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인조의 손자[br]{{{+1 경안군 | 慶安君}}}'''}}} || ||<|2> '''출생''' ||[[1644년]] [[11월 3일]] || ||[[조선]] [[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2> '''사망''' ||[[1665년]] [[10월 22일]] (향년 20세) || ||[[조선]] [[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 ||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휘''' ||석견(石堅) → 회(檜) || || '''부모''' ||부친 [[소현세자]][br]모친 [[민회빈 강씨]] || || '''형제자매''' ||3남 5녀 중 3남 || || '''자녀''' ||2남 || || '''군호''' ||'''경안군(慶安君)'''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3남이다. == 생애 == 아버지 [[소현세자]]가 1645년 사망한 후, 어머니 [[민회빈 강씨]]마저 1646년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별궁에 안치되었다가 [[인조]]의 미움을 받아 반역죄 누명을 쓰고[* 조정 대신들은 반대했으나 [[인조]]가 크게 화를 내고 서슬을 보이자 이에 눌려서, 은혜를 베풀 것을 청하며 정작 중요한 점인 누명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못했다. 기껏해야 [[이시백]] 정도가 " 홍금적의를 입은 것은 부인의 성품으로 [[비단]]을 탐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모죄란 게 지극히 엄한 일인데, 추정으로 사람 죽이면 씁니까? "라고 변호한 정도다. 그러나 [[김자점]]은 " 예, [[강빈]]은 역적 맞습니다. 하는 꼴을 보니까 싹수가 노랗습디다. " 라고 [[인조]]의 궤변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사약]]을 받아 죽는다. 졸지에 부모를 모두 잃은 셈. 이후 큰형 [[경선군|이석철]](당시 12세), 작은형 이석린(당시 8세)과 함께 4세의 어린 나이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한다. 그러나 석철은 결국 1648년 음력 9월 18일, 그 곳에서 장독[* [[https://herba.kr/boncho/?m=view&t=dict&id=7578|전염병의 일종]]이며 [[장형]]을 받아 생긴 장독과는 다르다.]으로 죽었고, 석린도 같은 해 음력 12월 23일, 병으로 사망했다. 다행히도 석견은 형들과는 달리 살아남아 1650년, 삼촌인 [[효종(조선)|효종]]이 즉위한 이듬해 [[강화도]]로 옮겨갔다가, 1656년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이때 넷째 누나인 [[경녕군주]]와 다섯째 누나인 [[경순군주]]를 10년만에 다시 만난다.] [[경선군|이석철]]과 이석린의 죽음에는 상당히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소현세자]]가 죽자 [[청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용골대]]가 소식을 듣곤 " 소현의 아들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 라고 묻자, [[김자점]]이 기겁하여 " 앓다가 어린 놈 둘이나 죽었는뎁쇼? "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용골대]]는 " 저런, 그럼 '''살아남은 큰 아이는 우리가 [[청나라]]로 데려가서 키우고 싶습니다'''만? " 이라고 요청하였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인조]]는 "석철을 [[청나라]]에 보냈다가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아?"라고 벌벌 떨고, [[김자점]]은 " 그냥 셋 다 죽었다고 할 것을, 내가 미쳤다고 이런 말 실수를 해서…. " 라고 후회한다. 