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후백제의 왕자/견훤 ~ 견신검)] ---- ||<-3> '''후백제 견훤의 왕자[br]{{{+1 견금강 | 甄金剛}}}''' || ||<|2> '''출생[br]{{{-3 (음력)}}}''' ||[[920년대]] 이전[* 신검이 금강을 어린 아이라 지칭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금강은 920년대 이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 ||후백제 완산주[br](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 || '''사망[br]{{{-3 (음력)}}}''' ||[[935년]] [[3월]] || || '''묘소''' ||미상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견씨]][* 진은 《동사강목》에 등장하는 성씨. 금강은 진금강, 신검의 이복 형인 신검은 진신검으로 표기되어 있다.] || || '''휘''' ||금강(金剛) / 총지(聰智)(?) / 수미강(須彌康)?[* [[연개소문]]의 이름은 기록에 따라 개소문(蓋蘇文) / 개금(蓋金) / 이리카스미(伊梨柯須彌)로 표기된다. 蘇는 쇠를 음차한 것으로서 金에 대응되고, 이 金은 다시 須彌에 대응된다. 수미는 [[산스크리트어]]로서 [[수미산|금(金)을 뜻하기 때문.]]] || || '''국적''' ||'''[[후백제|백제(百濟)]]''' || || '''부모''' ||부왕 [[견훤]][br]모후 불명[* [[이제가기]]에서는 [[상원부인]](上院夫人), 삼국사기에서는 신검, 양검, 용검과 [[이복형제]]로 기록됨.] || || '''형제자매''' ||형 [[견신검]], [[견양검]], [[견용검]][br]남동생 [[견능예]][br]누이 견애복 || || '''신장''' ||약 160cm 이상[* 키가 컸다라는 기록이 있고 신라가 멸망하기 이전 후삼국시대에 활동한 것을 보아 당시 신라인들의 평균키인 [[http://www.whabaeg.com/news/articleView.html?idxno=3420|160cm]]보다는 크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 || '''삼사''' ||태사(太師) ||}}}}}}}}} || [목차] [clearfix] == 개요 == [[후삼국시대]]의 인물.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넷째아들이자 [[아자개]]의 넷째손자. [[삼국유사]]에 인용된 '[[이제가기]]'에는 금강을 '[[태사]] 총지'라고 부르고 있다. == 생애 ==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금강은 본래 [[키(신체)|키]]가 크고 지혜도 많고 군사적인 재능마저 탁월하여 견훤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https://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bookId=世家&types=r#detail/kr_002r_0050_0010_0010|#]] 다만 앞의 외모 기록과 [[모순]]되게도 [[견신검]]의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50r_0030_0421&position=-1|즉위 교서]]에서는 금강을 어린 아이(頑童)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충북대]] 신호철 교수는 금강을 견훤이 뒤늦게 얻은 아이로서 935년 당시 [[어린이]]였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정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신검의 입장이 입장이니만큼 그냥 자신보다 조금 어린 금강을 '어린 아이'라고 격하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비슷한 사례로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당시엔 북측 인사들이 총격을 가한 병사를 두고 '쪼꼬만 애'라고 지칭한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남한 언론에서 어린 10대 병사라 보도한 헤프닝도 있었다.] 금강이 흔히 추정하는 것처럼 호남 호족 출신의 최연장자 지위라면 적어도 890년대 중후반~900년대 초반에는 탄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정말 '어린아이'로 불릴만한 920년대 태생이었다면 9~10명의 아들들 중에서도 서열이 워낙 낮았을테니 굳이 신검이 쿠데타를 벌일 것도 없이 다른 세력들의 반발에 무산되었을 것이다. 이미 견훤이 노년에 접어든 930년대 당시, 후백제 정계는 [[견신검]] 형제 세력과 이복동생(?)[* [[이제가기]]에서는 신검과 금강이 동복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강을 지지하는 세력[* 이후 신검의 즉위 교서에서 '[[간신]]'으로 규정한 세력]의 대립이 있었다. 견훤은 장남인 [[견신검]]이 버젓이 있음에도 그를 건너 뛰고 견금강에게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견신검은 동생 [[견양검]]과 [[견용검]], [[이찬]]인 [[능환]] 등과 모의하여 935년 3월 [[쿠데타]]를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일으켜 왕위를 빼앗아 버렸다. 이로 인하여 견훤은 강제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뒤]] [[금산사]]에 유폐당했고 결국 견금강은 견신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견금강의 죽음과 견신검의 왕위 [[찬탈]]은 견훤이 위험을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금산사에서 탈출해 [[고려]]로 도주하여 후백제를 [[멸망]]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개국군주]]가 장남을 제쳐두고 후계자로 정한 연배가 낮은 [[왕자]]가 [[왕자의 난]]으로 죽음을 당한 행적에서 역사적으로 후대 [[조선왕조]] [[1차 왕자의 난]]에서의 [[의안대군(이방석)|의안대군]]과 유사한 위치에 비견해볼 수 있다.[* 그러나 어린 막내 아들 의안대군과는 달리 견금강은 견훤이 후계자로 택할만큼 나름의 연배(아들 10여 명 중의 넷째로 연배로만 치면 오히려 [[조선 태종]]의 배분에 가깝다)와 세력, 군재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의안대군을 폐하고 죽였으나 [[수성군주]]로 조선왕조의 기초를 놓고 [[세종(조선)|후계자로 위대한 명군을 배출하여]] 조선의 전성기를 이끌게 만들었던 조선 태종과는 달리 견금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견신검은 자국 내의 자중지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건국군주]]이자 부친 [[견훤]]의 고려 투항'''과 [[일리천 전투|고려의 침공으로 끝내 후백제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다.]]] == 대중매체에서 == === 드라마 [[태조 왕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금강(태조 왕건))] === [[조선일보]] === 아동용 학습만화인 "맛있는 한자"에 출연. 작중 견훤이 2미터는 족히 넘을듯한 [[크고 아름다운]] 장사로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그를 빼닯은 거구의 초월적인 무인으로 나온다. 문약하고 비리비리한 인물로 왜곡된 신검과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으로[* 자세한건 [[견신검]] 항목 참고.], 무력도 뛰어나지만 군사적 재능도 출중하여 견훤의 총애를 받는다. 특히 후반부에는 견훤과 함께 무력 투톱을 달리던 [[유금필]]과 [[일기토]]를 떠 승리함으로서[* 다만 이건 [[유금필]]이 나이가 많아 노쇠했기 때문이라는 암시가 있다.] 명실상부 작중 무력 1인자로 올라선다. 이런 인상적인 모습과 문약한 신검의 모습이 대비되어 결국 견훤은 끝내 금강을 후계자로 낙점한다. 그러나 이런 인상적인 모습과는 별개로 반란을 원치않는(?) 신검을 앞세운 양검과 용검 및 능환 일파의 쿠데타에 그 엄청난 무력이 무색하게 아무것도 못하고 참살당한다. 심지어 죽는 모습도 나오지 못하고 견훤에게 소식을 전달하는 병졸의 대사로 쿠데타 세력에게 참살당했다는 언급만 나온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견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금강, version=90)] [[분류:후삼국시대/인물]][[분류:935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살해된 인물]][[분류:완산구 출신 인물]][[분류:전주 견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