 절대 [[왕권]]으로 유명한 왕들조차 [[중국 문화]] 애호가임을 자처하며 자신들을 중국 황제로, 주변 귀족들을 중국 [[문관]]에 비유하는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고평가가 이루어진 시기가 강희 - 건륭 연간의 청나라였다. 이때의 중국 문화 애호를 가리켜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고 부른다. 결정적으로 서양 선교사들이나 유럽 인문학자들의 평가가 강희 - 옹정 시대엔 가톨릭을 믿지 않거나 탄압했지만 뛰어난 무공, 검소함, 국가 체제 정비 등을 이유로 [[로마 제국]] [[오현제]]인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등과 비견되는 명군이라는 찬양일색에서[* 참고로 옹정제는 유럽 현지에 가톨릭 신자들을 잡아다 처형한다는 악평까지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문에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옹호론까지 등장했다. 비록 순교자들을 탄생시켰지만 검소하고 정력적이며 능력 있는 황제라는 것. 그리고 여기서 나온 것이 일명 [[오현제]]들과의 비교.] 건륭 시대엔 당시 유럽에서 과시욕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막장으로 통하던 루이 14세로 절하된 점이야말로 가장 적나라한 평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 그런데 이 비교들은 은근히 황제들의 성향과 잘 어울린다. [[강희제]] - [[트라야누스]], [[옹정제]] - [[하드리아누스]] 그런데 갑자기 [[건륭제]] - [[루이 14세]] 크리.][* 루이 14세 이전에 프랑스는 유럽에서 강력한 국가였지만,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목상 유럽의 유일한 제국 밑에 있었다. 거기에 신성 로마 제국 황위를 차지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여러 강대한 세력들과 혼인관계를 형성하면서 원 신성 로마 제국의 지역인 독일을 벗어나 스페인까지 통치하는 등 유럽 제1의 위치에 있었다. 이에 루이 14세는 이전에 축적한 자본을 가지고서 팽창할 당의성이라도 있었다.(이후 가톨릭적인 성향으로 인하여서 위그노들을 탄압하여 상업은 붕괴시켰지만, 이것은 신/구교간의 차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프랑스의 대다수는 가톨릭이었고, 왕은 다수의 의견을 청취한 것에 불과하다.)] 건륭제에게 쫓겨다나시피 해서 중국을 떠난 매카트니는 "중국 제국은 늙고 미친 일급 군함인데, 유능하고 추호도 방심하지 않는 관리들이 과거 150년 동안 이 배(중국)을 용케 물에 떠 있게 하고 그 외관상의 덩치만으로 이웃들을 위압해왔지만, 능력이 부족한 사람[* 누구를 뜻하는지는 당연하다. 이 당시 황제는 건륭제였다.]이 갑판에 올라 명령권을 갖기만 하면 배의 규율이나 안전과는 고별이다. 그 배는 아마도 철저히 파괴되어 가라앉지는 않고, 난파선으로 한참 떠돌다 산산조각 나서 해안으로 밀려들 것이다. 그러나 그 배는 이전의 기반 위에서 절대 다시 건설될 수 없을 것이다."[* 피터 C. 퍼듀작 중국의 서진에서 인용]라고 평가했다.[* 물론 이것은 78000파운드의 거액의 예산을 들여 중국에 통상 사절로 왔다가 별무성과로 떠난 매카트니의 개인적인 감정을 고려해야 한다. 매카트니 자신이 여러 영국 식민지에서 총독으로 식민통치를 하던 인물로, 비서구권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인물이었고, 특히 삼배구고두에 관련된 논란에서 보듯이 당시 중국인들의 세계관이나 중국 전통의 조공체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매카트니는 애당초 중국과의 통상을 위해 온 사절단이었는데, 목적 달성에 실패했고, 그 실패를 자신이 아닌 청나라 탓으로 돌리려는 이유도 있는 것이다.] 