결국 청의 추궁을 무릅쓰고 괜히 셋 다 죽었다는 거짓말을 하여 [[용골대]]는 빈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말이 씨가 되었는지 [[경선군|이석철]]과 이석린이 잇달아 죽은 것이다. [[인조]]는 이 사실을 알고는 " 어떻게 둘이나 연달아 죽냐? 수상한데? " 라고 나인들을 국문하여 법석을 떨었지만, 잠깐 뿐이었고, 이석견의 유배를 절대 풀어주지 않았다. 인조 사후에도 이석견의 고통과 귀양살이는 계속되었다. 그래도 기존의 삼촌 [[봉림대군|효종]]과 사촌형 [[현종(조선)|현종]]은 석견의 어머니 [[강빈]]에 대한 단호한 입장과 별개로, 조카 석견에겐 꽤나 우호적이어서 유배생활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효종(조선)|효종]]이나 [[현종(조선)|현종]]의 입장에선 [[강빈]]을 싫어하지 않아도 왕위 정통성 등의 이유 때문에 단호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강빈]]의 아들인 이석견을 우호적으로 대한 걸 보면 표면상의 갈등과는 별개로 내적으론 [[강빈]] 가족을 나쁘게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소현세자]]를 치료했던 당시 [[어의#s-2]] [[이형익]]을 귀양보내며 이석견의 마음을 달래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659년 윤 3월 4일, 이석견은 복권되어 경안군에 봉해졌다. 이젠 왕실의 중요 종친으로 나름 행색을 차릴 수 있었다. 특히 승헌대부라는 관직도 얻게 된다. 이때 허씨와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허씨와 결혼한 경안군은 아들 2명을 두었다. 하지만 경안군은 오랜 유배 생활로 인해 겪은 고초와 [[스트레스]] 때문인지[* 석방되었을 때가 1656년이라서 10년 만에 유배에서 벗어났다.], 6년 후인 1665년에 [[온천]]으로 목욕을 가다가 병이 나서 실려온 지 얼마 안 되어 22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병상 생활이 길었던 탓인지, [[전라남도]] [[순천시]]의 [[송광사]]에 경안군의 쾌유를 비는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했을 정도.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0912021709011&pt=nv|#]] == 가족 관계 == * 부 :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 ~ 1645) * 모 :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1611 ~ 1646) * 형 : [[경선군]] 이백(慶善君 李栢, 1636 ~ 1648) * 누나 : [[경숙군주]](慶淑郡主, 1637 ~ 1655) * 형 : [[경완군]] 이석린(慶完君 李石麟, 1640 ~ 1648) * 누나 : [[경녕군주]](慶寧郡主, 1642 ~ 1682) * 누나 : [[경순군주]] 이정온(慶順郡主 李正溫, 1643 ~ 1697) * 부인 : 분성군부인 [[김해 허씨]](盆城郡夫人 金海許氏, 1645 ~ 1723) - 사헌부장령 허확(司憲府掌令 許確)의 딸 * 장남 : [[임창군]] 이혼(臨昌君 李焜, 1663 ~ 1724) * 며느리 : 응천군부인 [[밀양 박씨]](凝川郡夫人 宻陽 朴氏, ? ~ 1721) - 박징(朴澂)의 딸 * 손자 :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 1698 ~ 1729) * 손자 : 밀남군 이감(密南君 李堪) - [[임성군(1665)|임성군]](臨城君)에게 출계 * 손자 : 밀원군 이용(密原君 李墉) * 손자 : 밀천군 이담(密川君 李墰) * 손자 : 밀평군 이집(密平君 李㙫) * 손자 : [[밀운군]] 이훈(密雲君 李壎) * 손녀 : [[평산 신씨|신사경]](申思敬)의 처 * 손녀 : [[황주 변씨|변치은]](邉致殷)의 처 * 손녀 : [[반남 박씨|박필륭]](朴弻隆)의 처 * 손녀 : [[상산 김씨|김동정]](金東鼎)의 처 * 손녀 : [[평산 신씨|신흡]](申㬛)의 처 * 차남 : [[임성군(1665)|임성군]] 이엽(臨城君 李熀, 1665 ~ ?) - [[경선군]](慶善君)에게 출계 == 후손 == 지금까지 이어지는 [[전주 이씨]] 소현세자파는 '''모두 경안군의 자손이다.''' [[소현세자]]의 장남([[경선군]]), 차남(경완군)이 모두 유배 중 어린 나이에 죽었고 경안군만이 유일하게 성인까지 살아남아 후사를 이었기 때문이다. 