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명 황제)]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건문제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명 황태자)] ---- [include(틀:명의 황자)]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명 제2대 황제[br]{{{+1 혜종 양황제 | 惠宗 讓皇帝}}}'''}}} || ||<|2> '''출생''' ||[[1377년]] [[12월 13일]] || ||[[명나라|명]] [[난징시|남경 응천부]] 황궁[br](現 [[장쑤성]] [[난징시]] 쉬안우구)|| ||<|2> '''즉위''' ||[[1398년]] [[7월 8일]] || ||[[명나라|명]] [[난징시|남경 응천부]] 황궁[br](現 [[장쑤성]] [[난징시]] 쉬안우구)|| ||<|2> '''실종''' ||[[1402년]] [[7월 13일]] (당시 25세) || ||[[명나라|명]] [[난징시|남경 응천부]] 황궁[br](現 [[장쑤성]] [[난징시]] 쉬안우구)|| || '''능묘''' ||없음[* 실종된 이후 언제 사망했는지도 미상이고,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서 능을 조성할 수 없었으므로 능호도 없다.] || ||<|4> '''재위기간''' ||'''{{{#f9d537 명 황태손}}}''' || ||[[1392년]] [[10월 6일]] ~ [[1398년]] [[7월 8일]] || ||'''{{{#670000 제2대 황제}}}''' || ||[[1398년]] [[7월 8일]] ~ [[1402년]] [[7월 13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주(성씨)|주(朱)]] || || '''휘''' ||윤문(允炆) || || '''부모''' ||부황 [[주표|흥종 강황제]][br]모후 황태후 여씨[* 명나라 [[황태자]] [[주표]]의 후궁이다. 원래 황태자비가 상우춘의 여식인 '''효강황후 상씨'''인데 태자비 시절에 죽었기 때문에 태자비 자리가 비었다. 그러나 여씨가 황태자비가 된 적은 없다. 1399년에 황태후로 올랐으나 1402년 정난의 변으로 인해 황태자비 신분으로 격하하였으며, 이후 '''황수의문황태자비(皇嫂懿文皇太子妃)'''의 호를 받았다.] || || '''형제자매''' ||5남 4녀 중 차남 || || '''배우자''' ||[[효민양황후]] || || '''자녀''' ||[[주문규(화간태자)|2]][[주문규|남]] || || '''작호''' ||황태손(皇太孫) || || '''묘호''' ||'''[[혜종]](惠宗)'''[* [[남명]] [[주유숭|홍광제]]가 추증한 묘호로 남명 이전 [[명나라]]와 [[청나라]] 기준으로는 묘호가 없다.] || ||<|3> '''시호''' ||혜황제(惠皇帝)[* [[명나라]] [[영락제]]가 올린 시호. 혜제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이후 남명은 새로운 시호를 올렸고, 청나라는 두 글자를 더한 공민혜황제가 됐는데 약칭은 종전과 똑같이 혜황제 또는 혜제였다.] || ||사천장도성의연공관문양무극인독효[[양(시호)|양황제]] (嗣天章道誠懿淵功觀文揚武克仁篤孝讓皇帝)[* 남명 홍광제가 추증한 시호. 약칭은 양황제 또는 양제이다.] || ||공민혜황제(恭閔惠皇帝)[* [[청나라]] [[건륭제]]가 추증한 시호. 약칭은 혜황제 또는 혜제이다.][* 단, [[명사]](明史)엔 공민제(恭閔帝)로 서술되어있다.] || || '''연호''' ||건문(建文, [[1399년]] ~ [[1402년]])[* 영락제 즉위 후 이 연호를 사용했던 것 자체가 취소됐었다가 [[만력제]] 때 복구됐다. 자세한 설명은 본문을 참고할 것.] ||}}}}}}}}} || [목차] [clearfix] == 개요 == [[명나라]]의 제2대 황제. 황태손으로 [[홍무제]]의 뒤를 이었지만 [[영락제|삼촌]]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실종된 비운의 황제이다. 명나라에서 오랫동안 묘호는 없고 시호는 혜황제(惠皇帝), 약칭 혜제로 돼 있었다.[* [[정난의 변]] 직후 신종(神宗)의 묘호와 효민황제(孝愍皇帝)를 올리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영락제]]가 거부했다. 