당장 건륭제 때 파견된 조선 사신들이 남긴 기록만 봐도 당시 "황제에 대한 비방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예전보다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진 것 같다."고 평한 걸로 봐서는 인심도 그다지 얻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연행사로 다녀왔던 실학자 [[홍대용]]은 [[강희제]]는 '''실로 영걸한 황제'''라면서 '''[[정조(조선)|정조]]와 노론들 앞에서''' 칭송할 정도였지만, 원명원[* 그 후인 [[제2차 아편전쟁]] 당시에 영불연합군에 의해 파괴당했다.]이 사치스러웠던 점을 들어 건륭제는 깠다. 그리고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와는 달리 서방을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강희제는 발전된 서방의 과학기술에 관심을 보였지만, 건륭제는 영국 사신들이 바친 지구의, 궤종시계 등을 보고 "이런 장난감은 어디다 쓰겠냐"고 비웃고, "천조(청나라)는 지대물박이라 서양 오랑캐의 기술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다만 예술애호가답게 사실주의적인 서양식 회화에 대한 관심은 무척 보였으며, 그리하여 선교사출신 어용화가인 주제페 카스틸리오네는 건륭제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청나라의 여러 고위인사들의 초상화를 남겼다. 특히 총포금지령을 내려서 군대의 화약무기 개발을 금지했는데, 이는 중국의 화기발달을 늦춰 이후 서양 세력에게 호되게 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 언론탄압 및 사상통제 ==== 청나라는 기본적으로 만주족이 최상위 지배층이 한족을 지배하는 구조였고, 명나라 시절까지만 해도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은 한족에 복속했던 이민족이었다. 이렇게 오랑캐로 불리던 만주족이 여러가지 호조건이 맞아 떨어져 중원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이민족 지배에 대한 한족의 반발은 피할 수 없었다. 여러 선비들이 정통중화와는 결이 다른 이민족이 중국을 지배하는 현실을 개탄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글을 쓰기도 했으나, 이들은 가차없이 처단되었다. 건륭제 뿐만 아니라 명군으로 추앙받던 강희제나 옹정제, 심지어는 청나라 말기에도 만주족 황실에 대한 비방에는 전혀 관용이 없었다. 이는 건륭제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문자의 옥]]이라는 청나라의 언론과 사상 탄압은 건륭제 시대에 들어 더 심화되었다. 그렇다 보니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글이 반청사상으로 해석될까봐 몸을 사리게 되었다. 이는 사실 건륭제뿐만 아니라 성군이라고 추앙받던 강희, 옹정제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으로 옹정제는 사사정이 시경에서 인용한 維民所止(유민소지) 문구를 유와 지가 자기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에 있는 변을 뗀 것이니 자기를 참수할 뜻이 있다는 억지를 써서 죽였는데, 건륭제 시절에는 이런 문인이나 학자에 대한 억압이 훨씬 강화되었다. 건륭제 시기에는 문자의 옥이 활발히 일어나서 청나라 기간에 벌어진 문자의 옥 전체 사건의 80%가 건륭제 시기에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명나라가 망한지 1세기나 지난 시점에서 갑자기 반청운동이 일어났을 리는 없을 텐데 그럼 왜 일어났냐면 '''사소한 걸로 건륭제가 침소봉대했기 때문이다.''' 사사정 사건이 더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로 별의 별 이유로 문자옥이 마구 벌어졌고 오죽하면 이 시기에 이르자 청나라 학자들 사이에서는 고서만 죽어라 파고드는 학문인 고증학이 유행했으며 단순한 서신을 주고받는 일조차 꺼렸는데 서신을 주고받으면 문서가 남게 되고 어느 순간에 그 문서들에 적힌 글자 어디가 트집잡혀 죽을지도 모르니 서신을 주고받는 일을 꺼렸고 설령 서신을 주고받더라도, 조선 사신단과 필담을 하고 나면 문서를 읽고 나서 불태우는 게 국룰이던 시대였다. 