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복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3> {{{#ffd700 {{{+1 '''경복궁 천추전'''}}}[br]{{{-1 景福宮 千秋殿}}}}}}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경복궁 천추전,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세종로]]) || ||<-2> {{{#ffd700 '''건축시기'''}}} || 창건연대 미상 {{{-1 (1437년 이전 추정)}}} / [[1867년]] {{{-1 (중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천추전 전경.jpg|width=100%]]}}} || || {{{#gold '''천추전[*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9290&ccbaKdcd=12&ccbaAsno=1759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복궁]]의 편전 [[경복궁 사정전|사정전]]의 보조 전각으로 사정전 서쪽에 있다. 왕과 신하들이 주로 [[가을]]과 [[겨울]]에 편전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의논하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 이름 == '천추(千秋)' 뜻은 직역하면 '천 년(千)의 가을(秋)'이며 '길고 오랜 세월'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오랫동안 바른 정치를 하기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들도 많은데 그중에서 '천추'를 이름으로 정한 것은, 천추전이 사정전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오행]]에서 서쪽을 나타내는 계절이 가을이므로, ‘가을 추(秋)’ 자를 넣은 것이다. 이와 반대로 서정전 동쪽에 있는 보조 편전의 이름은 '봄 춘(春)'를 넣은 [[경복궁 만춘전|'만춘전(萬春殿)']]이다. [[현판]] 글씨는 경복궁 중건 당시 이조참의였던 정범조(鄭範朝, 1833 ~ 1898)가 썼다. == 역사 ==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모른다. 1394년([[태조(조선)|태조]] 3년)에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 기록에는 나와있지 않고, 1437년《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을 보아 아마 세종 때 창건한 듯 하다.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탔다가 1867년([[고종(대한제국)|고종]] 4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일본 제국|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경복궁]] 내 전각들을 철거할 때도 무사히 남았으나 일제가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열 때 심사실로 사용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 구조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전도 교태전 강녕전.png|width=100%]]}}} || || {{{#gold '''〈경복궁전도〉에서 묘사한 내전 영역'''}}} || [[영조]] 때 만든, [[조선시대|조선 초기]] [[경복궁]]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경복궁전도(景福宮全圖)》를 보면 [[경복궁 사정전|사정전]], [[경복궁 만춘전|만춘전]], [[경복궁 강녕전|강녕전]] 등과 [[복도]]로 이어져있다. 이는 완전히 영역이 떨어진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 장대석 3벌대로[* 맨 아래 한 단은 거의 땅에 묻혀있다.] 만든 [[기단]] 위에 단층으로 세운 2고주 5량가 [[목조]] 전각[* 보통 [[한옥]]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單層)으로 말한다.]이다. *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툇간은 남면에 있고 가운데에 [[대청]]이, 대청 양쪽으로 [[온돌|온돌방]]이 있는 형태이다. 출입구는 대청 앞 툇간을 밖으로 드러내어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전면 칸 수가 짝수이다보니 중앙 칸이 따로 없어 현판을 입구 2칸 중 서편 칸 쪽에 걸어두었다. * 각 칸 면을 보면, [[온돌|온돌방]]에는 머름과 세살방호, 교창을 설치했으며 [[대청]]에는 세살청판분합문을 설치했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초익공이다. 지붕 마루에는 취두, [[용두]]를 올렸으나 양성바름을 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양성바름을 한 [[경복궁 사정전|사정전]]보다 위계가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합각은 [[벽돌]]로 쌓아 만들었으며 오른쪽 합각 중앙에는 역시 벽돌로 '康' 자를 제작해 두었다. * [[대청]] 내부 천장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했다. [[온돌|온돌방]] 내부에는 [[병풍]], [[보료]], [[책상]], [[책꽂이]] 등 [[조선시대]] 당시 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다. * [[아궁이]]는 동쪽과 서쪽 기단 가운데에 각각 2개씩 있었다. 건물 뒤편에 [[굴뚝]]을 만들었는데 [[기단]]과 이어져있는 형태이다. == 여담 == * 1452년(문종 2년) [[문종(조선)|문종]]이 이곳에서 승하했다. 단, 이는 [[http://sillok.history.go.kr/id/kfa_000|《단종실록》 총서에 나온 내용이고]],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205014_002|《문종실록》에는 강녕전에서 승하했다고 적혀있다.]] * [[고려]] [[경종(고려)|경종]]의 왕후였던 [[천추태후|헌애왕후]]의 처소 이름 역시 천추전(千秋殿)이었다. 그래서 헌애왕후는 비공식적으로 '천추태후(天秋太后)'로 불렸고, 나중에는 '천추태후' 호칭이 더 유명해졌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사정전, version=83, title2=천추태후, version2=292, paragraph2=1)] [[분류:경복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