태묘에 건문제의 위패를 모시고 묘호를 올리면 태묘에 제사를 지낼 때마다 조카에게 절을 해야 하므로, 영락제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묘호를 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태묘에 위패를 모셨다는 뜻이다) 그래도 [[금나라]]의 [[해릉양왕]]이나 [[조선]]의 [[연산군]]처럼 황제나 왕이었던 사실 자체를 부정하진 않아서 혜황제라는 시호를 올린 것이다. 참고로 신종은 훗날 만력제의 묘호가 되었다.] 휘는 윤문(允炆). 연호는 건문(建文)인데, 1399년부터 1402년까지 사용됐는데, 사실상 건문제를 쫓아내고 즉위한 [[영락제]]가 이 연호를 무효화하여 이 시기의 연도를 이전의 연호인 [[주원장|홍무]](洪武)로 표기하도록 했고[* 이에 따르면 1402년은 홍무 35년이 된다. 이렇게 정통성 문제로 새 연호를 쓰지 않으려는 차원에서, 개원이나 황제의 붕어 등으로 대체된 기존 연호를 일부러 계속 쓰는 것을 전문 용어로 '습용'(襲用)이라고 한다. 다른 예시를 들자면, 삼국지에서 연초에 조조가 죽고 몇 달 뒤 한-위 선양이 일어난 220년에 건안 연호가 폐기되었는데, 촉한ㆍ동오는 220년에 연호를 바로 바꾸지 않고 습용했다.] 그 다음 해인 1403년부터 영락의 연호를 쓰게 하였다. 건문이라는 연호는 훗날 [[만력제]] 때인 1595년(만력 23년)에 복구된다.[* 건문제라는 호칭은 그가 사용한 연호인 건문을 따서 부르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정종원년부터 태종 2년까지 건문 연호를 사용하였다. 훗날 [[남명]]의 [[주유숭|홍광제]] 때 추존, 묘호를 혜종(惠宗), 시호를 사천장도성의연공관문양무극인독효양황제(嗣天章道誠懿淵功觀文揚武克仁篤孝讓皇帝)[* 약칭 양(황)제이다. --[[수양제|이 사람]]이 아니다--]로 올렸다. [[청나라]]는 남명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남명 정권에서 정한 묘호와 시호 또한 인정하지 않고, 계속 남명 이전에 쓰였던 '혜제'나 '건문제'로 불렀다. 그러다가 [[건륭제]] 때 건문제가 명나라 때 받은 시호 앞에 딱 두 글자를 추가하여 공민혜황제(恭閔惠皇帝)로 높였고[* 물론 약칭으로 부르면 종전과 똑같이 혜(황)제가 된다.] 묘호를 따로 올리지는 않았다. == 생애 == [[주원장]]의 장손. 아버지 의문태자 [[주표]][* [[흥종]] 강황제로 추존되었다.]와 형인 우회왕 주웅영이 일찍 죽어 [[황태손]]이 되어 제위에 오르게 된다. 아버지 주표처럼 성격이 얌전하고 유순하였다. 야사에 따르면 할아버지인 주원장 홍무제가 유혈 숙청을 자행하자 건문제는 학살을 멈춰달라고 요청하였는데, 홍무제는 "황위는 가시나무 몽둥이 같은 것이니, 내가 생전에 그 가시들을 다 제거해 주겠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주원장은 막판에 어마어마한 숙청을 진행했다. 특히 자신을 도와 싸웠던 공신들과 일족을 대규모로 모조리 숙청하였고, [[전한]]의 [[한고제|유방]]처럼 자신의 일족과 황자들을 차례대로 번왕에 봉했다. 이때 각 지역에 보낸 번왕들은 통치권을 갖진 않으나 장수들 대신 각 지역의 군권을 가지는 형태였다. 이것이 실책이었다. 주원장으로서는 왕실 정통성을 위해 적장자 계승 원칙을 지켜 황태손을 후계자로 했다.[* 사실 홍무제도 4남 주체를 황태자로 삼는 것을 염두에 두고는 있었으나, 계승 원칙을 지킬 것을 주장하는 신하들의 반대와 주체를 태자로 삼을 경우 주체의 두 형이 반발하여 내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현실적 문제로 인해 포기하고 황손을 후계자로 삼았다.] 황손을 황태손으로 봉할 때 주원장은 65세였고 황손은 10살이었다. 당연히 황자들은 대개 당당한 청년, 심지어 중년이었다. 어린 황태손을 후계자로 하면서 황자들을 번왕으로 보내 군사 지휘권을 준 것은 이후 후계 갈등 문제의 불씨를 만들어놓은 것과 같았다. 즉위 후 건문제는 군사력을 가진 숙부들에게 위협을 느끼게 된다. 주원장에게는 무려 스물여섯 명의 황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전원이 번왕이었으니 이것이 앞날의 화근으로 느껴지게 된다. 특히 연왕 [[영락제|주체]]는 가장 큰 경계 대상이었다. 연왕 주체는 당시 명나라 최북방 지역에서 몽골족 침입을 막으며 무인으로 성장 중이었고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주원장이 죽은 직후부터 신료들은 각지 제왕의 세력을 진압할 것을 간언하였고 건문제는 몇 차례 망설이다 결국 삭번을 단행하게 되니 이것이 화근이었다. 