여기에 건륭제 자신도 문자옥을 남발하기를 꺼리지 않아 심지어는 자기를 불쾌하게 만든 사람을 문자옥에 얽어넣어 보복했을 정도다, 문제는 워낙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람들을 때려잡다 보니 사람들의 불만도 올라가고 문자옥 앞에선 한족과 만주족이 평등했기에 한족도 때려잡았지만 만주족도 때려잡았다. 거기다 아부하려는 사람들조차 문자옥에 걸려 죽기도 했으니 건륭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했을지... 건륭제에 대한 비판자들은 저렇게 서슬퍼런 문자옥이 수십년간 이어지다 보니 그 시간동안 도저히 정상적인 학문 연구나 문학 활동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가딱하면 죽는 상황에서 어느 누가 학문을 연구하고 문학 활동을 하겠는가? 즉 문자옥으로 인해 건륭제 자신이야 목표인 황권 강화를 이루었을지는 몰라도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반대파는 물론 자기에게 아부하는 사람들, 동족인 만주족들까지 때려잡은 병크에[* 오죽하면 문자의 옥을 피해 한족으로 위장하는 만주족이 속출할 정도였다.] 중국의 학문과 문학의 발전까지 가로막은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이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이 청나라는 문화적 수준이 낮고, 머리수에서 소수인 만주족이 지배층인 정권이다보니 이렇게 정통성을 건드릴 수 있는 문제에 관대할 수 없었다. 건륭제 시절에는 이런 탄압 때문에 반만주족 정서는 수면아래 가라앉았지만, 아편전쟁 이후에 청나라의 행정력이 약화되자, 북경 정권의 힘이 닿지 않는 남부 (특히 광동성)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태평천국의 난]]으로 타오르고 결과적으로 청나라의 멸망까지 이르게 된다. ==== 말년의 혼미 ==== 노년에 접어든 재위 말년부터 통치의 대부분을 만주족 측근 [[니오후루 허션]]에게 맡겼는데, 이 허션은 대단한 재주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 이사람에 대한 여러 일화들이 많은데, 임기응변이나 꾀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허션은 건륭제가 50대에 접어든 시기에 벼슬을 시작하여, 20대에 이미 국무총리격인 의정대신 [* 다만 명청시절에는 [[승상]]직을 폐지했기 때문에 의정대신이 국무총리와 1-1로 매치되지는 않는다. ]에 올랐다. 워낙 승진이 빠르고 건륭제의 무차별적인 총애를 받아서 나중에는 건륭제의 [[동성애]] 연인이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다. 처음에는 건륭제의 기대를 만족시키며 신임을 받고 벼슬이 점점 올라갔다. 건륭제가 70대에 접어들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쇠약해지자, [[권신]]노릇을 하며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했다. 이때 허션의 벼슬은 화전대학사 [* 조선으로 치면 [[대제학]]정도가 되겠다. ]와 군기대신(국방장관)을 겸직하여 병권을 쥐고, 실질적인 황제 노릇을 하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중신들을 모조리 몰아내거나 숙청하고 독재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허션이 실질적인 황제 노릇을 한 기간을 24년으로 잡기도 하는데, 건륭제 재위기간의 거의 1/3에 해당한다. 허션이 군기대신으로 재직하는 동안 정규군이었던 [[팔기군]]과 [[녹영]]은 점점 녹슬고, 결과적으로 허션 재임전에 준가르부를 멸망시키고 서역을 평정했던 막강한 청나라군은 허션 재임 당시 발생한 [[백련교도의 난]]에 쩔쩔매면서 진압에 10년이 걸렸다. 