부인 허씨와의 사이에서 [[임창군|임창군 이혼(臨昌君 李焜)]], [[임성군(1665)|임성군 이엽(臨城君 李熀)]]을 두었다. 차남인 임성군은 큰형인 이석철의 양자로 입적시켰는데, 후사를 보지 못하여, 형 [[임창군]]의 차남 밀남군(密南君) 감(堪)을 '''또''' 양자로 들여서 소현세자파 - 장자공파의 대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소현세자파는 모두 3남인 경안군의 후손인 셈이다.[* 경안군의 둘째 형, 즉 소현세자의 차남인 경완군(이석린)은 후사가 없어 성종의 13남 영산군의 7대손 이의저가 사후 양자가 되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 둘은 [[숙종(조선)|숙종]]의 치세 초반인 1679년에 "왕실의 종통(宗統)인 [[임창군]]을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는 흉서(凶書)가 세간에 나도는 바람에 [[제주도]]에 유배당한다. 그러나 대접은 좋았다고 하며, 1684년에 풀려났고, 왕족으로서의 지위도 회복했다. 그러나 차남 [[임성군(1665)|임성군]]은 6년 후 26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인좌의 난]]으로 유명해진 [[밀풍군]]은 [[임창군]]의 장남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족보]]가 꼬인 것이다. 형식적으로나마 장자공파(장남 이석철의 가계)가 있으므로 이쪽이 정통성을 가져야 하겠지만, 양자에 양자로 계승한 것에 불과하므로 실제로는 소현세자의 3남의 장남의 장남이 더 직계에 가까웠던것.] 당대에 통용되던 [[유교]]적인 가치로 보자면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집안이라서[* 실록에서 인조의 조치를 사관이 대놓고 까는 게 두가지인데 하나가 [[환향녀]] 건이고, 두번째가 바로 소현세자 가족에 대한 가혹한 처분을 비판한 것이다. 기록 잘못 썼다가 목 날아가는 사관이 대놓고 이렇게 쓸 정도면 다른 건 몰라도 소현세자에 대한 처사는 당시 양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관되게 비난의 대상이었다는 의미.] 그런지 실제로 그의 후손은 반란만 일어났다 하면 추대받는 바람에 여럿 죽어나갔다. 심지어 [[철종(조선)|철종]] 대에도 그의 후손을 추대하려는 중인, 천민 중심의 역모가 있었다. 그럼에도 자손을 보전해 끝까지 살아남은 잡초같은 집안의 조상이라 하겠다.--이렇게라도 후손이 살아남아야 세상에 정의가 있다는걸 알 수 있지-- 그들을 대신해 왕위에 오른 [[봉림대군|효종]]의 직계들이 점점 손이 귀해지다 결국 단절되어 버린 것과 비교된다.[* [[임창군]]의 경우 아들이 밀풍군을 포함해 6남 5녀, 밀풍군은 5남 4녀를 두었는데, 이 때문인지 살아남은 듯하다. 반면 [[봉림대군|효종]]의 직계 후손들을 보면 대부분 아들이 1명 ~ 2명, 3명 이상 있다 해도 거의 요절하거나 역모에 휘말려 죽음을 당했으니 점점 손이 귀해질 수 밖에 없다.] 이후 [[고종(대한제국)|고종]] 대에 이르러 더이상 왕위를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촌수가 벌어지자 복권된다. 여담으로 그의 묘 근처엔 조선 왕족들의 묘가 많다. 근처에 [[태종(조선)|태종]]와 [[원경왕후]]의 4남 [[성녕대군]]의 묘, [[경혜공주]]와 그 남편 [[정종(부마)|정종]]의 묘 등을 볼 수 있다고 한다. == 창작물에서 == * [[추노(드라마)|추노]] - 자세한 내용은 [[이석견(추노)]] 문서 참조. *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 포커스가 [[소현세자]]의 [[장남]]인 [[경선군]] 이석철에게 맞춰지다 보니, 철없는 어린 동생으로 나온다. [[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1644년 출생]][[분류:1665년 사망]][[분류:전주 이씨 소현세자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