건문제는 지방에서 각자 큰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일족들의 영지를 삭감해 중앙에 편입시켰다. 정책 자체로는 적절하다고 볼 수 있으나, 문제는 건문제 스스로도 어리고 문약하며 주변 신하들 역시 정치적 역량이 뛰어난 자는 모두 숙청당한 마당이라 이들 모두 번왕들의 반발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정식으로 번왕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지는 못하고, 불시에 번왕들을 습격해서 한 명씩 잡아가두고 번왕에 대한 처분을 사후에 발표하는 식으로 반발할 틈을 주지 않는 방법을 사용했다. 처음 희생자가 연왕 주체의 동복 아우인 주왕 주숙이었다. 이어 민왕 주편, 상왕 주백 등 여러 제왕들이 유배를 당하거나 제거된다. 번왕들을 잇따라 투옥하고 평민으로 격하시키거나 추방하니, 황제의 처단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왕도 있었다. 이런 방법은 당장 한 사람 한 사람의 번왕을 처리하는데는 효과적일 수 있었지만 중앙 정부의 신뢰도를 추락시켰고 반란의 좋은 명분이 되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습격하려면 마땅히 가장 세력이 큰 [[연나라|연]][[왕]](燕王)인 [[영락제|주체]]부터 제일 먼저 처리해야 했지만, 연왕의 [[강약약강|세력이 큰 것이 두렵다는 이유로 우선 세력과 능력이 약한 왕들부터 처리하는 무능함을 보였다.]] 다른 왕들이 기습당하는 것을 본 연왕은 곧 자기 차례가 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반란을 준비하게 되었으므로 기습으로 반발할 틈을 주지 않은 것도 의미가 없어졌다. 또한 당시 수도인 남경에는 연왕의 아들들이 체류하고 있다가 서둘러 연경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는데, 연왕을 기습하려면 연왕이 방심하게 만들어야 한다면서 아들들을 인질로 잡지 않고 무사히 돌아가도록 방치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결국 전부터 황제의 꿈을 가진 연왕이자 숙부인 [[영락제|주체]]가 황제 주변에 있는 [[간신]]들한테서 미숙한 황제를 구출하는 것이 숙부인 자신의 도리라고 선언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정난의 변]]'''이라 한다. == [[정난의 변]]과 실종 == 건문제의 군대는 초반엔 매우 유리하여 세력으로는 연왕의 군대를 압도했으나, 연왕은 탁월한 군사적 능력과 결단력으로 최단 시간 내에 전력으로 남경으로 직행하여 함락시킨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몇몇 전투에서 패하더라도 위축되지 않고 전략적 목표를 하나하나 달성해 나가고 있었다. 반면 건문제와 그 친위 세력들은 군사적으로 무능해서 어떤 작전으로 연왕을 요격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대한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지 못했다. 특히 건문제 자신의 연왕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에[* 결정적인 승리 상황에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절대로 숙부를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던가 하는 식의 애매하고 나약한 명령을 내렸다.][* 반란을 일으킨 시점에서 연왕은 그저 반역자일 뿐이었기에 죽일 명분은 충분했고, 연왕이 전사하거나 혹은 나중에 연왕을 처형한다고 해서 건문제가 비판받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다. 정 숙부를 죽였다는 비난을 피하고 싶었다면 연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실패했으며 나아가 연왕이 세력을 회복하는 여유를 허용해 버려 점차 수세에 몰렸다.[* 이 건문제는 제태와 황자징이 항상 의견이 갈려서 두 명중 한 명의 의견을 선택해야 했는데 맨날 (결과적으로는) 좋지 않은 선택지를 고른 데다가 이경륭의 경우 황자징의 추천을 받아 정난군을 진압하러 나섰지만 연전연패하자 결국 황자징이 이놈을 죽여야 한다고 청하는 지경이 이르렀지만 건문제는 살려줬다. 