허션은 매관매직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청나라판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다. 즉 관리가 징계를 받게 되었을 때, 돈을 내면 사면을 받고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청백리들은 사소한 실수로 중형을 받고 처형되거나 파직되었는데, 탐관오리들은 돈을 내고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러 선비들이 허션의 전횡을 비난하는 상소문을 건륭제에게 내었으나, 건륭제는 말년에 상소문을 볼만큼 정무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고, 허션이 이를 보고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을 역적으로 몰아 처단했다. 안그래도 [[문자의 옥]]때문에 언론의 자유가 위축된 청나라에서 이런식으로 허션의 문제점을 알릴 경로가 차단되니 건륭제는 허션의 전횡을 알 수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허션은 건륭제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호가호위]]를 하며 엄청난 권력 및 축재를 할 수 있었다. 가경제 집권후 조사된 허션이 축재한 재산은 1100만냥이었는데, 이것은 황실 예산의 15년치였다고 한다. 게다가 국법을 어기고 몰래 서양과 교역을 주선하여 뒷돈으로 챙긴 엄청난 액수의 영국, 프랑스의 금은화, [[회중시계]]나, [[벽시계]]와 같은 신기한 서양 물품 수백점, 여기에 600명이 넘는 첩도 거느렸다고 한다. 건륭제 말기 청나라 1년 예산이 4000만냥정도였으니, 1년 정부예산의 25%를 개인재산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중 상당수는 건륭제가 허션에게 선물로 준 것도 있다니, 진짜 애인설이 그럴듯 하기도 하다. [* 또는 허션이 건륭제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는데,가경제가 건륭제의 실책을 모두 허션에게 뒤집어 씌우고, 건륭제의 비자금을 허션의 개인적인 부정축재로 몰아 처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근거는 이렇게 몰수된 재산이 국고가 아닌 가경제의 [[내탕금]]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허션은 권력이동기에 처신을 제대로 못해 죽은 것이니, 아주 무고한 죽음은 아니다. ] 허션은 건륭제가 수렴청정하던 [[가경제]]가 재위기간에도 자리를 유지하다가, 태상황 건륭제가 붕어하자 실권을 잡은 [[가경제]]에게 숙청된다. 가경제는 이런 허션을 [[능지형]]으로 다스리려고 했으나, 허션의 며느리였던 이복누이 고륜화효공주가 간곡히 부탁해 자살형으로 수위를 낮추었다. 하지만 허션이 20년간 타락시킨 청나라 관료조직 및 군대는 이후 청나라가 서양세력에게 얻어터치는 원인이 된다. == 일화 == 현대에 와서는 학자들에게 비판도 받고 있지만 그래도 강희-옹정 치세를 이어받은 건륭제때 청나라의 국력이 가장 왕성할 때이기도 했고, 풍류를 좋아하고 장난도 치는 친근한 이미지 때문인지 각종 매체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건륭제 당시부터 내려오는 민간 [[야사(역사)|야사]]의 숫자도 엄청난 수준. 전해지는 일화들을 보면 확실히 성격이 재미있는 사람이긴 했다. 특히 밀복을 하고 사람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렇게 백성들 속에서 놀다가 느닷없이 신하들 집으로 찾아가서는 온 식구들이 넙죽 엎드리고 혼비백산하는 꼴을 보는 변태적인 취미가 있었다. 각종 혈기왕성한 젊은 명군으로서의 묘사에서도, 흥청망청 황제놀음에 취한 중년의 꼰대 내지 개그캐로서의 묘사에서도 꼭 빠지지 않는 필수요소가 바로 이 부잣집 나리 코스프레. [[옹정제|현상유지만 하는 데에도 황제를 갈아넣어야 할만큼]] 청 제국의 황제보다는 풍류를 아는 유쾌한 부자로 살았으면 더 좋았을지도. 