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복궁)] [include(틀:조선 왕궁의 선원전)]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3> {{{#ffd700 {{{+1 '''경복궁 선원전'''}}}[br]{{{-1 景福宮 璿源殿}}}}}}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서울국립민속박물관,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세종로]]) || ||<-2> {{{#ffd700 '''건축시기'''}}} || [[1867년]] {{{-1 (창건)}}} / [[1930년대]] {{{-1 (철훼)}}} / [[1945년]] {{{-1 (전소)}}}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선원전.png|width=100%]]}}} || || {{{#gold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경복궁 선원전'''}}}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복궁]]의 선원전이다.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어진]][* 御眞. [[임금]]의 [[초상화]].]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진전(眞殿)이었다. 쉽게 말해 [[종묘]]가 [[궁궐]] 밖에 있는,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궁궐 안에 있는 [[왕실]]의 사당이었다. [[경복궁]] 동북쪽,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 이름 == 선원(璿源)이란 단어는 '[[왕실]]의 유구한 [[뿌리]]'란 뜻이다.《[[구당서]]》의 〈열전 - 공의태자 소〉에서 유래했다. [[글자]] 뜻을 그대로 풀면 ‘아름다운 옥(璿)의 뿌리(源)’로, [[왕실]]을 [[옥]]에 비유하여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 같은 뿌리’란 의미로 사용한 듯하다.[[http://www.rfo.co.kr/seonwon_info.htm|#]][* 그래서 [[조선시대]] [[왕실]] [[족보]] 이름도 《선원록(璿源錄)》, 《선원계보(璿源系譜)》이다.][* 또한 [[전주 이씨]] [[가문]]에서 계통을 분류할 때 선원선계(왕실 역사 시작 이전[* 여기서 말하는 왕실 역사의 시작은, [[추존]]받아 엄연히 [[조선시대]] 당시 법적으로 [[임금]]이었던 [[이안사|목조 이안사]]부터를 말한다.]), 선원세계(왕통), 선원파계(왕자, 왕자군에서 갈라진 계통)로 나눈다.] == 역사 == [[조선]] 초기에는 [[임금]]마다 별도로 [[사당]]을 지어 [[어진]]과 [[위패]]를 두고 [[제사]]를 지냈다. 이것을 [[세종(조선)|세종]]이 통합하려 했고, 그래서 [[경복궁]]에 제사를 지내는 문소전(文昭殿)을, 그 뒤편에 어진을 보관하는 선원전을 지었다. 이때만 해도 선원전은 어진 뿐 아니라 [[왕실]] [[족보]]인 《선원록》도 보관하는 왕실 유물 보관소였고 제사 공간은 아니었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선원전(璿源殿)|#]]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화재|소실되면서]] 문소전과 선원전도 모두 불탔고 한동안 다시 짓지 못했다. 100여 년 뒤인 [[숙종(조선)|숙종]] 시기에야 당시 사실상 [[법궁]]이던 [[창덕궁]]에 [[창덕궁 선원전|선원전]]을 새로 지었고, 그때부터 선원전에서 [[제사]]를 지냈다. [[경복궁]] 선원전을 다시 지은 때는 [[고종(대한제국)|고종]] 때인 1868년(고종 5년)이었다. 이후 [[창덕궁 선원전]]의 [[어진]]을 경복궁으로 옮겼다. 선원전이 두 곳으로 늘어나면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경복궁에 머물 땐 경복궁으로, [[창덕궁]]에 머물 땐 창덕궁으로 [[어진]]도 함께 옮겼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선원전(璿源殿)|#]] 1896년([[건양]] 원년) 2월 [[아관파천]]으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경복궁]]을 떠나면서 경복궁 선원전에 있던 [[어진]]을 [[경운궁]]의 [[덕수궁 즉조당|즉조당]]으로 옮겼고, 경복궁 선원전은 빈 건물이 되었다. 하지만 아주 버린 것은 아니라서 1900년 [[덕수궁 선원전|경운궁 선원전]]에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의 모사[* 摹寫. 베껴 그리다.]한 [[어진]]을 봉안할 때, 경복궁과 [[창덕궁 선원전|창덕궁의 선원전]]에도 태조의 어진을 모실 칸을 새로 지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박문사 쿠리.png|width=100%]]}}} || || {{{#gold '''박문사 쿠리가 된 경복궁 선원전'''}}} || 그러나 [[일제강점기]] 직후 [[경복궁]]을 [[조선총독부]]가 [[소유]]하면서, [[일본 제국|일제]]는 선원전 주변의 부속 건물과 행각들을 대부분 철거했다. 1931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불교)|절]]인 [[박문사]]를 [[장충단공원|장충단]]에 지으면서 선원전 본채를 옮겨다 쿠리(庫裡)[* 절의 창고, 부엌, 숙소 등을 일컫는다.]로 사용했다. [[건물]]은 [[8.15 광복|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23일 [[화재]]로 불타 없어졌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ttearth.com/national_folk_museum.jpg|width=100%]]}}}|| || {{{#gold '''경복궁 선원전 영역에 들어선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 || 1966년 1월에 [[대한민국 정부]]는 [[국립중앙박물관]][* 당시 계획엔 국립종합박물관으로 표기되었다.]을 [[경복궁]] 선원전 영역에 세우기로 하였고 1972년에 완공하였다.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옛 [[조선총독부 청사|중앙청]]으로 옮겨가고[*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은, 옛 [[조선총독부 청사|중앙청]]을 철거한 뒤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 [[건물]]을 쓰다가 2005년 현재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로 옮겼다.] 1993년 2월부터 현재까지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문제는 이 일대에 그나마 남아있던 경안당, 대향당 등 9동 106칸의 [[전각]]들을 철거하고 박물관을 지었다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 [[공사]]하면서 선원전의 [[유구]]가 심하게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https://blog.naver.com/minsu977/221070317442|#]] 이뿐만 아니라 [[박물관]] [[디자인]] 자체도 여러 [[불교]] [[절(불교)|사찰]]의 [[건물]]들을 섞어서 지었기 때문에[*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에서 따왔다.] [[유교]] [[조선|국가]]의 [[법궁]]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 [[문화재청]]은 2031~42년에 걸쳐 진행할 〈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 - 4단계 궁중의례권역 복원 계획〉으로 약 1304억 원을 들여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철거하고 선원전 및 혼전 영역의 [[건물]] 23동을 짓기로 하였다.[[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121409145279523|#]] [[분류:경복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