하지만 이 이경륭은 막판에 건문제를 배신한다.] 결국 결정적인 영락제의 남경 진격에서 사전에 내통한 궁정의 환관들[* 홍무제가 개국 후에 중점적으로 족친 계층이 공신들과 환관이었다. 환관이 글을 아는 게 발각되면 살가죽을 벗겨 죽이는 등 과거 왕조들이 겪은 환관으로 인한 화를 최대한 막고자 한 정책을 폈으나, 당시엔 이러한 정책이 역효과를 부른 것. 반대로 이 일로 정권을 잡은 영락제는 환관에게 많은 혜택을 부여하였고, 이로 인해 '[[동창]]'으로 대표되는 환관 세력의 비대화를 초래해 명 왕조 막장의 단초를 제공하였다.]이 성문을 열어 수도 [[난징|남경]]이 함락되었고 건문제는 불타는 궁궐 속에서 행방불명 되었다. 일설에는 그때 [[자살]]했다고 전해지고 또는 난전 중에 불에 타죽었다고 한다. 불을 끈 후 그의 아내 효민양황후 마씨의 시체는 환관에게 확인되었으나, 그의 시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전설]]이 나돌게 되었다. 민간 전설 중에는 주원장이 건문제에게 상자 하나를 전해주면서 위기에 처했을 때 열어보라고 했는데, 그 안에서 주원장이 탁발승 때 쓰던 목탁과 바리떼가 나와서 중으로 변장을 하고 도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외에도 건문제가 실은 살아서 도망쳤다는 전설은 많이 있지만, 살았건 죽었건 간에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생사여부는 도저히 알길이 없다. 그런데 남경에서 1978년, 명 시대의 황궁 자리 근처에서 건물을 신축하려고 공사하던 중에 지하 통로를 발견했다. 때문에 건문제가 여기를 통해 도주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참고로 건문제와 효민양황후 마씨 사이에서는 2남이 있었다. 당시 6살이던 장남 화간 태자 [[주문규#s-1]](朱文奎)는 건문제와 함께 실종되었고[* 건문제처럼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어머니 마 황후처럼 불에 타서 죽어 시체가 완전히 불에 탔거나 도망쳤다는 설이 있는 건문제가 데리고 탈출했다는 설도 있다.] 1살이던 차남 윤회왕 [[주문규#s-1.2]](朱文圭)는 영락제가 아기까지 차마 죽일 수는 없어 살려주긴 했지만 이후 56년 동안 유폐되었다.[* 잔혹한 행태이지만 영락제 입장에서는 정통성을 유지하자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반란세력들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 그는 1457년 그의 칠촌 조카 [[정통제|천순제]] 덕에 풀려났으나, 갓난아기 때부터 유폐되어 평생을 유폐당해서인지 바깥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유의 몸이 된 지 얼마되지 않아 죽었다. == 그의 행방에 대한 의문점 == 건문제의 행방은 명나라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되었고, 영락제는 생전에 만약 건문제가 살아 있다면 다시 반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심복들을 곳곳에 파견해 건문제를 찾게 하니 그중 하나가 바로 [[정화(명나라)|정화]]의 대원정이라는 설이 있다.[* 정화의 대원정을 다룬 중국 드라마 정화하서양에서는 이 설을 채용했다. 정화가 맨 처음 항해에 나섰을때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의 열대 섬에서 건문제의 흔적을 찾았고 항해에 능숙한 건문제의 신하를 잡아서 그를 기용해 대항해를 했다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또 영락제가 [[장삼풍]]을 초빙한 것도 실은 건문제를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절대로 숙부를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는 애매하고 나약한 명령을 내린 건문제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때문에 살아서 나간 것을 알고도 모른 척 해줬다는 설도 있다.] 