건륭제가 강희제, 옹정제 시절부터 권력다툼으로 형제, 삼촌들이 죽어나가고 아버지도 일하느라 건강을 심하게 해치다 못해 결국 죽어버린 것을 보며 자란 인물임을 감안하면, 이런 다채로운 면모는 온 힘을 다해 성현의 도를 추구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비하면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흠정만주원류고]]》를 쓴 황제로 알려져 있다. 아내들과 딸들의 지위를 올려주는 것은 후한 편이지만 반대로 아들들의 지위를 올려주는 것에는 다소 매정한 편이다. 가장 총애하는 [[효의순황후]]의 가문을 2번이나 대기(抬旗)[* 팔기가문에 속하는 기(旗)를 변경시켜주는 것을 의미한다.]시켜줬고, 측실부인 소생의 공주들에게조차 화석공주가 아닌 고륜공주로 승격시키는 경우가 있었지만, 아들들 중에서 건륭제로부터 직접 친왕 작위를 받은 아들들은 몇 없다.[* 17명이나 되는 황자들 중에서 5황자 영기, 8황자 영선, 11황자 영성, [[가경제|15황자 영염]]만이 건륭제 살아생전에 친왕 작위을 받았을 정도였다. 결국 아버지 건륭제로부터 봉작을 받지 못한 황자들은 이복형제인 [[가경제]]가 즉위하고 나서야 겨우 봉작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건륭제가 아들들에게 친왕직을 안준 이유는 조부 강희제 시절 아버지 옹정제와 숙부들의 궁정암투를 보고 자랐고, 본인도 차기 황위를 두고 셋째형 홍시에게 도전을 받았던 과거 때문인 듯하다. 알다시피 청나라는 황자들에게 전부 친왕직을 주지 않았는데, 친왕직을 준다는 건 그만큼 후계자 후보로 생각한다는 뜻이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당장 건륭제부터가 옹정제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친왕으로 책봉되었다. 친왕이라는 작위 자체에 후계를 비롯한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되다보니, 건륭제 입장에서도 아들들에게 친왕직을 주는 걸 꺼릴 수밖에 없었을 것. 실제로 건륭제 시절 친왕으로 책봉된 황자들 중 8황자 영성을 제외하면 5황자 영기나 11황자 영성도 후계자 후보로 추정되던 황자들이다.] 말년에 엄청나게 해먹은 권신 [[니오후루 허션]]이 사실은 건륭제의 동성 연인이라는 떡밥이 있다. 당장 본 문서가 '양성애자'라는 분류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 한편으로는 청나라 황실인 아이신기오로 씨족이 아님에도 버이서에 오르고 죽어서는 군왕작을 추증받을 정도로 허션 이상의 권세를 누렸으나, 건륭제가 퇴위하던 해에 요절한 [[부찰 복강안]]이 실제로는 건륭제의 혼외자라는 떡밥도 있다.[* 건륭제의 첫 황후였던 [[효현순황후]]의 친정조카로 [[부찰 부항]]의 아들이다. 유아기 때부터 황궁을 들락거리며 성장해서, 고모부인 건륭제에게 유달리 사랑받았다. 복강안말고도 부찰 부항의 차녀가 건륭제의 며느리가 되는 등, 부항의 자식들은 황족과 혼인하며 청대 최고의 명문가로서 영예를 누렸다.] 현대 매체에서 아주 빈번히 묘사되는건 아니지만 대중들과 문학가들에게는 흥미로운 떡밥으로 꼽힌다. 동성애야 딱히 검증할 방법이 없지만 다른 형제들처럼 복강안도 부마[* 공주의 남편, 즉 건륭제의 사위]로 삼으라는 제안을 건륭제가 허허 웃어넘겼다는 일화라던가, 초상으로 남아있는 복강안의 외모[* 특히 능글맞은 눈매]가 아버지 부항이나 부찰 가의 다른 형제들보다는 옹정제나 건륭제와 비슷해보이는 등, 여러가지로 정황이 짙어서 떡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베이징시]]에 있는 [[궁주펀역]] 인근 공주묘가 건륭제의 수양딸이 묻힌 곳이라는 설이 있으나 현재도 입증되지 못하였다. 