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복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3> {{{#ffd700 {{{+1 '''경복궁 기별청'''}}}[br]{{{-1 景福宮 奇別廳}}}}}}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경복궁 기별청,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세종로]]) || ||<-2> {{{#ffd700 '''건축시기'''}}} || [[1867년]] {{{-1 (창건 추정)}}}[br][[2001년]] {{{-1 (복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기별청.png|width=100%]]}}} || || {{{#gold '''기별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24491&ccbaKdcd=13&ccbaAsno=0117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목차] [clearfix] == 개요 == --간에 기별도 안 가는 곳--[* 정말로 저 기별이 이 '기별(奇別)'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경복궁 흥례문|흥례문]] 서쪽 행각에 있으며 [[경복궁 유화문|유화문]]의 북쪽에 있다. [[어명|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인 [[승정원]]에서 매일 발행했던 ‘[[조보|조보(朝報)]]’를 만들던 곳이다. 조보는 일종의 [[신문]]으로 지금의 [[관보]]같은 역할을 했다. [[과거|과거시험]] 날짜나 [[신하]]들이 올린 [[상소]] 및 그에 대한 [[왕]]의 답변, 그리고 [[조정]] 내 [[인사]][[이동]]과, [[중국|외국]] [[일본|소식]], 심지어 [[날씨]]까지 적히는 등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매체였다. 조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보|조보 문서]]와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642598&no=168&weekday=wed|웹툰 《조선왕조실톡》의 163화]]를 참조. [[조보]]를 적은 [[종이]]를 ‘기별지(奇別紙)’라 했다. 기별지를 내는 곳이 바로 ‘기별청(奇別廳)’이다. 기별청 뿐 아니라 조보를 담당하는 몇몇의 [[관리]]들 역시 직책에 기별이란 이름이 붙었다. 매일 [[아침]]마다 각 관청에서 조보를 베껴 쓰라고 보낸 서리들을 ‘기별서리(奇別書吏)’라 했으며 [[지방(지리)|지방]]에 조보를 [[배달]]할 전령을 ‘기별군사(奇別軍士)’라 했다. 즉, 엄밀히 말하면 관청기구의 이름이며 [[건물]]의 이름이 아니다. 당연히 다른 [[궁궐]]에도 기별청들이 있었다. 그러나 다 사라졌고, 현재는 복원해 둔 [[경복궁]]의 기별청만이 존재한다. [[현판]] 글씨는 [[예서|예서체]]로, [[서예|서예가]] 현암 정상옥 선생(玄庵 鄭祥玉, 1946~)이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吳玉鎭, 1935~2014)이 새겼다. == 역사 == 언제 처음 세웠는 지는 모른다. [[조선시대|조선 전기]]에도 [[조보|조보]]가 있었으니 그 때도 기별청은 있었겠지만 지금 자리였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1868년([[고종(대한제국)|고종]] 5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현 자리에 지은 듯 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인 1892년(고종 29년) 4월에 딱 한 번 나온다. 하지만 이것도 기별청 건물을 다룬 게 아니고, 도목정사[* 都目政事. 매년 2회 또는 4회씩 [[이조(조선)|이조]]와 [[병조]]에서 행하던 인사행정.] 때에 농간을 부린 죄인 김두형을 문책하던 중 기별청에서 일했다는 진술로만 등장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904001_004|#]] 《[[승정원일기]]》에는 [[정조(조선)|정조]]와 고종 시기를 합쳐 기별청이 3번 나오는데, 정조 때는 [[경복궁]]이 없었고, 고종 때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과 같다. 그러니 공식 기록에 경복궁 기별청에 대한 내용은 저 이외에는 없다. 1894년([[고종(대한제국)|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조보]]가 사라지고 [[근대|근대식]] [[관보]]가 생겼다. 이 때 기별청이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 관보를 발행했는지, 아니면 기별청에서 계속 관보를 내었는지는 모른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경복궁]]에서 열리면서 [[경복궁 흥례문|흥례문]] 및 주변 행각과 같이 헐렸다. 그리고 공진회 개최 1년 뒤인 1916년에는 [[일본 제국|일제]]가 흥례문, [[경복궁 영제교|영제교]], 유화문, 기별청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졌다. [[8.15 광복]] 후인 [[1990년대]]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고, 2001년 10월 26일에 [[흥례문]]과 같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 특징 == * [[기단]]은 장대석으로 쌓았으며 1단이다. [[계단]]은 없고 출입문 앞에 댓돌만 놓여있다. [[기둥]]과 [[주춧돌]]은 원형이다. * [[지붕]]은 맞배지붕, [[처마]]는 홑처마이다.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초익공 양식으로 되어있으며 창방과 도리 사이에 소로를 놓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쌓아 마감했으며 [[용두]]는 올리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 부재 끝 부분만 화려하게 칠하는 단청.]으로 칠했다. * 정면의 바깥 면 2칸은, 칸 중간에 중인방을 두고 위에는 [[벽]]을 두고 아래엔 [[창문]]을 둔 모습이다. 다만 왼쪽과 오른쪽 칸의 모습이 다르다. 왼쪽 칸의 중인방 아래는 전부 [[문]]이나, 오른쪽 칸은 중인방 아래에 문선을 두어 문선 가운데 안에만 문이고 양 옆은 [[벽]]으로 마감한 형태이다. 그리고 중인방의 높이도 오른쪽 칸이 왼쪽 칸보다 더 낮다. 왼쪽 칸에 [[현판]]이 달려있다. * 남쪽 측면(유화문 방향)의 바깥 면 2칸도 역시 칸 가운데에 중인방이 있고 그 위를 [[벽]]으로 마감한 모습이다. 정면 방향의 칸은 중인방 아래에 문이 달려있으나 옆 칸은 벽이다. 북쪽 측면([[경복궁 근정전|근정전]] 방향)의 바깥 면도 남쪽 측면과 구조가 유사하나 모든 칸의 중인방 위, 아래가 다 벽이다. * 뒷면([[국립고궁박물관]] 쪽에서 바라볼 때)의 바깥 면 2칸은, 하단부에 사고석과 [[벽돌]]을 쌓은 뒤 그 위에 몸체를 구성한 모습이다. 얼핏 보기에는 주변의 [[경복궁 흥례문|흥례문]]과 [[경복궁 근정문|근정문]]의 행각과 비슷한 형태이나 자세히 보면 약간 다르다. 칸 중간에 중인방과 문선을 두고 문선 사이에 창을, 나머지는 전부 벽으로 마감했다. == 여담 == * [[관리]]들과 [[양반]]들은 기별지를 받아야 [[조정]]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한성부|서울]] 거주자들은 매일같이 소식을 전달받았지만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며칠이나 몇 주 치, 또는 한 달 치를 한꺼번에 받았다. 그래서 소식이 늦어지면 “왜 소식이 없지? 기별이 없지?”하며 기다렸고, 그러다 어느새 소식과 기별이 [[동의어]]가 되었다.[[http://cafe.daum.net/koheritage/5pZL/1091?q=%EA%B8%B0%EB%B3%84%EC%B2%AD%20%EA%B0%84%EC%97%90%20%EA%B8%B0%EB%B3%84|#]] 여기서 나온 표현이 ‘기별이 왔느냐’, ‘간에 기별도 안 간다’[* 먹은 음식량이 적어 뱃속에 소식이나 갔겠냐(음식이나 도달하겠냐)는 뜻이다.]이다. [[분류:경복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