반대로 건문제가 이미 죽은 것을 알면서도 못 찾은 척했을 것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건문제를 살려 두는 것은 위험하지만 황제이자 조카인 건문제를 대놓고 죽이는 것 역시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므로 건문제를 비밀리에 죽였거나 건문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숨기고 행방불명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궁궐 바깥의 삶에 익숙하지 않은 건문제가 마땅히 도와줄 사람도 없이 명나라의 촘촘한 행정체계에 발견되지 않고 도주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리라는 주장이다.[[https://blog.daum.net/shanghaicrab/16157447?category=15136|#]] == [[조선]]과의 관계 == 원래 [[주원장]] 시절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명나라는 조선의 건국과 이성계의 즉위 자체를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는 않고 묵인, 사후 추인하면서도 정작 태조 [[이성계]]에 대한 고명, 인신은 주지 않아 책봉을 하지 않았다. 고명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국왕 책봉 문서이며 인신은 조선국왕(朝鮮國王)이라고 새긴 도장이다. 즉 공식적인 책봉의 표시였다. 조선은 원나라에서 외교적 용도로 발급한 고려국왕 도장을 반납했지만 명나라는 조선국왕 도장을 새로 내리지 않았다. 명나라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국호 변경을 승인했음에도 여전히 조선에서 외교 문서에 국왕이 아니라 권지국사라고 칭하는 행위를 오히려 비난했다. 하지만 [[역성혁명]]으로 왕조를 개창한 조선의 입장에서는 정당성 확보를 위해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정식 책봉을 원했다. 그런데 명나라는 국왕 칭호를 일부러 쓰지 않는 것을 가지고 혹시 딴마음을 먹는 것 아니냐는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으면서도 정작 정식 책봉은 피했다. 새 왕조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일종의 거리두기 내지 밀당을 한 셈이다. 명나라는 초기만 해도 딱히 조선을 도와주거나 이롭게 해주는 일은 거의 없고 대체로 뭐든 핑계를 잡아 들들 볶아대는 일이 많았는데, 이는 신생국 길들이기 측면도 있었다. 그러다 조선 입장에서 한번 제대로 기회를 얻은 것이 바로 건문제와 이 [[정난의 변]] 때다. [[영락제|연왕]]보다 표면적으로 군사 수는 많았지만 군사력의 내실이 압도적으로 부족했던 건문제는 조선에 내전에 필요한 [[군마]]를 요구한다. 이때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인신을 요청했다. 건문제 입장에서 조선은 연왕 후방에 있는 나라다 보니 해당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정종(조선)|정종]]에게 고명과 인신을 주고 [[이방원]]을 후계자로 정식 승인했다. 홍무제도 이미 죽었기 때문에 특별히 트집잡지 않고 요청하는대로 군말없이 응했다. 그러나 이때는 명나라의 수도가 [[남경#s-3.3]]이어서 왕복 거리가 너무 멀었고 전란 중에 교통도 어지러운 상황이었으므로 외교 사절이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정종이 왕위를 [[태종(조선)|태종]]에게 넘겨주었다. 명나라에서 태종에게 고명을 가지고 잠시 밀당을 한 것은 정종에게 보낸 고명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다시 태종의 고명을 보내달라고 하는 조선의 행위에 대한 짜증과 함께 승계 과정에 대한 의문을 표시한 것으로, 홍무제 당시의 책봉 갈등과는 관련이 없었다. 결국 명나라는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태종의 고명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책봉 절차에 있어 홍무제가 유독 인색했을 뿐 건문제에게 특별히 빚질 것은 없었기 때문에 태종은 승계를 인정받고도 어느 한 쪽을 지지하지 않았다. 