흥미롭게도 동시대에 재위한 군주들 중 바로 옆 나라인 조선의 정조와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는데 건륭제가 1799년 2월 7일(양력)에 먼저 사망한 후 1년 6개월 후인 1800년 8월 18일에 정조가 사망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시기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서 본인 대가 나라의 전성기 혹은 중흥기였고 본인 사후 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고 그 발단이 본인에게 있다는 점이다. 다만 정조는 재위기간 내내 나라가 기울게 할만한 실책은 없었고 단지 김조순을 세자의 후견인으로 밀어준 것이지만 그 김조순도 마냥 권신 행세를 한건 아니다. 반면 건륭제는 자기 실책도 있어서 자기 재위기부터 쇠퇴의 징조가 나타났다. 심지어 아들인 가경제도 아버지 못지않게 문제가 많았다. 물론 정조도 순조가 영 못한 왕이라 자식복 좋은 건 아니었지만 순조는 그래도 변명거리가 있다. == 각종 매체에서 == * 1999년 드라마 <옹정황제>에 등장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열하로 떠난 사냥에서 아버지 4황자 윤진(훗날의 [[옹정제]])이 몸이 안 좋아서 불참한 사이 제법 많은 동물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생포해낸 8황자 윤사와 가장 많은 동물을 잡은 13황자 윤상 중 누구에게 상을 줘야 하는지 강희제가 홍력에게 묻자, 아버지 윤진의 만류에도 더 많은 짐승을 잡은 윤상에게 주는 것이 옳다며 또박또박 자신의 주장을 읊어서 강희제가 이런 홍력을 매우 예뻐하며 아들에게 주려던 상을 손자에게 줘버린다.[br]이후 윤상과 14황자 윤정이 주먹질을 하다 걸리고 이와중에도 말대답이나 하는 윤정에게 강희제가 칼을 겨누면서까지 역정을 내다 혼절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윤진이 동복동생 윤정을 포박해서 어머니랑 함께 잘못을 빌러왔는데도 오히려 홍력이 좀 데려오라 하면서 본격적으로 손주 사랑이 묘사된다. 눈밭에서는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며 대청 황제와 내관과 시위들까지 눈밭에서 휘청이게 만드는 깨알같은 재롱도 보이고, 더 커서는 강희제가 백발 노인의 몸으로 손자에게 손수 무예를 가르치는 걸 보고 신하들이 황상께서 아직 정정하시다며 감탄하기도 한다. 극중에서 등장할 때마다 자식들 싸움질에 혈압만 오르며 고통받는 강희제가 아무 근심 없이 진심으로 웃는 장면은 전부 홍력과 보내는 시간이다. * 한국에서는 1998년 드라마 <[[황제의 딸]]>의 건륭제가 유명하다. 황제의 딸에서 [[건륭제(황제의 딸)|건륭제]]는 용서의 아이콘 혹은 주인공 일행이 친 사고를 수습해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나온다. 그 때문에 건륭제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드라마에서 건륭제로 나온 배우인 장철림은 쌍룡회나 철치동아 기효람 등에서도 건륭제를 맡았던 건륭제 전문 배우로서 북경 전영 학원 출신의 연기파 배우다. 워낙 장철림이 불같으면서도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잘 연기했기 때문에 자녀 및 신하들에게 다소 박정한 면이 있었던 건륭제의 본래 모습이 많이 희석되기도 했다.[* 환주격격 시즌2에서 향비가 나오는데 아마 경요가 서검은구록 내용을 가미한 거 같다. 서검은구록 향향공주가 바로 향비다.] * 1997년 드라마 건륭대제에선 강대위가 맡은 증정과 연적 관계로 나온다. 증정이 무림 고수라는 설정. * 2011년 드라마 [[옹정황제의 여인]]에서는 아버지인 [[옹정제]]가 메인이다 보니 본인은 [[건륭제(후궁 시리즈)|4황자 홍력]]으로 나오며 마지막화에는 아버지 사후 황제로 즉위한다. 후속작인 2018년 드라마 [[여의전]]에서는 메인으로 등장. * 2018년 드라마 [[연희공략]]에서 [[건륭제(연희공략)|메인 남주]]로 나오며, [[여의전]]과 같은 배경이나 이쪽은 여의전보다는 훨씬 나은 성격이다. 주인공에게는 처음에는 주인공이 충성하는 황후를 박정하게 대하는 일로 매우 싫어하는 존재였으나 나중에는 주인공의 사랑을 얻고[* 주인공인 [[위영락]]이 임신했을 때 직접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싶다고 작품에서 인증했다.] 