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희궁)] [include(틀:조선 왕궁의 금천교)]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3> {{{#ffd700 {{{+1 '''경희궁 금천교'''}}}[br]{{{-1 慶熙宮 禁川橋}}}}}}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구세군회관,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 ||<-2> {{{#ffd700 '''건축시기'''}}} || [[1620년]] {{{-1 (창건)}}} / [[2001년]] {{{-1 (복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희궁 금천교.png|width=100%]]}}} || || {{{#gold ''' 금천교 '''}}}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희궁]]의 [[금천교(왕궁)|금천교]]이다. [[금천교(왕궁)|금천교]]는 이름대로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돌 다리이다. [[금천]]은 [[풍수지리|풍수지리적]]인 이유[* [[궁궐]]의 앞쪽에 [[물]]을 흐르게 하여 [[풍수]]에서 가장 좋다는 [[배산임수]]를 구현했다.]와 [[밖|외부]]와의 경계[* 물론 실제 [[궁궐]]과 [[밖|외부]]의 경계는 [[문]]과 [[담]]이지만, [[귀신|잡귀]]를 쫓아내고 또 외부인이 [[궁]]에 들어갈 때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는 의미로 [[금천]]을 상징적인 경계로 두었다.]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이다. 그래서 [[경희궁]]의 [[정문]] [[경희궁 흥화문|흥화문]] 터인 [[구세군|구세군 회관]] [[건물]]과 [[중문]] [[경희궁 건명문|건명문]] 터인 서울역사박물관 앞 마당 사이에 있다.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궐도 금천교.png|width=100%]]}}} || || {{{#gold '''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에서 묘사한 금천교. 홍예가 2개가 아닌 1개이다. '''}}} || 1618년([[광해군]] 10년)에 지어졌으며 경희궁에 몇 번의 [[화재]]가 일어났을 때도 [[암석|돌]]로 지었기에 큰 피해 없이 처음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1860년대]]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 [[경복궁]]을 재건할 때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들의 90%를 헐어다 경복궁 중건의 자재로 쓸 때에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 현재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 곳은 1967년 개교했으며 [[한자]]가 ''''景''''城으로 다르다.]가 들어서면서 파묻혔다가 2001년 [[발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 금천 == 금천교 밑을 흐르는 [[경희궁]]의 금천은 경희궁 안에서 발원해 흐르는 [[물]]이다. 그래서 [[하천]] 이름이 따로 없고 통칭 ‘경희궁내수(慶熙宮內水)’로 부른다. 이는 외부 하천을 끌어다 금천으로 이용하는 다른 궁궐과 다른 점이다.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다 경희궁을 빠져나오고 [[새문안로]]를 가로지르자마자 동쪽 정방향으로 틀어 지금의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사거리]] 앞에서 [[청계천]]과 합류했다.[* 정확히는 백운동천으로 합류하나 백운동천이 [[청계천]]의 본류로 간주되어 그냥 청계천으로 흘러든다 해도 무방하다.] [[현재]]는 [[금천교(왕궁)|금천교]] 양 옆에다 아주 좁은 [[구간]]을 재현한 걸 빼고는 전부 [[복개]]되었다. == 구조 == * [[복원]]할 때 옛 [[암석|돌]]과 새 돌을 섞어서 사용했다. 그래서 돌 [[색|색깔]]이 어떤 것은 말끔하고 어떤 것은 지저분하다. 요즘 복원 [[트렌드|추세]]는 [[과거]]에 사용된 자재를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다. [[숭례문]]과 [[경복궁 광화문|]]의 석축처럼. 비록 겉으로는 지저분하게 보일지라도 말이다.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 조금은 줄어드는 셈. 그래도 [[세월]]이 흐르면 새 돌도 때가 타 옛 돌과 어우러질 것이다. * 전반적으로 [[창덕궁 금천교]]와 매우 비슷하다. 다리 위엔 귀틀석과 청판석을 교대로 배열하면서 3개의 [[암석|돌]][[길]]을 놓았다. [[왕]]이 다니는 어도(御道)는 가운데에 있는데 높이가 [[가장자리]] [[신하]]들이 다니는 길보다 조금 높아 [[서열]]을 분명히 나타내었다. 어도의 넓이는, 물론 양 옆 [[신하]]들이 다니는 길보다는 넓으나 창덕궁 금천교와 다르게 큰 차이는 없고 엇비슷하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희궁 금천교 난간.jpg|width=100%]]}}} || || {{{#gold ''' 금천교 난간 '''}}} || [[교량|다리]] 윗 부분의 동, 서 [[가장자리]]엔 각각 6개의 [[암석|돌]] [[기둥]]을 설치한 뒤 그 사이마다 [[난간]]을 설치했다. 돌 기둥 중 엄지기둥[* [[계단]]의 맨 밑이나 계단참 또는 꼭대기에 수직으로 서 있는 [[기둥]].]의 [[머리]] 부분엔 [[서수]]를, [[조각]]하여 올렸고 나머지 기둥엔 [[연꽃]][[봉오리]]를 장식했다. 그리고 [[기둥]] 사이마다 [[암석|판석]]을 세웠는데, 판석은 하엽동자기둥[* 荷葉童子. [[연꽃]] [[잎]] 모양으로 [[조각]]하여, 계단의 옆 난간에 세워 댄 낮고 짧은 [[기둥]].] 모양의 [[부조]]를 중심으로 구멍을 2개 뚫어놓았다. * 엄지기둥을 제외한 나머지 [[기둥]] 밑에는, 멍엣돌에서 튀어나온 [[암석|돌]]로 천록 머리 [[상]]을 [[조각]]해서 놓았다. 천록은 [[후한서|<후한서> - 영제기]]에 나온 [[상상]]의 [[동물]]인데, 요사스럽고 나쁜 것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즉, [[밖|외부]]의 [[잡귀]]를 막는 상징적 경계인 [[금천]]에 사악하고 나쁜 것을 물리치는 [[동물]]인 천록을 둠으로써 [[궁궐]]의 신성함을 더욱 돋보이려 했던 것이다. * 얼핏 봐선 모르지만 아주 자세히 보면 가운데가 약간 솟아올라있는데 [[비(날씨)|비]]올 때 [[비(날씨)|빗물]]이 [[교량|다리]]에 고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빠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 [[교량|다리]] 아랫 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아치]][* [[한국 건축|전통 건축]]에선 [[홍예]]라고 표현한다.]를 2개 만들었다. 그러나 [[경복궁 영제교]], [[창덕궁 금천교]], [[창경궁 옥천교]]와는 다르게, 아치가 만나는 아랫부분을 받치는 [[암석|돌]]이 돌출되어있지 않았다. == 여담 == * 현재 주변엔 전부 최신 [[건물]]들이 들어서있어 전혀 [[경희궁]]의 [[교량|다리]]라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요새 들어 그나마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아직도 대다수는 이 다리를 볼 때 ‘이게 왜 여기 있지?' 하며 의아해한다. --[[듣보잡|그것보다도 걍 아무 생각 안하는 경우가 많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영제교, version=11, title2=창덕궁 금천교, version2=3, title3=경복궁 광화문, version3=268)] [[분류:경희궁]][[분류:금천교]]