건문제에게 일부러 나쁜 군마를 보낸 관료를 보호하였고, 건문제가 패하여 연왕이 [[영락제]]로 즉위하고 '건문' 연호 사용이 무효화되어 건문 연호가 찍힌 기존 공문서의 효력이 정지되자 절차상 건문제 명의로 받은 고명과 인신을 반납하고 새 황제 명의로 다시 내려줄 것을 요청했을 뿐이다. == 평가 == 한국의 경우엔 아무래도 숙부로써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조선)|조선 세조]]의 예가 악명높다 보니 영락제를 세조와 같은 과로 보고, 건문제를 [[단종(조선)|조선 단종]]과 비슷하게 봐서 동정 받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도 영락제를 역적 연왕이라고 비하하고 건문제를 진정한 명나라의 황제로 추켜 세우는 [[당새아|여선외사]]라는 [[고전 소설]]이 전근대에도 나온바가 있어서 그가 예나 지금이나 꽤나 동정받았던 것은 사실인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소설은 영락제 같은 사람이 황제가 되는 바람에 명나라가 망했다는 다분히 정신승리용 소설 성격이 강하긴 하다.] 하지만 아예 통치의 기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왕위를 강탈당한 조선 단종에 비하면 '''건문제의 통치행위는 그냥 본인의 정치적 자살'''로 볼 여지가 많다. 영락제 주체가 당태종 [[이세민]]이나 수양대군 이유마냥 졸렬하게 기습으로 건문제의 목을 날렸다면, 사실 건문제는 유능한 수성군주 아니었을까? 하면서 if놀이라도 가능할텐데 실상 건문제는 할아버지 홍무제가 쥐여준 100만의 대군을 쥐고도 절대적으로 우세를 점했던 숙부 상대로 어리석은 짓을 해서 대업을 말아먹은 사람이라 영락제가 문제가 많다곤 해도 그 대체제가 건문제라 가정하면 명나라 역사가 더 암울하게 돌아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당장 건문시기에 중앙의 힘이 약했냐고 한다면 명나라의 번왕들은 주로 북원과의 국경지대에서 말 그대로 외적을 막는 변방이라 국경 봉토 찌끄래기 좀 떼어준 정도로는 티도 안 났다. 그렇다고 군대의 기강이 헤이해졌나 하면 당시 명나라군은 홍무제가 육성한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로, 몽골 상대로 [[카라코룸]], [[바이칼호]]까지 진출했던 시기의 전성기였다. 그렇다고 군대 이끌 명장이 없었느냐고 한다면 홍무제가 숙청을 쎄게 돌리긴 했어도, 경병문이나 곽영 등의 명장이 있었다. 둘 다 홍무제 초기 거병 멤버 호주이십사기(濠州二十四騎)에 속하고, 특히 경병문은 주원장이 배후를 맡길 정도로 신임했던 장수이며 곽영 또한 중원과 남방의 군벌들 줘패고 다녔던 숙장이다. 그렇다고 영락제가 쉽고 신속하게 건문제 참수 작전이 가능했던가 하면 장강이라는 자연 방벽, 힘 좀 쓴다 싶은 번왕들은 죄다 변경으로 보내버려 생긴 물리적 거리로 인해 매우 어려웠다. 또 건문제가 어려서 제대로 된 판단이 불가능했나 하면 즉위 당시 건문제 나이는 21세로, 젊긴 하지만 아예 통치가 어려울 정도로 어린 군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경병문에게서 군권을 뺏어서 이경륭이라는 명나라판 조괄에게 줬다가 전황 말아먹고, 수 차례 패배했지만 그냥 체급으로 주체 압살하려는 찰나에 '짐이 숙부를 죽였다는 오명을 사게 하지 말라'고 쓸데없는 명 내려서 풀어줘 버리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우유부단했으니 이건 진짜 홍무제 탓이 아니라 건문제의 정치적 자살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정난지변의 원인이 되었던 번왕 숙청도 제대로 한 게 없었다. 숙청할거면 이왕 칼을 뽑은 이상 끝까지 철저하게 다 하던가, 영락제의 형제들은 때려 잡아놓고 정작 영락제는 꾀병부리니 불쌍해서 봐주고 인질로 잡아둔 영락제 아들들 풀어주고 하는 식으로, 할아버지처럼 숙청을 잘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버지처럼 너그럽고 관대한 것도 아닌 애매한 태도만을 고수하다가 정난지변이라는 사단을 만든 것이다. 차라리 이건 번왕들 안 건드리고 가만히 있는 것만 못한 일이었다. 