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복궁)]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경복궁 사정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왕궁의 편전)] ---- ||<-5>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1601~18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 1757호[* 보물 1758호는 원래 [[포항 중성리 신라비]]였으나 국보 318호로 승격하면서 [[영구결번]]이 되었다.] ||<|2> ← || '''1759호''' ||<|2> → || 1760호 || || 양산 신흥사 대광전 벽화 || '''경복궁 사정전''' || [[경복궁 수정전]] || ---- }}} || ----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보물|{{{#f39100 대한민국 보물 제1759호}}}]]''' || ||<-2> {{{#fff {{{+1 '''경복궁 사정전'''}}}[br]{{{-1 景福宮 思政殿}}}}}}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경복궁 사정전,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세종로]])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 || '''{{{#fff 수량}}}''' || 1동 || || '''{{{#fff 지정연도}}}''' || 2012년 3월 2일 || || '''{{{#fff 제작시기}}}''' || [[조선시대]], 1395년 창건, 1867년 중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_사정전_전경.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_사정전_근경.jpg|width=100%]]}}} || || {{{#gold '''사정전[*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9292&ccbaKdcd=12&ccbaAsno=17590000&ccbaCtcd=11|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br][[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9289&ccbaKdcd=12&ccbaAsno=17590000&ccbaCtcd=11|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_사정전_설경.jpg|width=100%]]}}} || || {{{#gold '''눈 내린 사정전 풍경[*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9291&ccbaKdcd=12&ccbaAsno=1759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복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의논하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 이름 == [[조선]] 초 [[재상]]이었던 [[정도전|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는 《[[시경|시경(詩經)]]》의 구절을 인용했으며, 정도전은 이 말의 뜻에 대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늘 깊이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고 [[설명]]했다.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근정전]]의 [[북|북쪽]], [[왕]]의 침전인 [[경복궁 강녕전|강녕전]]의 [[남|남쪽]]에 있다. 현판은 경복궁 중건 당시 [[이조판서]]였던 조석우(曺錫雨)가 썼다. == 역사 == 1394년([[태조(조선)|태조]] 3년) [[경복궁]] 창건 당시에 지어졌다. 당시에는 지붕을 [[용]] 문양이 새겨진 [[고려청자|청자]] [[기와]]들로 뒤덮어서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문종실록]]》 [[문종(조선)|문종]] 즉위년 2월 28일 계묘 4번째기사: (중략)... [[조선|우리나라]]에서는 다만 '''[[경복궁 근정전|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에만 [[청기와]]를 덮었을 뿐이고'''...(중략) ][* 즉 사극이나 영화 등의 대중매체에서,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된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를 제외한 [[세종(조선)|세종]]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의 [[경복궁 근정전]]과 사정전은 [[청기와]] 건물로 표현해야 옳은 재현이라는 것이다. [[세종(조선)|세종]] 이후라 하는 이유는 1443년(세종 15)에 [[경복궁 근정전|근정전]] 취두(鷲頭, 치미나 용두와 같은 망새로서 용마루 양쪽 끝에 세워 놓은 대형 장식 기와)가 비로 인해서 무너졌는데, 비싼 청기와와 아련와(牙鍊瓦, 조개껍질 가루를 발라 만든 기와)중에 무엇으로 덮을지 고민하면서 청기와를 정밀하고 좋게 구워 만드는 기술을 시험해 보라는 [[실록]]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유력하다. 