승리자가 된다. 성격도 [[츤데레]]에 가까운 편이며 주인공의 사랑을 얻은 뒤에는 과도한 집착이나 의심을 하지도 않는다. 의처증 수준으로 집착했던 후궁여의전과는 다르다. * 1955년 소설 [[서검은구록]][* 우리나라에서는 청향비로 소개되었다.]에서도 건륭제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건륭제가 한족인데 아기 때 황후가 딸을 낳자 한족 대신의 아들과 바꿔치기를 해서 태후에 올랐다는 설정이다. 한족 출신인데 아기를 바꾸면서 황족이 되었다는 전설을 토대로 하고 있다. 사실 정사에서도 건륭제는 [[효강장황후|증조할머니]]가 한족 출신[* 정확히는 한화된 여진족의 후손이지만, 조상 대에 이미 한화된 만큼 한족의 혈통이 많이 섞였을 것이다.]이었기 때문에 미약하게나마 한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건륭제가 실은 완전히 한족이라는 전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주인공인 진가락의 친형으로 그가 한족이라는 증거와 교환 및 진가락의 연인이자 히로인 객사려(향향 공주)와의 결혼 등의 대가로 한족의 나라를 만들기로 계약하나 태후가 그 일에 대해 알아채고 황제 자리에서 몰아낼 것 같자 대뜸 배신을 때린다. 하지만 이 사실을 눈치챈 객사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진가락이 건륭제의 배신을 눈치채고 홍화회 동료들과 떠난다. 작중에 주인공 진가락이 이끄는 홍화회에 사로잡혀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을 당하는 장면도 있는데 김용은 이 부분에 덧붙여 쓰기를 '''이때 손모가지가 날아갔어야 명작에 도장 찍고 글자 끄적거리는 미친 짓을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까기도. 이외에 불륜까지 저질러 사생아 [[부찰 복강안]]을 두는 등 전반적으로 찌질한 악당으로 묘사되고 있다. * 1976년 TVB 판을 보면 정소추가 1인 3역[* 홍력, 진가락, 복강안]을 하는데 의외로 잘 어울린다. * 2020년, <후궁의 법칙>이라는 게임에서 남안 4명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여주인공을 후궁으로 맞이한 황제. * 1981년작 TVB 드라마 영웅출소년에서 황일화가 애신각라 홍력 역을 맡았다. * 2014년 드라마 [[궁쇄연성]]에 등장한다. 비중은 적지만 경공이 뛰어나고 공정한 편이다. * 2018년작 TVB 드라마 <[[천명]]>에서는 가경제에게 양위한 후의 태상황으로 등장하는데, 시골 전직 이장님 같은 깨방정 노인으로 그려진다. 황위를 물려준 후에도 화신을 총애하며 화신의 쌈짓돈으로 아들들 몰래 오만군데 싸돌아다니며 YOLO를 누리고 있다. ~~황궁 시위들의 도박판에 난입하여 같이 주사위를 굴린다거나... 만리장성에 놀러갔다가 군부대에 찾아가 줄다리기를 하며 논다거나... 딸내미랑 외손주 보러 사돈댁에 불쑥 들이닥쳐 아이들이랑 놀다가 가경제가 쫓아와서 제발 궁에 돌아오라고 사정한다거나...~~ 허수아비 황제나 다름없는 아들 가경제를 자꾸만 무안하게 만들며 가경제가 화신에 대해 이를 아득바득 갈게 만들지만, 의외로 건륭제 스스로도 화신이 마냥 깨끗한 놈은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어서, 가경제가 황제 노릇 좀 해보겠다고 태상황이 되었는데도 실세로 군림하는 자신에게 서서히 중독시키는 독약을 모른 척 먹은 후 가경제가 화신을 족치려는 공작에 힘을 보탠다. 하지만 화신과 친하게 놀던 옛 정을 모른척하지 못하여 화신을 제 손으로 죽이기를 포기했고, 가경제의 원망 속에 독이 몸에 퍼지며 사망한다. [[분류:청나라의 황제]][[분류:1711년 출생]][[분류:1799년 사망]][[분류:베이징시 출신 인물]][[분류:퇴위한 군주]][[분류:서출]][[분류:중국의 양성애자]][[분류:불교도 군주]][[분류:중국의 티베트 불교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