건문제는 황족 다 죽이면 주변에서 정권을 농단하는 권신들한테 위협을 가할 대상이 없어 관대한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이나, 명령에 일관성이 없으니 운에 맡기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기록의 윤색을 차치하더라도, 건문제의 경우엔 객관적인 정황만 보더라도 워낙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점에 올라 있는 상황에서 어리석은 판단으로 깡그리 다 말아먹은 정황이 너무나 잘 드러나서 옹호의 여지가 없는 축에 속한다. == 가족 == * 조부: [[홍무제|태조 고황제 주원장 (홍무제)]] * 조모: [[효자고황후|효자고황후 마씨]] * 부황: [[주표|흥종 강황제 / 의문황태자 주표]] * 모후: 황태후 여씨 * 황후: 효민양황후 마씨 ([[1378년]]~[[1402년]]) * 황자: 장남 화간태자 [[주문규(화간태자)|주문규]](朱文奎, [[1396년]]~[[1402년]] 이후 실종), 차남 윤왕 [[주문규#s-2|주문규]](朱文圭, [[1401년]]~[[1457년]]) == 여담 == * 일본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를 '일본 국왕'에 책봉한 황제가 바로 건문제다. 흔히 영락제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요시미츠가 일본 국왕에 책봉된 것은 1401년으로 건문제 재위기다. * [[실록]]이 편찬되지 못한 세 명의 명 황제 중 한 명이다. 독자적인 실록이 편찬되지 못하고, 대신 숙부 [[영락제]]의 실록인 태종실록에 건문제 재위 기간의 기록이 포함되어 편찬된 것.[* [[조선]]은 폐위되어 비정통으로 간주된 왕이라 하더라도 일기라는 제목을 사용하되 실록의 양식을 따라 해당 왕의 재위 기간의 기록물을 별도로 남겼으나, 명나라는 쫓겨난 황제의 재위 기간을 다음 황제의 실록에 기록했다.] 나머지 두 황제는 [[경태제]]와 [[숭정제]]인데, 경태제는 형 [[정통제]]에 의해 폐위되어 정통제의 실록인 영종실록에 재위 기간의 기록이 포함되어 편찬되었고, 숭정제는 명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실록이 편찬되지 못했다. == 대중매체에서 == * 2006년작 드라마 주원장에서는 완전 만년의 주원장과 함께 나오는데, 이 점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너무 어리게 나온다. 1377년생인데 주원장이 1398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완전 만년이라면 스무 살 내외인데, 나오는 모습은 열 살 내외이다.(...) * 2009년 드라마 정화하서양에 잠시 등장한다. 즉위하고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가혹한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표명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숙부들을 처단하기 시작한다. 결국 내전이 일어나고 전쟁에서 [[영락제]]의 군대가 이기게 되자 중으로 변장하여 배를 타고 도망치는 걸로 퇴장한다. * 2011년 드라마 홍무삼십이에선 중이 아니라 평민으로 변장하여 도망쳤다. * 2015년 드라마 대무당에선 무당산의 도관에서 수행하다가 서른셋에 죽는다. * 2019년 드라마 '영락대제'와 '대명풍화'에서는 건문제가 중으로 변장하여 도망쳤다는 설을 채택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mK8UmkEs1is|대명풍화]] * 2022년 드라마 산하월명에서 건문제는 어릴 때부터 금의위 수장인 숙부 주체를 싫어한다. 금의위를 신하들을 억압하는 독재의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자가 되어 북평을 시찰할 때 장군들이 태자의 말을 듣지 않고 숙부의 말만 듣는 것을 보고 그럴 수도 있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혼자 있을 때는 표정에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북평의 장군들은 조정을 무시하고 연왕에게만 충성한다고 할아버지에게 일러바쳤다. [[방효유]]를 아들의 스승으로 삼았다. 숙부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홍무제가 승하했는데 홍무제의 숨이 끊어지자마자 건문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번왕이 국경을 지킨다라는 홍무제의 정책과 반대되는 삭번을 추진한다. [[서휘조]]가 홍무제의 뜻에 반대된다고 이야기했으나 그런 소리말고 어느 숙부부터 제거하는게 좋을지 의견이나 내라는 말을 들었다. 