기존에 청기와가 덮여 있었을 시 아련와를 고민한다는 것은, 더 값싼 아련와를 정전에 덮는 꼴이 되고, 편전은 이미 청기와가 있으니 격이 떨어지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단, 후술하겠지만 사정전은 1553년([[명종(조선)|명종]] 8)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청기와로 복원했는지는 알 수 없어 [[선조(조선)|선조]] 대의 사정전은 어떠했는지가 애매한 위치에 있다.] 1429년([[세종(조선)|세종]] 11년)에 고쳐 지었고 1553년([[명종(조선)|명종]] 8년)에 [[화재]]를 입은 후 재건했으며 이후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탔다가 1867년([[고종(대한제국)|고종]] 4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일본 제국|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경복궁]] 내 전각들을 철거할 때도 무사히 남았으나 일제가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열 때 박애관으로 사용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문화재청]]에서는 사정전을 2012년 3월 2일에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1759호로 지정했다. == 정문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경복궁 사정문)] == 구조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전도 교태전 강녕전.png|width=100%]]}}} || || {{{#gold '''〈경복궁전도〉에서 묘사한 내전 영역'''}}} || [[영조]] 때 만든, [[조선시대|조선 초기]] [[경복궁]]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경복궁전도(景福宮全圖)》를 보면 부속 건물없이 이어져있다. 이는 완전히 영역이 떨어진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 [[조선의 궁궐|조선의 5대 궁궐]] 중 정전 바로 정북방에 위치한 유일한 편전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편전인 [[창덕궁 선정전|선정전]]과 [[창경궁 문정전|문정전]]은 정전의 측면에 있다. [[경희궁]]의 편전 [[경희궁 자정전|자정전]]도 정전 정북쪽에 있긴 하나 자정전의 정문인 자정문이 서쪽으로 틀어져있어 꺾어 들어가야한다. 그리고 사정전의 정북방으로 [[왕]]의 침전인 [[경복궁 강녕전|강녕전]]이 있는데 이를 보아 [[경복궁]] 내 전각들이 [[정궁]]으로서 질서있는 배치원칙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 장대석 3벌대로 만든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목조]] 전각[* 보통 [[한옥]]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單層)으로 말한다.]이다. [[조선]] [[궁궐]]의 편전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의 편전은 모두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기단 부분에서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 그러니까 중앙 칸에 소맷돌이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양 옆 [[신하]]들이 드나드는 칸에 소맷돌이 없는 계단이 있다. 건물 좌, 우면에 계단은 없고 북측의 계단은 어칸에만 놓여있다. 초석은 원형초석이며 이에 따라 기둥 역시 둥글게 되어 있다. 어칸을 협칸보다 2배 가까운 길이로 넓게 잡았고, 측면에서도 어칸을 훨씬 크게 했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를 모두 회칠로 처리한 뒤 그 위에 취두와 용두, 그리고 잡상을 배열했다. 기둥 윗몸에는 창방[* [[공포]]가 구성되는 목조 건축물의 기둥머리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건축 부재.]과 평방[* 창방 위에 얹혀 공포를 받치는 넓은 직사각형 단면의 긴 건축 부재.]을 짜돌리고 내외이출목(內外二出目)의 [[공포]][*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건축 부재.]를 놓았다. 공포는 가장 장중하고 복잡한 다포 양식으로 하여 편전의 위엄을 돋보이게 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사정전 내부.png|width=100%]]}}} || || {{{#gold '''사정전 내부[* 사진 출처 - 카카오맵.]'''