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복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3> {{{#ffd700 {{{+1 '''경복궁 양의문'''}}}[br]{{{-1 景福宮 兩儀門}}}}}}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경복궁 교태전,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세종로]]) || ||<-2> {{{#ffd700 '''건축시기'''}}} || [[1867년]] {{{-1 (창건 or 중건)}}} / [[1995년]] {{{-1 (복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양의문.png|width=100%]]}}} || || {{{#gold '''양의문'''}}}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복궁 교태전]]의 [[정문]]이다. == 이름 == ‘양의(兩儀)’ 뜻은 ‘[[음양|음양(陰陽)]]’이다. 《[[주역]]》 - 〈계사상전〉과 《본의》 등 [[중국]] 옛 [[고전]]에서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단어이다. 동양 전통적 관념에서 [[여성]]은 음(陰), [[남성]]은 양(陽)을 의미했다. 즉, ‘양의’는 [[임금]]과 [[왕비|중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살라는 염원을 담은 이름이다. == 역사 == 창건에 관한 기록은 없다. 조선 초기 [[경복궁]]을 추정해 그린 그림 〈경복궁도〉를 보면, [[경복궁 교태전|교태전]] 정문이 따로 없고 교태전 본채가 [[경복궁 강녕전|강녕전]], [[경복궁 경성전|경성전]], [[경복궁 연생전|연생전]]과 [[복도]]로 붙어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추정이라 정말 저랬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만약 저 당시에 양의문이 있었다면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불탔을 것이다. 공식 기록 상 양의문 기록은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408018_003|1867년(고종 4년) 8월 18일 자 《고종실록》]] 및 [[http://sjw.history.go.kr/id/SJW-K04080180-00700|《승정원일기》의 기사]]가 전부이다. 당시 [[경복궁]] 중건을 담당하던 경복궁 영건도감에서 각 건물과 문의 이름을 지어 고종에게 올렸는데, 이 때 교태전 남행각문을 양의문 · 대래문으로 정했다는 내용이다. 1873년([[고종(대한제국)|고종]] 10년)과 1876년(고종 13년)에 [[경복궁 교태전|교태전]]이 화재로 사라졌다가 1888년(고종 25년)에 다시 지어졌다. 그런데 양의문도 교태전과 같이 불탔다 재건되었는지는 모른다.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11월에 [[창덕궁]] 내전 핵심부가 불탔다. [[조선총독부]] 산하 이왕직에서 재건할 때 경복궁 내전 건물을 자재로 쓰면서 해체, 이전하여 [[창덕궁 대조전|대조전]]의 정문 [[창덕궁 선평문|선평문]]이 되었다. 이후 80년 가까이 빈 터로 남아있다가 [[문화재청|문화재관리국]]에서 [[경복궁]] 종합 정비 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1층[*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 [[목조]] [[건물]]이다. 칸 수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다. [[기단]]은 장대석 1벌대로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계단도 따로 없다. [[초석|주춧돌]]과 [[기둥]]은 사각이다. * [[지붕]]은 맞배지붕, [[처마]]는 홑처마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그 위에 [[용두]]와 취두를 두었다. [[문|문짝]]과 측면의 [[벽]]은 붉은색 나무판이다. 문의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단청]]은 모로단청[* 부재 끝부분에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이다.]으로 칠했다. * [[왕]]이 다니는 가운데 칸을 양 옆 칸과 다르게 만들었다. 넓이도 더 넓고 문의 높이도 더 높다. 문짝도 가운데 칸은 6판이나 양 옆은 4판이다. * 각 칸의 인방 위에 풍혈을 뚫은 궁판을 올렸다. 좌, 우 칸의 경우, 위, 아래 7개 씩 총 14개의 풍혈을 뚫은 궁판이 놓여있으나[* 윗 궁판의 경우, 6개는 온전히 뚫었으나 1개는 반으로 나누어 배치했다.] 가운데 칸의 경우, 풍혈 10개 뚫린 궁판 하나를 올렸다. 궁판들 위에 홍살을 놓았으며 가운데 칸 궁판에 현판을 걸었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 남쪽에서 바라볼 때 기준으로, 양의문 양 옆에 [[굴뚝]]이 있다. [[경복궁 교태전|교태전]] [[온돌]]이 아니라 [[경복궁 강녕전|강녕전]] 온돌을 떼고 생긴 [[연기]]가 나가는 굴뚝이다.[* 교태전 온돌에서 생긴 연기는 [[경복궁 아미산|아미산]] 굴뚝으로 나간다.] 행각과 붙어있는 형태로, 몸체는 황색 [[벽돌]]로 쌓고, 가운데에는 삼화토 등으로 무늬를 내어 아름답게 장식했다. 동쪽 굴뚝에는 문자도(文字圖) ‘천세만세(千世萬歲)’, 서쪽 굴뚝에는 ‘만수무강(萬壽無疆)’을 새겨놓았고 주변에 무시무종[* 시작도 끝도 없다는 뜻.] 무늬를 장식해두었다. == 여담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터널]] 근처에 있는 양의문교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교회의 이름은 [[요한복음]] 10장 7절에 나오는 구절 “나는 [[양(동물)|양]]의 문이라”에서 따왔다.[[http://www.asheep.org/index.php?mid=greeting|#]] === 현판 논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양의문 현판.png|width=100%]]}}} || || {{{#gold '''현재 양의문 현판'''}}} || [[20세기]] 초반까지는 흰 바탕에 짙은 글씨였으나 1990년대에 복원하면서 검은 바탕에 하얀색 글씨로 바뀌었다. 글씨체도 복원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2016년 [[문화재청]]에서 《궁궐 현판 고증조사 연구용역 보고서》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밝혀냈고, 양의문을 비롯해 색상이 바뀐 다른 [[현판]]들도 조사하여 [[조선시대]] 원형으로 복원하겠다고 밝혔으며 현재는 흰 바탕에 짙은 글씨로 복원해두었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교태전, version=94, title2=창덕궁 선평문, version2=13)] [[분류:경복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