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근대사격제도)] [include(틀:일제강점기 남산의 종교시설)] ||<-2> {{{#FFF {{{+1 '''경성신사'''}}}[br][ruby(京城神社, ruby=けいじょうじんじゃ)]}}} || ||<-2> [include(틀:지도, 장소=숭의여자대학교, 너비=100%, 높이=100%)] || || {{{#FFF '''소재지'''}}} ||[[경기도]] [[경성부]] 와조다이초[br](京畿道京城府倭城台町)[br](現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소파로2길) || || {{{#FFF '''제신(祭神)'''}}} ||[[아마테라스|아마테라스 오미카미]][br]개척3신 || || {{{#FFF '''사격(社格)'''}}} ||[[근대사격제도|국폐소사]](國幣小社) || || {{{#FFF '''창건'''}}} ||[[1898년]] || || {{{#FFF '''해체'''}}} ||[[1945년]] || || [[예대제|{{{#FFF '''예대제'''}}}]] ||[[10월 17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성신사(京城神社)는 일제강점기 [[경성부|경성]]의 [[신사(신토)|신사]]로, 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서울특별시)|중구]] [[숭의여자대학교|숭의여대]] 자리에 있었다. [[1898년]]에 창건되었고, [[1936년]] 국폐소사로 승격되었다. 주제신은 [[아마테라스]]와 개척3신이었다. 경성신사는 1925년에 [[조선신궁]]이 완공되기 전까지 조선의 신사를 대표했다. == 역사 == [[1898년]] [[한양]]에 살던 [[일본인]]들이 왜성대(정확히는 현 [[리라아트고등학교|리라아트고]] 자리)에 '남산대신궁'이란 이름으로 창건했다. 남산 북쪽 기슭은 일본 공사관에 이어 [[한국통감부|통감부]]가 자리잡고 일본군이 주둔하며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된 곳이었다. 일본인 거류민들이 늘어나자 자연스레 신사 건립 요구가 제기되어, 1897년 거류지 남쪽에 왜성대공원을 조성하면서 공원 부지 중 400평의 땅에 신사를 짓기로 했다. 1898년 5월 일본인 거류민 대표가 본국에 건너가 [[이세 신궁]]에서 신체를 받아온 다음, 그해 10월 3일에 진좌제를 거행했다. || [[파일:ksj01.jpg|width=600]] || || 경성신사 배전 ||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을 경성신사(京城神社)라 개칭하고, 오는 10월 17일에 정천궁(正遷宮)[* 신사의 개축, 수선이 완료되어 신체를 본전으로 천좌(遷座)시키는 것.] 겸 제전을 집행하기로 현재 준비중이라는데, 경성 거류민단장의 명의로 각 부장과 기타 단체에 대하여 통첩하였다고 한다. >---- >神社祭典과 通牒, 《[[매일신보]]》, 1913.9.30.[[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3954885&from=%EC%8B%A0%EB%AC%B8%2520%EA%B2%80%EC%83%89|#]] [[1913년]]에 이름을 ‘경성신사’로 바꾸었다. [[1916년]]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정식으로 신사로 허가를 받았다. 1920년대에 이르자 경성의 일본인 수가 늘어나고 신사 규모가 협소해지자 경내를 크게 확장하기로 했다. 그 결과 [[1929년]]에 서쪽으로 100미터 정도 떨어진 숭의여대 자리에 새 건물을 지어 이전하고 개척3신을 합사했다. 여기서 개척3신(開拓三神)이란 [[오오쿠니누시]]와 [[스쿠나히코나]], 국혼신(国魂神)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오오쿠니누시와 스쿠나히코나는 일본 신화에서 한 쌍으로 등장하여 일본 각지의 땅을 만들고 이름을 붙인 신이고, 국혼신은 특정한 신격이 아니라 어떤 지역이 일본 통치권 아래 들어오기 이전의 토착 신령들을 총칭하거나, 또는 그 지역 자체를 관념적으로 신격화한 것이다. 개척3신은 근대 일본이 어떤 지역을 자국 영토로 합병하며 신사를 세울 적에 모시도록 한 대표적인 신격이다. 오오쿠니누시와 스쿠나히코나는 일본 각지의 땅을 만들고 지명을 지은 신격들이므로, 개척3신을 신사에 봉안함은 어떤 지역이 '개척'되어 일본 영토의 일부가 되었음을 종교적으로 표상한다. [[1936년]]에 부산 [[용두산신사]]와 함께 국폐소사로 지정되었다. 각 도에 국폐소사를 하나씩 두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대체로 국폐소사들이 따르는 표준 제의를 따랐으나 특이한 점은 [[경술국치]]일인 [[8월 29일]]이 되면 일한병합기념제를 지냈다는 사실이다. == 조선신궁과의 관계 == 경성신사와 [[조선신궁]]의 위치가 가깝고 모시는 신마저 겹쳤기 때문에, 경성신사가 조선신궁의 부속 신사인 섭사(摂社)가 되리라는 보도도 있었다. 경성신사는 조선신궁의 섭사가 되지 않도록, 또한 참배객들이 어차피 아마테라스를 참배한다면 격이 더 높은 조선신궁으로 가버리지 않도록 애를 많이 썼다. 조선신궁의 체면으로는 허락하기 어려운 신토식 결혼식을 주관한다거나, 심지어 조선인들까지 어울려 놀 수 있는 축제를 연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조선신궁은 일본의 권위를 상징했기 때문에 모든 의례에서 '엄숙'을 강조했으므로 경성신사처럼 민중의 생활에 밀착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경성신사는 신토식 결혼식의 명소로 떠올라 돈을 많이 벌었고, 그 돈으로 시설을 확충하고 경내를 넓혔다. 신사를 후원하는 우지코(氏子)에 조선인들을 참여시키고자 애를 많이 썼다고 한다. == 섭사 == || [[파일:ksj02.jpg|width=100%]] || [[파일:ksj03.jpg|width=100%]] || ||<-2> 경성신사 섭사 이나리사(좌), 노기 신사(우) || * 덴만구(天満宮):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는 신사. 1902년에 [[다자이후텐만구]]에서 권청해 왔다. * 하치만구(八幡宮): 국가의 수호신이자 무신(武神)인 [[하치만]]을 모시는 신사. 구 경성신사 건물을 활용했다. * 이나리사(稲荷社): 농업과 상업의 신인 [[우카노미타마]]를 모신 신사. * 노기 신사(乃木神社): [[러일전쟁]]의 지휘관이자 군신으로 여겨지던 [[노기 마레스케]]를 모신 신사. 1934년에 세웠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조선신궁, version=480)] [[분류:신사(신토)]][[분류:대한민국의 없어진 건축물]][[분류:남산(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