}}} || 내부는 칸막이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뚫려있으며 대들보 위를 우물천장으로 가려 서까래가 바로 보이지 않게 했다. 그리고 실내에도 [[단청]]을 칠하여 보존성을 높임과 동시에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제일 북쪽 중앙에 [[옥좌]]가 있으며 당가[* [[옥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를 설치하여 왕의 [[권위]]를 돋보이게 했다. * 위 이미지를 보면 [[옥좌]] 위에 굉장히 화려한 [[그림]]이 있다. [[구름]]과 [[용]]이 얽혀있는 그림으로 이름은 《운룡도(雲龍圖)》이다. 구름은 [[신하]]를, 용은 [[군주|왕]]을 상징하며, 그림처럼 왕과 신하가 서로 어우러져 좋은 [[정치]]를 하길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여담으로 원래는 [[벽화]]였는데 훼손이 심해지자 2000년 대 초에 따로 떼어서 별도로 보관한다. 기존에 운룡도가 있던 자리에는 실제 크기만 한 천에다 그림을 찍은 사진을 복사해서(...) 걸어놓았다. * 4면을 벽 없이 전부 [[창문|창]]과 [[문]]으로 구성했다. 문의 창호는 띠살이며, 그 위에 교창[* 창문 위쪽에 가로로 길게 짜서 붙박이로 설치하는 채광창.]을 설치했다. * 바닥은 [[마루]]이다. 그래서 주로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사용했고, 가을에서 봄까지는 양 옆에 있는 보조 편전인 [[경복궁 천추전|천추전]]과 [[경복궁 만춘전|만춘전]]을 주로 이용했다. * 사정전의 남쪽 행각을 [[창고]]로 사용했는데 이름을 [[천자문]] 순서대로 지었다. 천자고(天字庫)부터 월자고(月字庫)까지 총 창고 10개가 있다. == 여담 == * 1435년(세종 17년)에 [[세종(조선)|세종]]이 지으라고 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다른 이름이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이다. 당시 세종이 이 곳에 주로 머물며 짓게 했기 때문이다. * [[세조(조선)|세조]] 때에는 사정전 앞 [[복도]]에 큰 [[종(악기)|종]]을 달고 [[군대|군]] 관련 정사를 보살필 때마다 호령을 대신하여 이 종을 쳤다. * 사정전 남쪽의 우측 [[계단]] 옆을 보면 돌기둥으로 감싼 [[해시계]] [[앙부일구]]가 있다. 원래 [[교량|다리]] 부분도 돌기둥 속에 들어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드러났다. 물론 현재도 --비오거나 흐린 날 빼고-- 제 역할을 하고 있다. * [[세조(조선)|세조]]가 [[사육신]]을 친국하던 곳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etail-in-f5.jpg|width=100%]]}}} || || {{{#gold '''사정전 앞에 있는 앙부일구[*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imgDetail.do?detail_code=13&gung_number=1&img_serial_number=349&imgGubun=1&language=|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남면(정면) 동쪽 계단 옆에 [[해시계]] [[앙부일구]]가 있다. == 부속 건물 == 남쪽 행각은 위의 언급대로 내탕금을 보관하는 천자문 글자 순서대로 천자고(天字庫)~월자고(月字庫)의 10개의 창고가 배치되어있다. 동쪽행각은 건인각(建寅閣)이고 서쪽행각은 남쪽의 용신당(用申堂)과 북쪽의 협선당(協善堂)으로 나뉜다. === 천추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경복궁 천추전)] === 만춘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경복궁 만춘전)] == 대중매체에서 == [[궁궐]] 촬영이 비교적 쉬웠던 2000년대 이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편전으로 많이 나왔다. 물론 외견만 나오고 실내는 [[방송사]] [[스튜디오]]에서 따로 촬영했다. 2004년 [[전라북도]] [[부안군|부안]]에 있는 부안영상테마파크에 [[조선]] 왕궁 세트장이 생기면서 사정전 세트도 같이 지었는데, 이상하게 [[경복궁 강녕전|강녕전]]과 비슷한 외형의 건물에 사정전 현판을 붙여놓았다.(...) 2008년 [[경상북도]] [[문경시|문경]]에 《[[대왕세종]]》 세트장이 생기면서 사정전 세트 역시 지었는데, 부안과는 달리 실제 사정전과 상당히 비슷하다. 다만 2015년 [[징비록(드라마)|징비록]] 촬영을 전후하여 가운데 칸과 [[정문]] 사이에 [[복도|복도각]]을 설치하여 현재는 원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실내에 [[옥좌]]를 마련하고 용상체험을 할 수 있게 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근정전, version=75, paragraph=2, title2=경복궁, version2=879, paragraph2=5.2.2)] [[분류:대한민국의 보물]][[분류:경복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