불법행위를 대놓고 많이 저지른 주왕, 제왕, 대왕, 민왕같은 번왕부터 제거했다. 상왕은 조카에게 수치를 당할바에야 차라리 미리 죽겠다며 분신자살했다. 사실상 건문제 때문에 분신자살한건데 건문제는 오히려 신하들을 탓했다. 상왕에게 상려([[戾]])왕이라는 수치스런 이름을 하사했다. 철현이 번왕이 잘못했을 때만 벌하고 평소에는 가족처럼 지내는 게 옳다고 간언했는데 건문제는 철현이 간언을 못하도록 승진이라는 명분으로 지방에 보냈다. 연왕은 불법행위가 없었기에 건문제는 연왕의 수하들을 범죄자로 몰아 손발을 묶어버릴 계획이었는데 결국 참지 못한 연왕이 8백명의 병사로 간신처단과 선황의 명령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거병하게 된다. 서휘조가 연왕을 공략할 전략을 올려도 연왕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채택하지 않았다. 제태, 황자징만 가까이에 두고 국정을 논했고 다른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전황이 너무 좋지 않아서 병사들의 탈영이 이어지고 결국 곡왕과 조국공 이경륭까지 배신을 하게 된다. 연왕군이 남경에 들어오자 건문제는 직접 칼을 들고 반역자라고 말하며 신하들을 찔러 죽였다. 영락제는 정화에게 사라진 건문제를 수색하는 일을 맡겼다. *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낸 한국 무협 소설이 '[[황제의 검]]'이다. 이 작품에선 사실 홍무제 주원장이 영락제가 반역을 일으킬 것을 알고 생전에 무림인 몇명을 고용해 건문제를 보살펴 달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들 덕분에 건문제가 얼굴을 성형하고 파천으로 이름을 바꾸고 무림인으로 살아간다. * [[한백무림서]]에서도 죽었다고 알려진 것과 다르게 생존해 있다. [[천잠비룡포]]에 어떻게 된 것인지 나오는데 그 당시 환관이 미리 준비해 둔 승복을 입고 도주했으나 왼손 손등과 오른발 발등, 등, 오른팔, 양 허벅지에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자신이 황제로 있을 당시 호위를 맡고 있던 무명[* 황제의 호위로 어렸을 때부터 키워져 이름조차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 황제의 최측근 호위 무장만 입을 수 있는 태천 갑주를 입고 있는 것이나 황제의 도주 때 미리 준비되어 있던 가사가 3벌이라는 것을 볼 때 당시에는 연왕이었던 주체의 자객들이 따라오지 않았더라면 그 후에도 함께 도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이며, 마지막까지 함께 한 것을 볼 때 당시 건문제의 측근 무장 중에서는 무공의 경지가 가장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반쯤 미쳐있는 상태에서도 [[엽단평]]과 [[막야흔]]을 지법으로 제압하고 도주한 것으로 볼 때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고 보인다.]이 궁무예에게 공격받고 사망하는 것을 본 후 시신이 떨어진 곳과 자신의 할아버지인 주원장의 묘에 합장한 후 떠나려고 했으나 결국 자신을 위해 목숨도 바치고자 했던 무명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다시 길을 떠나는 것으로 나온다. * 한국 무협소설 [[신승(소설)|신승]]에선 [[절세신마]]가 홍무제 주원장을 고문 살해하자 오열하더니 무림인들에게 절세신마, [[정각(신승)|정각]]을 잡아 죽이라는 명을 내린다. 사실 정각은 홍무제 주원장을 죽이지 않았지만, 절세신마의 부하였고 당시 다른 황궁 고수들과 싸웠으므로 다른 사람이 보기엔 둘이서 같이 죽인 거나 다름없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명사)] [[분류:1377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명나라/황제]][[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폐위된 군주]][[분류:실종된 인물]][[분류:난징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